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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고성에서 여름나기

[KIN] [히든스폿] 해 질 녘 압권인 은평구립도서관
등록 2011-08-02 08:32 수정 2020-05-02 19:26
» 사진 박상준 제공

» 사진 박상준 제공

얼마 전 이와이 슌지 감독의 를 다시 볼 기회가 있었다. 1990년대 말 대학가에 전설처럼 떠돌았던 해적판 멜로영화다. 극장 정식 개봉 뒤에도 100만 관객을 넘었다지. 자전거 폐달을 밟아 불빛에 시험지를 비춰보는 신이나 설원을 울리던 “오겡키데스카?”라는 외침은 변함없는 명장면이었다. 특히 내용을 미리 알고 보니 도서관 장면이 새롭게 보였다. 두 주인공을 이어준 매개체가 의 도서대출카드였다지. 하나의 목록에 나란한 이름, 같은 책에 관심을 가졌던 누군가와 막연한 로맨스를 꿈꿔보지 않은 이가 있을까. 지금은 전산화로 사라졌다만 여전한 그리움이다.

한창 휴가철이다. 멀리 어딘가로 떠나지 못했다면 모처럼의 도서관 나들이를 권한다. 가만 보면 여름 한철 피서지로 이만한 곳도 없다. 시원한 에어컨디셔너의 바람을 맞으며 평소 읽고 싶던 도서의 책장을 넘겨봄직하다. DVD 감상실도 있으니 미뤄둔 영화도 감상할 수 있겠다. ‘그래도 여름휴가인데…’라고 말하는 이들에게는 서울 은평구립도서관을 추천한다. ‘도서관이 다 똑같지’ 하겠지만 은평구립도서관을 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마치 유럽의 어느 고성(古城)인 양하다. 가족이나 연인과 동반해도 좋겠다. 조금은 휴가스러우리라.

은평구립도서관은 불광근린공원의 서쪽 산기슭에 있다. 집은 본래 서향으로 잘 짓지 않는다. 하물며 마을 뒤쪽 경사지다. 그 약점을 장점으로 만든 건물이 은평구립도서관이다. 곽재환씨가 설계했다. 놀랍게도 벌써 10여 년 전이다. 기존 도서관의 정직한 겉모습을 떠올려서는 곤란하다. 잘 지어진 박물관이나 미술관과도 다르다. 좀더 상상력을 발휘해보기를 바란다. 우선 가장 아래쪽이 주차장이다. 여기서 좌우로 난 계단을 오른다. 계단참에는 소나무가 가지를 드리운다. 계단을 돌아서는 5개의 콘크리트 기둥이다. 푸른 넝쿨이 휘감아 오른다. 각각 살다(生), 알다(知), 놀다(戱), 풀다(業), 빌다(祈)의 의미를 담은 솟대다. 은평구립도서관의 기능이자 상징이다. 그제야 지하 1층, 지상 3층의 도서관이 몸체를 드러낸다.

그 골격을 이루는 것은 응석대((凝夕臺)라 불리는 콘크리트 상자다. 총 24개의 응석대는 좌우 대칭으로 각 4개씩 3층을 이룬다. 키 큰 장방형의 구조물이 촘촘하게 붙은 계단식 구조다. 중심의 고리를 이루는 구조물은 반영정(反影井)이다. 그림자를 비추는 우물이다. 입구에서 보이는 피라미드 형태의 사선 유리 너머다. 그 이름처럼 3층 높이의 속이 빈 공간이다. 하늘로부터 빛이 스민다. 빛과 그림자가 하나고 보면 빛을 담는 우물이기도 하다. 측면은 격자무늬로 마치 사방을 향해 창을 낸 듯하다. 천장에서 들어온 빛이 역으로 번진다.

반영정이 빛을 들이는 공간이라면 좌우의 응석대는 빛을 막는 외벽이다. 계단식 구조다 보니 아래층의 지붕은 자연스레 위층의 정원으로 이어진다. 또 상단에는 창처럼 구멍이 나 정원의 전망 좋은 테라스 구실을 한다. 일대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달리 응석대일까. 무엇보다 해 질 녘에 압권이다. 석양은 서울시내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다. 그 붉은 노을을 마주하노라면 삶의 소소한 희락을 알겠다. 가만가만 마음에 평온도 찾아든다. 첫사랑 소녀의 얼굴도 떠오르려나. 추억이라는 제목의 아련한 책이겠지. 슬며시 책장을 넘겨보려나. 은평구립도서관은 서울 지하철 3호선 연신내역에서 이동한다. 역 근처에서는 키다리 아저씨 화덕피자(02-388-5555)가 가깝다. 담백한 수제 피자를 화덕에 구워 낸다. 앞선 불광역 인근에는 전복라면 전문점(씨푸드 02-911-9069)이 인기다. 전복라면이 별미다. 가격 대비 푸짐하다.

 

박상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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