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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의 이후, ‘포스트 담론’ 20년

현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한국에서 뜨거운 감자였던 포스트 담론은 무엇을 남겼나…포스트 담론 심포지엄 준비하는 학자들, “신자유주의 길 터주었다”는 반성과 “사회운동 다각화 기여” 평가 엇갈려
등록 2012-01-12 05:10 수정 2020-05-02 19:26

시인에서 기자를 거쳐, 청와대 행정관으로 소속을 ‘이탈’해버린 김중식은 1990년대 초반에 쓴 시 ‘이탈 이후’에서 동시대를 견뎌야 하는 운동권들의 난감함을 이렇게 적었다. “활처럼 긴장해도 겨냥할 표적이 없다.” 그가 묘파한 1990년대식 우울은 동년배 시인 진은영이 쓴 ‘70년대산’의 시정(詩情)과도 맞닿아 있다. “우리는 목숨을 걸고 쓴다지만/ 우리에게/ 아무도 총을 겨누지 않는다/ 그것이 비극이다.”
두 사람의 시에서 묻어나는 짙은 허무의 멜랑콜리는, 1990년대의 격변과 혼돈 속에서도 여전히 80년대식 전의(戰意)를 버리지 못한 이들이 맞닥뜨렸던 ‘적(適)의 실종’ 상황과 결부돼 있다. 적의 실종을 김중식은 ‘중심의 부재’와 연결짓는데, 이때의 ‘중심’이란 현실 운동의 궁극적 지향점으로서의 사회주의, 세계 인식과 정치적 실천의 이념적 준거로서의 마르크스주의쯤으로 대체해도 별 무리는 없어 보인다.

1992년은 한국에서 포스트마르크스주의 논쟁이 정점에 달했던 해다. 1992년 7월31일 서울 숭실대에서 학술단체협의회가 주최한 ‘마르크스주의의 위기’ 대토론회 장면. 청중 가운데 김문수 경기지사와 장기표 전 신문명연구소장의 모습도 보인다.
                                                                             <한겨레> 자료

1992년은 한국에서 포스트마르크스주의 논쟁이 정점에 달했던 해다. 1992년 7월31일 서울 숭실대에서 학술단체협의회가 주최한 ‘마르크스주의의 위기’ 대토론회 장면. 청중 가운데 김문수 경기지사와 장기표 전 신문명연구소장의 모습도 보인다.                                                                              <한겨레> 자료

가랑비에 옷 젖듯 스며들어

20년 전, 그땐 그랬다. ‘현실사회주의’의 몰락과 ‘과학적 마르크스주의’의 파산에 절망한 많은 이들이 ‘포스트 담론’의 품으로 귀의하던 시절이었다. 포스트마르크스주의(탈마르크스주의), 포스트콜로니얼리즘(탈식민주의), 포스트내셔널리즘(탈민족주의) 등 ‘포스트 접두사’가 붙은 수많은 담론이 젊고 명민한 연구자들을 사로잡았다. 이후 포스트 담론은 다양한 분야에서 현대 문명과 현존 사회질서를 포괄적으로 성찰하고 비판하는 준거틀로 기능했는데, 그 영향력은 철학과 사회학, 정치학, 문학, 역사학 등 인문사회과학의 거의 모든 분과학문을 포괄했다.

신진욱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이 과정이 한국의 사회운동이 1990년대 들어 맞닥뜨린 근본적 상황 변화와 맞물려 있다고 본다. 노동운동이 퇴조하고 시민운동의 영향력이 커지는 가운데 시민운동 안에서도 환경·여성·복지·인권 등 각 부문의 독자성이 강화되면서, 더 이상 사회적 갈등과 적대가 계급관계로 환원될 수 없다는 포스트 담론의 교의가 진보 진영 내부에도 암묵적 합의로 자리잡게 됐다는 것이다.

포스트 담론 20년은 우리 사회에 과연 무엇을 남겼을까. 최근 학계에선 1991~92년부터 본격화한 포스트 담론의 수용사를 비판적으로 점검하려는 40대 연구자들의 움직임이 눈에 띈다. 진태원(철학)·김정한(정치학) 고려대 연구교수가 주도하고 서동진 계원디자인예술대 교수(사회학), 이명원 경희대 교수(국문학), 안준범 성균관대 교수(역사학) 등이 참여해 5월 말 고려대에서 개최하는 ‘포스트 담론 20년의 성찰’이란 심포지엄이 그것이다. 이들의 문제의식은 명확하다. 한국의 지식사회가 겉으로는 포스트 담론에 대해 유보와 거부의 태도를 취했지만 실제론 가랑비에 옷 젖듯 포스트 담론의 자장 안에 흡수돼온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진 교수는 이것이 “포스트 담론이 지닌 지적인 힘의 효과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비판적인 논쟁과 토론의 부재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좀더 구체적인 논의를 위해 시점을 21년 전으로 되돌려보자.

1990년, 이상한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

◇새로운 세계를 위한 철학1·2=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역사를 생성 이래 최근까지 체계적으로 정리. 동독사회과학아카데미 지음(새물결/4300원·5300원).
◇사회변혁과 헤게모니=사회변혁의 문제에 접근하는 헤게모니 개념의 새로운 가능성과 새로운 정치전략으로서의 급진적 민주주의를 모색. 영국 학자 라클라우·무페 공저(터/4800원).

이제 막 지구상에서 사라져버린 동독의 1960년대산 관변 교과서가, 5년 전 서방에서 출간돼 사실상 정전(Cannon)의 반열에 오른 포스트마르크스주의 진영의 핵심 저작과 나란히 독자의 간택을 기다린다. 1990년 11월6일 9면의 지면 풍경이다.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이란 예컨대 이런 것이다.

