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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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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자를 말하는 자 죄 없으니…

내곡동 테니스 동호회원 MB가 4대강변에서 미국산 쇠고기를 구워 먹는다는 상상… 장진 감독의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 코리아>, 정치 코미디의 르네상스 열까
등록 2011-12-16 02:53 수정 2020-05-02 19:26

“풍자하되 조롱하지 않겠다.” 케이블채널 TvN의 (SNLK·Saturday Night Live KOREA)의 각본과 연출을 맡으며 시사풍자 코미디쇼에 도전한 영화감독 장진의 포부다. 학비를 벌려고 SBS 예능 프로그램 의 방송작가로 일했던 장 감독으로서는 ‘귀환’인 셈이다. 지난 12월3일 그의 첫 귀환작에 시청자는 ‘빵 터졌다’. 1975년 미국에서 시작해 지금까지 방송되는 의 (SNL)의 제목과 형식을 빌렸다. 한국에선 처음 시도되는 생방송 코미디다. 첫 방송에선 배우 김주혁이, 2회에선 공형진이 ‘제대로’ 망가졌다. 3회는 영화 로 잘 알려진 배우 김인권, 4회 주인공은 박칼린 음악감독이다. SNLK뿐 아니라 연극연출, 영화사 대표로서의 업무 등이 겹쳐 “살면서 이런 멀티플레이는 처음이다, 힘들어 토할 것 같다”는 장진 감독과 전화 인터뷰를 했다.

지난 12월3일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 코리아>(SNLK)의 첫 방송에서 호스트로 출연한 배우 김주혁씨(왼쪽)는 스티브 잡스부터 아바타 분장까지 철저하게 망가지는 모습으로 안방에 웃음을 선사했다. tvN 제공

지난 12월3일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 코리아>(SNLK)의 첫 방송에서 호스트로 출연한 배우 김주혁씨(왼쪽)는 스티브 잡스부터 아바타 분장까지 철저하게 망가지는 모습으로 안방에 웃음을 선사했다. tvN 제공


