낮에는 “회사와 함께 장렬하게 소멸하는 것이 제 꿈입니다”(드라마 )라고 외치고, 밤에는 “나는 예전엔 좀더 괜찮은 사람이었던 것 같아. 꿈이랄 게 없어. 잘 먹고 잘 사는 게 내 꿈일까”()라고 한탄한다. 면접 볼 땐 “내가 어떤 일을 얼마큼 잘할 수 있는가, 회사에 있어서 나는 어떤 의미의 사람인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라던 소신은 입사 뒤 곧바로 “공모전에 당선돼서 사람들에게 뭔가를 보여주는 거야. 나도 돈으로 남자를 사보자꾸나”(뮤지컬 )라는 본심으로 바뀐다. 왜 그렇게 비굴하냐고? 여기는 ‘할 수 있다’는 말만 할 수 있는 사무실이다. ‘퇴근 뒤 봅시다.’ 직장인들의 발길은 직장인들의 속내를 대신 털어놓는 문화거리로 향한다. 지금 서울 대학로에서는 와 의 두 오피스 뮤지컬이 공연되고 있다. 1월2일부터는 샐러리맨의 애환을 담은 드라마 가 SBS에서 방영을 시작했다.
“회의적인 회의, 사장님만 몰라”
직장인 한풀이 뮤지컬을 표방하는 는 사는 게 처절한 말단 여자 회사원을 주인공으로 하는 뮤지컬이다. 9번째 시즌을 방송하고 있는 tvN 드라마 를 원작으로 삼았다. 사리분명하고 일도 잘하는 영애씨를 화나게 한 건 세상이다. 과장은 왕재수, 후배는 왕밉상인 회사다. 뚱뚱하고 못생겨서 눈치볼일 많은 자신이다. “친절한 영애씨는 가라. 막돼먹은 영애씨가 나가신다”고 회사 문을 들어서지만 세상, 그렇게 만만치 않다. 사장님은 찬양하고 여직원은 성희롱하는 과장에다, 사리분별은 잘 못하는데 잔소리는 대용량인 사장이나, 선배는 똥차 취급하고 상사와만 눈을 맞추는 후배 태희들과 지내다 보니 사람 성격 안 좋아지는 것도 시간문제다. 그러나 회사 생활에서 적이 부장 하나라면, 동료나 후배뿐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회사라는 생태계에서는 알고 보면 모두가 불쌍한 인생이다. “코딱지만 한 회사지만 한 번도 월급을 거르거나 밀린 적 없는 것이 자랑”인 사장이나, 돌아온 이혼녀라고 해서 ‘돌아이’라 불리며 회사를 다녀야 하는 친구 지원이나, 지문이 닳도록 손바닥 비비고 다니다 38살 되도록 장가도 못 간 과장이나, 심지어는 ‘커피 천사’라 불리지만 일로 인정받고 싶은 후배도 이 정글에서 나가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는 뮤지컬의 힘을 빌려 이런 속마음을 경쾌하게 풀어놓는다. 직원들이 노래하면, 사장님도 “실은 나도 알아. 그래 회의 그만하자” 하고 맞받는 식이다.
어느 직장이든 주류가 있고 비주류가 있다. 의 회사는 사장부터 말단까지가 비주류인 회사일지 모른다. 서로가 서로에게 비호감인 회사, 죽도록 일해도 쓸 만한 아이디어 하나 안 나오는 하루. 는 직장 내 먹이사슬의 맨 밑바닥에 있는 ‘슈퍼을’ 회사원들의 일상을 솔직하고 재미있게 그려내 고전이 점령한 대학로에서 인기를 얻었다. 뮤지컬을 기획한 CJ E&M 쪽의 집계로는 1월5일까지 총 69회 공연 동안 객석점유율 92%로 2만 명 가까운 관객이 이 뮤지컬을 보았다.
샐러리맨, 판타지가 필요해
직장인 밴드가 쏟아지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365일 반복되는 일상에, 하루 10시간 쏟아지는 지시에 시달리는 직장인들을 위무하는 것은 말보다 노래일지 모른다. Mnet 채널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선보인 밴드 버스커버스커의 노래 은 직장인들의 공감 코드로 인기를 얻었다. “아니요 브래드 오늘 사장님한테 혼났어요/ 아저씨 오늘밤 힘드나요/ 눈가에 드리운 다크서클/ 아가씨 어디 가 클럽 가요/ 아니요 오늘 야근해요” “인생이 뭐길래 사는 게 뭐길래”라고 한탄하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노동의 일상은 사람들을 지쳐 떨어지게 한다. 버스커버스커는 전자우편으로 “생방송 마지막 주에 몹시 힘들었고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은 더욱 힘든 것을 보면서 이 노래를 만들었다. 듣는 사람들도 다 같이 힘든 삶을 달래는 노래에 환호한 것이 아닌가”라고 말했다.
