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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로서 이건 아니다 싶었다”

현직 의사로 한국 의료제도 고발한 다큐멘터리 <하얀 정글>의 송윤희 감독 인터뷰… “누군가 다른 내용으로 2편 찍기 바라”
등록 2011-12-02 06:30 수정 2020-05-02 19:26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관련 ‘괴담’ 중 가장 핫한 이슈가 ‘맹장수술 900만원’ 등 의료에 관한 것이다. 한편에선 괴담이 허구라고 말한다. 한-미 FTA에서 의료 분야가 예외 조항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미 FTA가 단순한 무역관세 조치가 아니라, 공공서비스를 비롯한 경제제도를 미국식으로 바꾸기 위한 시스템 도입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괴담은 허구가 아니다. 벌써부터 약값 인상은 기정사실이고, 수년 전부터 있은 영리병원을 필두로 한 의료 민영화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다. 이때 괴담은 허구라기보다, ‘호러’의 의미로 쓰인다. 이제 지옥문이 열린 것인가? 때마침 한국의료제도의 난맥상을 다룬 다큐멘터리 이 개봉한다. 현직 의사이자 평론가인 황진미가 현직 의사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인 송윤희 감독을 만나 영화와 의료 문제에 대해 설전을 벌였다.

영화 <하얀 정글>은 현직 의사인 송윤희 감독(사진)이 내부자의 시선으로 담아낸 의료 현실 고발 다큐멘터리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영화 <하얀 정글>은 현직 의사인 송윤희 감독(사진)이 내부자의 시선으로 담아낸 의료 현실 고발 다큐멘터리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황진미(이하 황) 산업의학 전문의인데 언제 다큐멘터리를 배웠나.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는 뭔가.

송윤희(이하 송) 2000년 의사 파업 때 본과 2학년이었다. 다음해 휴학을 하고 독립영화 워크숍을 들었다. 2010년 초 안산의료생협에서 진료하는 남편에게 본인부담금이 없어서 치료를 포기한 환자 이야기를 듣고 영화를 찍기로 결심했다. 연구소에서 맨날 보건의료 보고서를 쓰지만, 담당자 책상에만 쌓일 뿐이다. 이런 문제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려면 영화를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의 취지에 백배 동감한다. 그런데 쓴소리를 하자면, 플롯이 매끈해 보이지 않는다. 시작과 끝이 각각 3개쯤 되지 않나. 앞부분 의료 사각지대의 환자들 이야기와 뒷부분 의료 민영화 문제는 톤이 다소 다르다. 애초 기획은 어땠는가.

처음엔 의료 사각지대에 놓인 환자들을 조명하는 영화로 중단편 정도를 찍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것만 다루면 감상적인 다큐멘터리가 될 뿐 근본적 문제 제기가 못 될 것 같아서 의료 시스템 문제를 담아야겠다는 생각에 중장편으로 기획이 커졌다. 지난 8월 말∼9월 초에 기획을 마치고, 9월 중순부터 촬영에 들어갔다. 그러나 편집해보니 소스가 적어서, 보충촬영을 하며 그나마 기획한 영화를 완성할 수 있었다.

인터뷰나 취재에 어려움이 많았겠다.

대부분의 병원이 촬영 금지다. 그래서 동영상을 보는 척하며 몰래 찍은 것도 있다. 인터뷰를 해놓고 빼달라는 경우가 많아 쓰지 못한 것도 꽤 있다.

결국 인터뷰이들이 감독 주변인일 수밖에 없었겠구나. 영화가 그런 제한성을 굳이 감추지 않은 건 솔직해 보이기도 하지만, 다큐멘터리에 필요 이상으로 감독의 존재가 드러나는 건 거슬리더라. 특히 할머니에게 “의료 민영화가 뭔지 아세요?”라고 묻는 장면에서 감독이 할머니에게 “나도 반대하는데”라고 아예 의견을 말해버리는데, 이런 것이 영화를 아마추어적으로 보이게 한다.

다큐멘터리 감독 중에는 자신을 “벽에 붙은 파리로 생각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어차피 내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를 찍은 마이클 무어도 자신의 존재와 견해를 다 드러내지 않았나. 그 장면에서는 할머니에게 감정이입된 상태에서 할머니가 “반대한다고 뭐가 달라지나?”라고 하시니까, 그렇지 않다고 진짜로 말하고 싶었다.

손으로 낙수(落水) 받는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나온다. 그러다 주먹으로 천장을 치고, 수도꼭지와 샤워기로 바뀐다. 그런 이미지를 넣은 이유는 뭔가.

보는 그대로 ‘낙수효과는 거짓이다’란 걸 말한 거다. 주먹 쥐고 천장을 치는 장면과 서울역 집회 장면이 맞물린다. 영화의 의미를 쉽게 전달하려고 이미지를 사용한 것인데, 이런 식의 설득이 영화의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걸로 보일 수도 있다. 영화가 빨리 나와야 한다는 생각에 완성도보다 시의성을 택한 차선책이었다.

내용에 대해 질문하겠다. 영화는 건강보험제도의 문제점을 다루며 환자 처지에서 보장성이 낮다는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보장률이 60%밖에 되지 않아 40%가 환자 주머니에서 나와야 하기 때문에,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 감독의 견해에 동의한다. 그러나 건강보험 문제는 ‘저보장’ 문제뿐 아니라, ‘저부담·저수가’ 문제도 있다. 영화는 건강보험 도입 때 국가가 0%를 부담하며 출발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현재 보험료율이 얼마나 낮은지, 정부가 얼마나 돈을 안 쓰는지 국제적으로 비교하지 않는다. 보장성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비교를 해놓고, 보험료율과 수가는 국제 비교를 하지 않으니까 균형이 맞지 않는다.

