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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숨죽여 할 필요 없는 이야기”

감독과 주연, 5명 동성애자의 커밍아웃… 성적소수자들의 아지트, 종로 뒷골목을 그린 영화 <종로의 기적>
등록 2011-06-10 11:50 수정 2020-05-03 04:26
영화 <종로의 기적>은 동성애자 5명의 일상을 그린 다큐멘터리다. 영화를 만든 이혁상 감독(오른쪽)과 영화에 출연하는 소준문 감독.

영화 <종로의 기적>은 동성애자 5명의 일상을 그린 다큐멘터리다. 영화를 만든 이혁상 감독(오른쪽)과 영화에 출연하는 소준문 감독.

1996년, 이혁상 감독은 불안했다. 내가 정말 게이일까, 설마 그럴까. 서울 종로 주변을 맴돌았다. 종로3가 입구를 지키는 동성애자인권단체 ‘친구사이’ 사무실을 찾았다. 동성애 세미나를 하는 이성애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뒤 자료집만 받아 돌아섰다. 안쪽 골목으로는 한 발도 딛지 못했다. 몇 달 뒤 선배가 게이 친구를 만나는 자리에 큰맘 먹고 따라나섰다. 난생처음 게이바 문을 열었다. 이 감독은 “동네 형들만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모인 광경이 가슴에 쑥 들어왔다”고 그때를 돌아본다. 그곳이 서울 낙원동, 하필 가게 이름도 ‘유토피아’였다. 자신은 결국 여기 왔어야 한다는 계시였을 거라고 믿고 있다.

1998년, 소준문 감독은 화가 나 있었다. 난 왜 이렇게 됐을까, 스스로를 미워하는 마음에 시달렸다. 종로에 가보자. 평화를 찾고 싶은 마음이 그렇게 시켰다. 당시엔 수상한 소문도, 들뜬 경험담도 모두 낙원동 파고다극장에서 나왔다. 혼자 어두운 극장 안에 앉아 있다가 발길을 돌렸다. 다시 종로에 돌아온 것은 여러 해 뒤의 일이었다. 그사이 입대할 때 게이임을 밝혔다가 군 정신병동에 강제 입원되는 참혹한 경험을 거쳐야 했다. 덕분에 가족도 친구도 알아버렸다. 제대 뒤 ‘친구사이’가 그의 손을 잡았다. 군대가 그를 종로로 보낸 셈이다.

종로의 커밍아웃

6월2일 개봉한 영화 은 종로를 삶의 한 아지트로 간직하고 있는 게이들의 이야기다. 다큐멘터리 형식의 이 영화에 출연한 주연은 4명이다. 영화 를 만든 소준문씨, 동성애자인권연대 및 참의료실천청년한의사회 활동가인 장병권씨, 파스타집을 운영하는 최영수씨, 대기업 사무직 노동자였다가 동성애자인권연대 대표로 전직한 정욜씨 등은 종로에서 삶의 터전을 찾은 사람들이다. 10년 동안 이반 친구 하나 없이 홀로 지내던 최영수씨는 종로 포장마차에서 처음으로 이반 친구를 만났다. 그는 지(G)보이스라는 게이 코러스에서 노래하며 살아갈 의미를 찾았노라고 고백한다. 카메라로 이들을 좇는 이혁상 감독까지 더하면 5명의 동성애자는 자신이 종로와 얽혀 사는 모습을 관객 앞에 커밍아웃한다. 영화 시사회에서 이 감독은 “이 영화는 종로를 알게 된 후에야 더 이상 숨죽여 살 필요가 없었던 나의 이야기”라고 했다. 영화는 동성애자들의 커밍아웃 이야기인 동시에 종로 동성애 문화의 커밍아웃이기도 하다.
왜 종로일까. 종로의 뒷골목은 동성애 문화의 본산이다. 2010년 아이샵에서 발간한 게이맵에 따르면 종로의 게이바와 술집은 100여 곳으로 추산된다. 이태원은 12~13곳이라고 한다. 이곳 종로에 모인 소수자들은 고립된 인생을 벗고 커뮤니티의 힘을 가질 기회를 찾는다. 최근엔 성소수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사회적으로 꺼내면서 종로 거리 곳곳에도 변화의 낌새가 있었단다. 지하나 안쪽 골목에 웅크려 있던 게이바들이 지상으로 올라왔다. 이성애 공간이라 불리던 커피숍들도 게이들이 점령했다. 얼마 전 없어진 낙원상가 1층 커피빈은 주말이면 게이들이 포진해 게이빈이라고도 불렸다. 밤이면 포장마차가 늘어선 거리에선 남자끼리 손을 잡고 가는 광경도 볼 수 있다. 이혁상 감독은 이런 변화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이성애자와 동성애자의 놀이 공간이 서로 자연스럽게 섞여든다는 것”이라고 한다. 소준문 감독은 한때 종로에 발길을 끊었다가 돌아온 2009년 단골 술집 ‘발렌티노’에 시즌2라는 플래카드가 붙어 있는 것을 보고 퍼뜩 놀랐다. 성정체성을 알리는 것에 불편해하는 기색이 한결 덜한 낯선 20대가 거리를 채우고 있었다. 종로에는, 종로의 게이 커뮤니티에는, 시즌2가 시작된 것일까. 이혁상 감독도 2010년 다큐멘터리를 마무리하러 나왔다가 새삼 변화를 느꼈다. 2008년 그가 처음 영화를 찍기 시작할 때는 많은 게이들이 카메라를 피하거나 화를 냈다. 그런데 요즘은 “예쁘게 찍어주세요, 감독 오빠” 하며 카메라에 얼굴을 댄다. 낙원동 밤의 주인들이 낮의 거리로 나오고 있는 셈이다.

무지개 다리를 건너

물론 종로 밖의 세상은 아직 흑백이다. 정작 올해의 퀴어 문화 퍼레이드도 종로에서 치르지 못하고 다른 곳을 찾아야 했다.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강의하는 이혁상 감독은 영화 시사회에 대학 직원들을 초청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알고 지낸 지 7년이 넘었지만 이들에게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밝힌 일이 없었다.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감염자인 애인과 사는 정욜씨는 회사에서 “왜 결혼 안 하느냐”는 질문에 시달린다. 동료들은 이성 애인을 스스럼없이 데려오지만, 장병권씨는 아직 한 번도 남자 애인을 일터 사람들에게 소개하지 못했다. 영화 에서는 소준문 감독이 영화를 만들며 스태프들과 갈등하는 과정을 담기도 했다. 성적소수자에게 소통은 좁은 길이다. 이혁상 감독은 “종로의 뒷골목만이, 거기서 술 먹고 소비하는 것만이 게이들에게 허용된 유일한 문화”라고 말했다. 그 선을 무슨 수로 넘을까. 영화 은 ‘연분홍치마’와 ‘친구사이’ 두 인권단체의 합작품이다. 인권 감수성이 넓고 큰 비성적소수자들이라면 이 영화를 아이들을 데리고 보러 올까. 아이들에게 이야기해줄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거야말로 종로에서 생기는 기적이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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