회사는 창의성을 노래하지만 한 처세론 책을 보니 “좋은 기획안을 늦게 주느니보다는 모자란 기획안을 제때 주는 것”이 더 낫단다. 이때도 “상사보다 더 나은 아이디어를 내지 않도록 유의해야” 하는 것이 직장인의 생존학이란다(, 비즈니스 맵 펴냄). 드라마 는 샐러리맨들의 무협과도 같은 생존기를 그린다. 는 중국의 고전 에 빗댄 회사원의 경쟁과 생존을 그린 드라마다. 그룹 회장의 이름은 진시황(이덕화)이고 3류 대학 출신으로 간신히 회사에 입사한 남자 주인공은 유방(이범수), 진 회장에게 복수의 칼을 가는 경쟁 회사의 본부장은 항우(정겨운) 등 주인공 이름도 하나같이 의 주역들이다. 비상한 두뇌를 지닌 장량(김일우), 모사의 귀재 범증(이기영), 무능한 보신주의자 소하(유형관) 등 고전 의 이름을 빌린 중역들도 이들이 지금 심각한 전쟁을 치르고 있음을 암시한다.
수천억원을 들여 수조원을 거두겠다는 신약 개발의 꿈을 둘러싸고 벌이는 두 제약기업 간의 음모와 경쟁을 그린 이 드라마는 평범한 샐러리맨들의 일상을 의 웅대한 그릇에 비견하며 판타지를 선사한다. 드라마를 연출하는 유인식 PD는 “예전 회사원을 소재로 한 드라마로 이 있었다. 에 대한 오마주로서 라는 이름을 택하기는 했지만 이 드라마는 직장인들의 일상이 아니다. 이 방송되던 당시와 달리, 지금 회사원들 중에는 전쟁 같은 일상을 사는 사람이 많다. 이 드라마는 본격적인 전쟁터가 돼버린 회사 생활을 극대화한 드라마다”라고 말했다. 숨가쁜 유머와 번뜩이는 대결 구도로 드라마는 2회 만에 시청률 10%를 넘어섰다.
가 택한 직장인들의 판타지가 웅대한 꿈과 열정 등이었다면, 가 찾은 판타지는 ‘사내 연애’다. 그것도 부잣집 아들인데다 착하고 열심인 남자 후배와의 손끝만 스쳐도 짜릿한 연애다. 드라마만큼이나 뮤지컬에서의 연애도 쉽지 않지만 화면보다 거리를 좁힌 공연은 관객의 체온을 높인다.
“회사 못 가면 죽는다”
1990년대 중반 는 책이 나왔다. 상상력과 자율성을 거세당한 채 포드주의 노동현장의 나사못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공포를 지닌 채 입사했을 그들이 아마 지금은 팀장이나 과장쯤 됐을 텐데 회사의 풍경은 더욱 삭막해져간다. 그사이 ‘회사 못 가면 죽는다’거나 ‘회사 잘리면 죽는다’는 공포가 더욱 커졌다. 뮤지컬 에서 무작정 회사를 뛰쳐나온 영애씨는 이력서를 들고 거리를 헤매는데, 이때 부르는 노래가 어느 때보다 관객의 심정에 가까이 다가서는 노래일 테다. “자격면허 하나 없이 자격지심만/ 대체 어디까지 나를 적어야/ 내가 괜찮다고 믿어주겠니/ …내 맘과 다르게 웃는 포샵된 사진.”
서울 혜화동 소극장 ‘나무와 물’에서 공연하는 뮤지컬 은 자아실현의 꿈보다는 생존의 꿈이 더 큰 직장인들의 처지를 그렸다. 극중 직장인 밴드로 출연하는 인디밴드 네바다#51이 만든 뮤지컬 음악은 직장의 현실을 좀더 직설적으로 노래한다. 정규직원으로 입사하길 바라는 인턴, 성과급이 과분한 파견직원, 언제든지 정리당할 수 있는 정규직원들은 한 팀이 되어 회사 신제품 홍보에 목숨을 건다. 판매실적이 수직 상승할 때는 ‘진동제과 마케팅팀, 우린 뭐든 할 수 있다’는 구호가 현실이 된 듯 느껴진다. 게다가 직장인
밴드에서 꿈과 사랑을 발견하는 생활은 직장인의 로망이다. 그러나 회사가 어려워지자 어제까지 한 팀, 한 가족이던 비정규직 직원들이 내쳐진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눈앞에 벌어지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없다는 생각에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갈 곳이 없지만 빈 주먹을 꽉 쥘 수밖에” “회사와 꿈을 공유하는 파트너가 진정한 샐러리맨 아니겠냐”던 신입사원의 꿈을 배신한 것은 누구일까?
‘샐러리맨 드라마는 심각하면 안 된다’는 공식이 있었다. 그러나 직장인들은 그저 웃으며 낮의 현실을 잊자고 노래를 듣는 건 아닐지 모른다. 1월5일 40회차 공연을 한 은 1월28일부터는 대학로 스타시티 2관으로 옮겨 연장 공연에 들어간다. 을 연출한 진동창작극발전소 박종우 대표는 “그동안 대학로에는 사내 연애나 피상적인 샐러리맨들의 이야기를 그린 극은 있었을지 몰라도 현실적인 직장인의 모습을 담은 이야기가 없었다. 오피스 뮤지컬을 만들며 직장인들이 가장 많이 고민하고 고통당하는 부분을 담아내자고 기획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직장인의 이야기를 뮤지컬로 만들게 됐다”고 했다. 박 대표는 “이런 고용불안 이야기가 화이트칼라만의 문제가 아니니까 언젠가는 한진중공업이나 장기 파업 현장에서도 이 뮤지컬을 공연하고 싶다”고도 했다. 공감과 현실적인 이야기를 찾는 직장인들의 수요 덕에 직장인 드라마의 촉수는 넓고도 깊어진 참이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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