저부담과 저수가도 문제다. 하지만 일반 대중을 타깃으로 하는 영화에서 저부담 이야기는 굉장히 어렵다. 수가는 의사들의 관심사이지만, 일반인에겐 관심 밖이고 눈높이에 맞게 설득하기도 힘들다.

영화가 지적하는 불필요한 검사를 하거나 보험에 적용되지 않는 항목을 늘리는 행위, 로봇수술, 미용성형 범람 등의 현상 기저에 저수가가 있다. 다 저수가의 덫에서 도망치려는 행동이다. ‘30초 진료’도 진료의 질과 관계없이 단가가 묶여 있기 때문에, 결국 진료 건수 경쟁밖에 할 수 없어서 빚어진 현상이다. 강아지 백내장 수술이 100만원인데, 사람의 백내장 수술이 80만원이라는 사실이 영화에 잠깐 언급되지만, 과잉 진료 이야기에 파묻힌다. 영화는 불필요한 검사 등을 많이 하는 이유로 의료 행위를 할수록 의사가 돈을 많이 벌기 때문이라며 행위별 수가제를 거론하지만, 이런 설명은 근본적 분석이 되지 못한다.

어떻게 저수가를 메우려고 불필요한 검사를 하는 걸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건 하면 안 되는 행위다.

그런 행위가 옳다는 게 아니다. 당위가 아니라 필연에 관한 이야기다. 의사를 두둔하는 게 아니라, 더 잘 까발렸어야 한다는 말이다. 영화에는 보건경제학적 분석이 미진한 대목이 있다. 가령 영화에서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영리병원을 설명하며 경쟁 운운할 때, 의료에선 공급자 간 경쟁으로 가격 인하를 기대할 수 없다는 보건경제학 교과서의 문구를 직접 보여준다. 하지만 그런 문구가 아니라, 왜 아닌지를 풀어서 보여줬어야 하지 않을까. 오히려 공급자가 수요를 창출하는 상황을 보여주는 방식, 가령 이비인후과 의사가 늘면 편도선 수술이 늘어나는 걸 보여주면 좋았을 것이다.

그 장면은 윤증현 장관이 얼마나 무식한지, 기본도 모른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려고 교과서를 들이댄 것이다.

<하얀 정글>은 영리병원이 도입된다면 병원의 불편한 진실이 일상적인 호러가 될 것임을 경고한다. <하얀 정글>의 한 장면.

<하얀 정글>은 영리병원이 도입된다면 병원의 불편한 진실이 일상적인 호러가 될 것임을 경고한다. <하얀 정글>의 한 장면.

고가 약 때문에 빈곤층으로 전락한 사람 이야기가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고가 약을 처방하는 게 문제인지, 꼭 필요한 약인데 보험이 안 되는 게 문제인지, 폭리를 취하며 복제약을 못 만들게 하는 다국적 제약회사가 문제인지 분석이 부족하다. 이거 FTA 이후 중요해질 사안인데. 심장병에 걸린 아기에게 태아보험보다는 건강보험과 사랑의 리쿼스트가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도 찡했다. 하지만 민간보험보다 공보험이 왜 좋은지 수익률 비교를 통해 보여주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건강보험 하나로’ 운동 쪽에 자료가 있을 텐데. 의료 불신을 해소하는 방안으로 ‘주치의제도’가 영화 속에서 3번 언급된다. 그러나 정확히 그게 뭔지는 안 나온다. 차라리 안산의료생협을 자세히 보여주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의료생협이 대안인지 나도 확신할 수 없다. 나는 우리나라 의료제도가 영국식으로 가야 한다고 보지 않는다. 지금 이렇게 전문의를 마음대로 만날 수 있는데, 1차 진료 위주로 바뀌어서 감기에 약 처방을 하지 않고 물 많이 마시라는 처방을 하면 그런 의료에 환자들이 만족할까? 마이클 무어는 에서 쿠바를 의료의 천국처럼 그렸지만, 내가 만약 쿠바에 갔다면, 아바나의 종합병원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시골 진료소를 찍었을 것이다. 그럼 한국 의료가 나가야 할 롤모델이 무엇인가. 나도 모른다. 나를 가르쳤던 교수님도 모를 것이다. 다만 나는 ‘이건 아니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너무 비판만 한 것 같은데, 영화의 가치는 충분하다. 특히 후반부 의료 민영화에 대한 설명이 좋다. 삼성경제연구소와 생명보험회사의 자료를 보여주며, 영리병원과 민영화의 앞길을 설명한 것이 적절했다. 다만 이미 영리병원처럼 운영되는 치과 체인 등을 예로 들었더라면 영리병원의 폐해가 더 잘 와닿았을 것이다.

치과 체인은 영화가 만들어진 이후 불거져나온 문제다. 당시 치과 체인 문제가 제기됐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취재했을 텐데 아쉽다. 영화를 찍기 위해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함을 절감한다. 그러나 의료에 관한 첫 다큐멘터리인 점을 고려해달라.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누군가 다른 시각과 내용으로 를 찍기 바란다.

황진미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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