눈여겨볼 대목은 지성사적 의미와 무게가 상이한 두 책이 22년 전 에선 똑같은 크기의 한 줄짜리 단신으로 취급됐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위기’가 진보 진영의 핵심적 논쟁 주제로 떠올랐던 당시 상황을 떠올리면, 라클라우·무페의 저작이 왜 저토록 푸대접을 받았는지는 납득이 쉽지 않다. 이는 물론 서구 진보이론에 대해 지적 감식안을 갖춘 이가 드물었던 당시 한국 지식인 사회의 부박한 현실을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책의 출간 직후 영국의 좌파 이론가들 사이에서 펼쳐진 논쟁이 1992년 겨울 라는 번역서로 묶여 국내에 출간됐을 때, 한국의 학계와 언론은 2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는 학술면의 4분의 1을 털어 “포스트마르크스주의 논쟁의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가 출간된 1990년 11월로부터 2년. 그사이 한국의 지식인 사회에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한국의 진보 지식인 사회에 1991~92년은 가히 ‘충격과 공포’의 시간이었다. 1991년 말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이 해체됐다. 국내에선 명지대생 강경대씨의 사망으로 촉발된 1991년 5월 투쟁이 처절한 패배로 막을 내리면서 운동 진영의 에너지가 극도로 위축됐다. 좌절의 시기를 거치며 연구자와 운동가들 사이에선 안토니오 그람시·로자 룩셈부르크 등 서구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이 속속 복권됐고, 다른 한편에선 라클라우·무페의 급진민주주의론과 시민사회론 같은 포스트마르크스주의 이론이 빠르게 확산됐다.

서동진 계원디자인예술대 교수.          <한겨레> 김종수

서동진 계원디자인예술대 교수.          <한겨레> 김종수

서동진 “자유주의와의 불장난”

를 번역한 김성기 전 주간(당시 서울시립대 강사)이 비평이론 수준에서 논의되던 포스트모더니즘을 사회이론 차원으로 옮겨오는 데 결정적 구실을 했는데, 이후 그는 10년 넘게 사회과학계를 대표하는 포스트주의 이론가로 활약하게 된다. 포스트마르크스주의의 핵심 교리를 담은 논문들이 이병천 교수 등에 의해 이란 편역서로 선보인 것도 이즈음이었다.

이른바 ‘전통 마르크스주의’ 진영은 과 등 동인지 창간을 통해 포스트 담론에 대항했는데, 그들의 이론적 무기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경제환원론을 비판하며 이데올로기와 계급투쟁, 이론적 실천의 중요성에 천착한 프랑스의 구조주의 마르크스주의자 루이 알튀세르였다. 하지만 알튀세르를 통해 시작된 서구 좌파이론의 사상적 해금은 푸코·데리다·들뢰즈 등을 포괄하는 넓은 의미의 포스트 담론이 사회비판의 급진화와 다원화란 이름 아래 걷잡을 수 없이 유입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실제 두 잡지는 1990년대 중·후반부터 포스트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소개하는 데도 적극성을 띄게 된다.

진태원 고려대 연구교수.               <한겨레21> 김경호

진태원 고려대 연구교수.               <한겨레21> 김경호

이채로운 점은 포스트 담론 심포지엄을 준비하고 있는 진태원·서동진 교수 역시 이 시기를 거치며 전통 마르크스주의에서 프랑스 철학과 문화연구 등으로 탐색의 궤도를 수정해간 학자들이란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 서 교수는 당시의 이탈을 “일종의 불륜이었으나 후회는 없다”고 했다. 성정치학에 탐닉했던 자신의 과거를 “자유주의와의 불장난”이었다고 자기비판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무엇보다 그는 1990년대의 포스트 담론이 한국의 진보적 학문 진영에 끼친 부정적 효과를 강조한다. “자본주의 정치경제에 대한 비판이론으로서 마르크스주의를 무장해제시킴으로써 이후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지배적 규범으로 자리잡게 되는 길을 터주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포스트 담론의 실천적 무능함과 이론적 추상성을 극복하려면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론이자 체제 너머의 대안을 상상하는 해방의 이데올로기(=마르크스주의)와 결합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서 교수는 말한다.

반면 진태원 교수는 포스트 담론의 수용 과정에서 나타난 연구자들의 무책임과 태만을 신랄하게 꼬집는다. 푸코와 들뢰즈의 이론으로 대표되는 프랑스의 포스트 담론이 1960~70년대 변화된 자본주의 현실에서 체제 전환에 필요한 새로운 ‘이론적 무기’를 발견하려는 실천적 관심에서 등장한 것과 달리, 한국에선 담론의 도입과 정착이 서구에서 유행하는 최신 이론을 수입해 학문적 유통 마진을 챙기려는 속물적 관심에 의해 인도돼왔다는 것이다.

20년 맞아 재출간 되는

한편 그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와 양극화의 심화라는 현실 변화를 근거로 암묵적으로 합의된 포스트 담론의 다원주의를 기각하고, 다시금 낡은 경제주의로 회귀려는 움직임에 대해서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다. “포스트 담론의 효능과 타당성을 터무니 없이 부풀리는 것 못잖게 그것의 설득력을 부당하게 깎아내림으로써 외부 공격에 취약한 ‘이데올로기적 허수아비’로 만드는 것 역시 문제가 많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진보학계가 포스트주의라는 ‘괴물’과 ‘허깨비’에 맞서는 이중의 전선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러야 한다고 강조한다.

때마침 절판됐던 라클라우·무페의 가 1월 말 도서출판 후마니타스에서 재출간된다. 이란 원래 제목도 되찾았다. 한국어 초판이 출간된 지 만 21년3개월 만이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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