“안철수, 치사했다고 본다”
현실을 기묘한 각도로 비틀어 보는 이를 키득거리게 하는 ‘장진 코미디’가 안방에서, 매주 토요일 밤 10시30분에 펼쳐진다. 장 감독은 애초 8주차 방송까지 참여할 계획이었지만 세간의 화제와 함께 다소 연장될 가능성도 있다는 전언이다. 이한위·정웅인·장영남·김빈우·안영미·박철민 등 ‘크루’라고 불리는 16명의 고정 게스트도 만만치 않은 진용이다. 뮤지션 게스트로는 첫 회 다이나믹듀오를 이어 2회에선 김창완밴드가 참여했다. 콩트 중심의 ‘시추에이션 코미디’를 표방하지만 원작과 마찬가지로 아슬아슬한 정치풍자가 쇼의 절정이다. 뉴스 형식의 ‘위크앤드업데이트’ 꼭지에 직접 출연하는 장 감독은 “생방송 직전까지 주요 뉴스를 체크한다”고 했다.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해 여야 정치인, 관료, 재벌, 최근 개국한 보수 언론의 종합편성채널까지 풍자의 대상이 된다. 이명박 대통령이 집배원 4만5천 명에게 “어려운 상황에서 노고가 많아 고마움을 표한다”는 내용의 문자를 보냈다는 소식을 전하며 “어려운 상황은 누가 만들었을까요”라고 반문하고, “날 밟고라도 한-미 FTA 논란을 끝냈으면 한다”는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을 향해 “시간과 장소를 알려달라”고 일갈하는 식이다.
갑자기 드는 의구심. 이건 TV판 (나꼼수)인가? 혹은 특정 정치 성향의 시청자만을 위한 놀이터일까? 장 감독은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직설적으로 ‘우리 편 여기 붙어라’라고 하는 와는 다르다. 편가르기로 오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가 정부·여당을 풍자하고 있다고 치자,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웃는다. 그러다 문득 ‘나도 지난 선거에서 한나라당 찍었는데?’라는 생각이 드는 거다. 여기까지 포괄하자는 이야기다. 조롱은 일방적 공격이고, 풍자는 단수가 높아야 할 수 있다. 공격을 하더라도 공격받는 대상이 도망가거나 피할 여지는 남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장 감독은 “너무 심하다 싶을 정도의 조롱문화는 경계하는 편”이라며 ‘제대로 된 정치풍자’의 세 요소로 “풍자를 필요로 하는 시대,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사람들, 그리고 풍자를 정치적 쟁투가 아니라 ‘즐거움의 영역’에서 즐길 줄 아는 시민”을 들었다. “뚜렷한 정치적 노선을 표방하면서 누군가를 지지하겠다는 게 아니다. 기본적으로 방송이 가져야 하는 중립성은 지켜나갈 것”이라고도 했다. 공형진이 출연한 2회에서는 연말 예산 정국마다 되풀이되는 정치권의 ‘미식축구와도 같은 육탄전’ 에피소드가 등장했다.
야권이라고 강 건너 불 구경할 처지는 못 된다. 장 감독은 “야당에도 풍자의 대상이 되기에 좋은 인물이 많다”며 “절박한 사람들은 물대포를 맞으면서도 거리에 나선다. 그런데 야당은 너무 조용하다. 이제 막 첫 방송을 끝냈을 뿐이다. 지켜봐달라”고 했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라고 예외일까. 장 감독은 방송에서 “나도 조감독 안 거치고 곧장 감독 됐다”고 했다.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그러면서도 대선 출마의 여지를 둔 안철수 원장을 두고 한 말이다. 관객들 사이에선 박수와 환호가 터져나왔다. 그러나 장 감독은 “안철수 원장을 지지하거나 선호하지 않는다”고 했다. 뜻밖이다. “안 원장은 한 명의 사업가 출신이고, 대학원 원장 정도의 인사가 아닌가. 그런데도 국민적 주목을 받고 있다. 그를 바라보는 국민과 정치권은 혼란을 느낀다. 그의 ‘총선 불출마’ 발언은 치사했다고 본다. ‘정치에 뜻이 없고, 대선에도 나가지 않는다’라고 하든지, 아니면 ‘대선에 나가겠다’고 분명히 선언을 하면 되는 일이다. 정반대의 지점이기는 하지만 불분명한 태도로 혼란을 초래한다는 점에서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과 비슷하다고 할까. 3주차, 4주차로 가면서 안철수 원장에 대한 풍자도 선보일 것이다.”
11월24일 서울 강남구 CGV청담씨네시티에서 열린 제작발표회에서 배우 정웅인씨, 개그맨 안영미씨, 장진 감독, 배우 김빈우씨와 고경표씨가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tvN 제공

11월24일 서울 강남구 CGV청담씨네시티에서 열린 제작발표회에서 배우 정웅인씨, 개그맨 안영미씨, 장진 감독, 배우 김빈우씨와 고경표씨가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tvN 제공


보수와 진보가 발랄하게 손잡는 무대
저스틴 팀버레이크, 레이디 가가, 마돈나, 고인이 된 마이클 잭슨,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마이클 펠프스 등 월드스타뿐 아니라 정치인들도 기꺼이 출연해 스스로 망가지기를 주저하지 않는 게 원작인 미국 의 정신이다. 그래서 대중은 열광한다. 상원의원 시절의 오바마 대통령은 ‘오바마 가면’을 쓰고 출연했다. 부적절한 언행으로 구설이 끊이지 않는, 그래서 의 단골 놀림감인 공화당의 세라 페일린도 직접 얼굴을 비췄다. 한국에서도 가능할까. ‘내곡동 테니스 동호회’ 깃발을 든 이명박 대통령이 4대강변에서 미국산 쇠고기를 구워 먹으며 스스로 웃음거리가 되고, 박근혜 의원이 수첩을 들고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을 ‘디스’하는 장면. 상상만 해도 염통이 쫄깃해진다. 요즘 지지율 때문에 고민이 많으실 텐데, 그런 파격이 가능하다면 싸늘해진 유권자들 마음도 조금은 누그러들지 않을지. 장 감독은 “정치인이든 아니든, 나오고 싶은 사람만 섭외한다는 철칙이 있다”고 했다. “자신을 다 던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 형성하고 있는 쇼의 중의성(重義性)이란 각계의 슈퍼스타들이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를 던져 미국의 주말을 책임진다는 공공적 책임의식에 있다. 단순히 영화나 앨범 홍보 차원에서 출연하는 예능 프로그램이 아니다. 정치인도 마찬가지다.” 김주혁과 공형진이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던졌다. ‘배우’로서의 아우라를 포기하고 만인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딴따라로, 그렇게 ‘모양 빠지는 길’을 택했다. 시대를 위로하는 그들 나름의 방식이랄까.
장 감독은 ‘웃음’을 위해 보수와 진보, 여당과 야당, 꼰대와 철부지가 손잡는 원작 의 발랄함을 한국에서도 구현해보고 싶다. “정치권의 당사자들이 넓은 마음으로 껄껄 웃는 분위기가 된다면 좀더 편해질 것이다. 민감한 이야기가 등장한다고 자신들이 링에서 싸우는 방식으로 대응한다면 답이 없을 테고.” 다만 원작처럼 마약, 섹스, 총기 등의 코드를 전면에 내세우는 방식은 거부한다. 미국 의 골수팬들 사이에서 한·미 양국의 프로그램은 “에로물과 포르노만큼이나 다르다”는 아쉬움이 터져나오는 것은 감수하겠다는 이야기다. 장 감독은 “단지 시선을 끌고 인기를 얻으려고 대중의 ‘나쁜 취향’을 건드리는 방식은 아니라고 본다”고 했다.
물론 아직 갈 길은 멀다는 우려도 있다. 장 감독도 “너무 앞서가면 일방적 조롱이 되고, 반대로 몸을 사리면 죽도 밥도 안 되는 딜레마가 있다”고 토로한다. 첫 방송에서 일부 출연진의 부자연스러운 연기가 도마에 올랐고, ‘웃음의 밀도’ 측면의 만듦새도 아직까지는 논란의 대상이다. 방송평론가 최원택씨는 “명예훼손죄가 성립하지 않는 미국 정도의 정치풍자는 어렵지 않을까. 결국 쇼의 성패는 톱스타 섭외 여부에 달렸다”며 “아직 프로그램 자체에 대한 평가는 유보”라고 했다.
첫 생방송을 마치고 관객의 박수에 화답하는 〈SNLK〉출연진들. tvN 제공

첫 생방송을 마치고 관객의 박수에 화답하는 〈SNLK〉출연진들. tvN 제공


바람을 무슨 수로 막을까
이야기를 나누면서 문득 조마조마해졌다.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말’이 제대로 ‘말값’을 받지 못하는 세상이다. 걸핏하면 고소장이 날아들고, 밥줄이 끊긴다. 부담스럽지는 않을지. 장 감독은 “‘건드려만 다오’라고 생각하고 있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시청자의 지지가 버팀목이 될 터이다. 는 첫 방송에서 최고 시청률 2.014%(AGB닐슨미디어리서치)를 기록하며 지지세를 과시했다. “미디어나 문화예술 분야에 대한 이 정부의 ‘조임’은 분명하지 않나. 그 조임이 다소 풀렸다는 측면에서 시청자가 즐겁게 받아들이는 게 아닐까.”
하기야 웃음을 검열이나 제재, 고소 따위로 틀어막을 수 있겠는가. 풍자(諷刺)라는 말의 기원은 중국의 시서인 (詩經)에 있다. 은 풍(風)을 시의 육의(六義) 중 첫째로 들었다. 옳거니, ‘말(言)을 바람(風)에 실어 상대를 찌른다(刺)’는 뜻이렷다. 바람을 부르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공론장의 질식이다. 제도적 언로를 통해 말이 말이 되지 못하니 사람들은 말을 바람에 싣는다. 바람을, 무슨 수로 막을까. 쇼펜하우어는 “웃음을 유발하는 것은 추상과 현실 사이의 불일치”라고 썼다. 한국 정치 코미디의 전성기는 1980년대 후반 노태우 당시 대통령 당선자의 “나를 정치풍자 코미디에 이용해도 된다”는 선언에서 시작됐다. 정당성에 위기를 느낀 권력의 유화책이었다. 김형곤·엄용수·양종철 등이 그렇게 정치풍자 코미디의 시대를 열었다. 최양락과 배칠수, 최근의 가 뒤를 따른다. 장진의 는 이 ‘거룩한 계보’를 이어나갈 수 있을까. 일단 조건은 갖춰졌다. 2010년 정년퇴임한 김학성 성균관대 교수(국문학)는 “풍자는 자유가 제한되며 악덕이나 모순으로 넘쳐나는 암울하고 폐쇄된 사회에서 나타나는 양식”이라고 규정했다. 에는 “풍자를 말하는 자 죄 없으며 이를 듣는 자 훈계로 삼을 가치가 있다”는 대목도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집권 마지막 해, 봇물처럼 터져나올 정치 코미디의 르네상스 앞에서 뜨끔할 분 여럿이겠다.
송호균 기자 uknow@hani.co.kr
참고 문헌 (김학성 외 지음·창작과비평사 펴냄)





미국판 SNL 풍자의 힘
페일린 대통령? 종말이 찾아올거야!
2008년 미국 대선 직후 미국 인터넷 언론들은 선거에 프로그램 (SNL·Saturday Night Live)>의 대사들이 영향을 끼쳤다며 이를 ‘SNL 효과’라고 불렀다. 미국 여론조사기관 ‘퍼스트 뷰’는 “선거 기간에 의 영향을 받았다고 답한 10%의 유권자 중 59%가 오바마에게, 39%가 매케인에게 투표했다”고 분석했다. 당시 대선주자인 매케인은 투표를 사흘 앞두고 에 깜짝 출연했다. ‘이단아’라는 자신의 별명과 공화당 캠프의 선거자금 부족 문제를 먼저 꺼내는 자폭 개그를 펼쳐 유권자에게 친근하게 다가서는 쪽을 택했다.
〈SNL〉 세라 페일린 편.〈MBC〉 화면

〈SNL〉 세라 페일린 편.〈MBC〉 화면

정치인의 캐릭터를 서슴없이 들먹이고 웃음거리로 삼는 은 진보지향적인 당파적 코미디를 구사한다. 극우 성향의 정치인 세라 페일린은 이 프로그램의 단골 웃음거리다. 2008년 코미디언 티나 페이는 페일린처럼 분장하고 나와 “유엔에 너무 많은 외국인이 살고 있어 낙심했다”거나 “부시 독트린은 영화 제목이 아니더라”는 등의 대사로 페일린의 경솔한 언행을 풍자해 큰 인기를 얻었다. 페일린이 대통령이 된 뒤 세계에 종말이 찾아온다는 가상 드라마나 동성애자를 탄압하는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이 실은 게이라는 뮤직비디오를 방영하는 등 강도 높은 풍자도 서슴지 않는다. 정치인이 풍자를 피해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함께 웃는 것이다. 2008년 10월 세라 페일린은 티나 페이와 나란히 에 출연하기도 했다.
〈SNL〉 오바마 편. 〈MBC〉 화면

〈SNL〉 오바마 편. 〈MBC〉 화면

2009년 3월 방송된 에피소드 ‘오바마를 화나게 하지 마시오’ 편은 백악관에서 존 매케인, 케이 벨일리 허친슨, 톰 코번 등 공화당 상원의원들과 재정 문제를 이야기하던 오바마가 이성을 잃고 그들을 차례차례 창밖으로 던져버린다는 내용이다. 헐크로 변한 오바마는 추가 지원을 요청하는 AIG보험사의 전화를 부숴버린다. 경제위기의 책임을 오바마에게 전가하고 정파 싸움에 열중하는 공화당과 위기의 주범인 금융사에 대한 분노를 드러낸 에피소드다. 그러나 오바마 역을 맡은 프로레슬러 드웨인 존슨처럼 미국민은 오바마가 평화로운 대통령보다는 진보를 위해 자신의 옷을 찢는 대통령이 되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을까? 그해 9월 은 오바마의 노벨 평화상 수상을 패러디해 “지미 카터는 세계 평화에 공헌해서, 앨 고어는 세계 기후변화에 대해 미국민에게 알리는 데 기여해 평화상을 탔지만, 나는 단지 부시 대통령처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상을 타게 됐다”는 가짜 오바마의 수상 소감을 내보냈다. 오바마는 상원의원 시절 이미 에 출연하며 환호를 받았다. 취임 전에는 최초의 흑인 대통령에 대한 기대를 숨기지 않았지만 그가 백악관의 주인이 되자 날카롭게 각을 세운 것이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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