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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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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집을 위한 수상한 변명

859호 ‘TV, 불량 맛집을 찾아라!’ 보도 이후, 가짜 맛집 방송 관행 공개한 김재환 감독과 방송·제작사 공방 일어
등록 2011-05-11 09:51 수정 2020-05-03 04:26
» ‘협찬’이라 쓰고 ‘광고’라 부른다. 방송사들은 식당을 홍보할 목적으로 돈을 받은 일이 없다고 하지만 식당에 건네지는 제안서들은 프로그램 가격과 노출 정도까지 미리 정하고 있었다. 김재환 감독이 〈한겨레21〉에 보내온 홍보대행사들의 방송 출연 제안서와 작가가 작성한 맛집 손님들의 칭찬이 담긴 촬영안.

» ‘협찬’이라 쓰고 ‘광고’라 부른다. 방송사들은 식당을 홍보할 목적으로 돈을 받은 일이 없다고 하지만 식당에 건네지는 제안서들은 프로그램 가격과 노출 정도까지 미리 정하고 있었다. 김재환 감독이 〈한겨레21〉에 보내온 홍보대행사들의 방송 출연 제안서와 작가가 작성한 맛집 손님들의 칭찬이 담긴 촬영안.

맛집 소개 방송의 이면을 파헤친 영화 는 방송가의 관행을 바꿀 수 있을까. 개봉 전부터 방송사와 제작사의 공방이 뜨겁다. 은 지난주 레드 기획 ‘TV, 불량 맛집을 찾아라!’ 보도가 나간 뒤 방송사와 규제·감독기관의 견해를 물었다.

“돈은 안 받았다, 협찬을 받았을 뿐”

를 만든 김재환 감독은 에 홍보대행사에서 받은 제안서와 외주제작사에서 받은 촬영 구성안을 추가로 공개했다. 1천만원을 내면 SBS 등 뉴스·시사교양 프로그램에 출연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다른 홍보대행사는 문화방송 출연료로 ‘스타맛집’ 코너는 회당 900만원, ‘맛객’은 600만원, ‘건강보감 대단한 음식’은 1천만원을 제시했다. 제안서는 이 프로그램들에서 식당 간판의 일부나 전부를 화면에 노출해온 예를 홍보하고 있기도 하다. 그동안 방송이 식당에서 돈을 받아왔다는 소문이 구체적 증거자료를 얻은 셈이다.

SBS 박두선 책임연출자는 “프로그램은 공식적으로든 비공식적으로든 돈을 받지 않았으며, 다만 협찬을 받았을 뿐이다”라고 했다. 그는 “그동안 이 프로그램에서는 맛집 소개가 많이 있었지만 암암리에 돈을 받은 경우는 없었다. 1월11일 방송된 청양고추 특집 코너에서 청양고추의 효능을 보여주기 위해 전문식당을 섭외했고, 이 식당에서 협찬을 받은 것으로 안다”고 했다. 에는 식재료를 선정해 마니아들과 활용 사례를 소개하는 코너가 있다. ‘이 코너에 식당 소개가 일부 들어갔지만, 협찬대행사는 협찬금을 받은 것이지 식당 홍보비로 받은 것은 아니었다’는 해명이다.

SBS 쪽에서 ‘돈은 받지 않고 협찬금만 받았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방송법상 외주제작사는 협찬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외주제작사가 프로그램을 만들며 경비·물품·용역·인력 또는 장소 등을 제공받았다면 그 협찬주의 명칭이나 상호를 알릴 수 있도록 돼 있기도 하다. 이 법은 외주제작사가 방송사한테서 낮은 제작비를 받아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하는 현실을 인정하는 것인데, 불합리한 제도라는 지적이 많다. 경영이 어려운 외주제작사가 편법으로 간접광고를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셈이기 때문이다.

제작사를 통해 협찬을 받았다는 SBS 쪽의 해명이 사실인지도 논란거리다. 김재환 감독이 운영하는 식당은 SBS 에 출연하기 전 SBS 광고국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는 홍보대행사의 안내에 따라 대행사에 법인 사업자등록증을 건넸다고 한다. 김 감독은 “SBS가 작은 식당보다는 법인 형태의 큰 식당을 선호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들었다”고 말했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방송사는 협찬을 받아선 안 된다는 규정에도 불구하고 협찬주인 식당을 직접 선정·심사하는 등 협찬 과정에 관여한 셈이 된다. SBS 쪽은 “식당에는 어떤 서류도 요구한 일이 없다”고 했지만, 그렇다면 김 감독에게 식당 사업자등록증을 제출하라고 누가 어떤 목적으로 요구했는지 규명돼야 한다.

당신이 보는 것은 광고다

간접광고와 협찬을 규제하는 정부기관이 맛집 방송의 운영 실태를 정확히 알고 있었느냐도 논란거리다.

방송통신위원회와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담당 사무관들은 과의 전화 통화에서 한결같이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되물어왔다. 방송통신위원회 편성평가정책과 배경윤 사무관은 “식당들이 돈을 내고 출연하는 것은 몰랐다”면서도 “방송사가 협찬 형식으로 식당을 출연시켰다면 규제가 어렵다. 협찬 규정을 악용하지 않도록 방송사에 주지시키고는 있다”고 했다.

» 영화 <트루맛쇼>의 김재환 감독이 운영하는 식당(왼쪽)에서 맛집 프로그램을 촬영하는 방송 제작진을 몰래카메라로 다시 촬영하는 모습(오른쪽).(주)B2E 제공

» 영화 <트루맛쇼>의 김재환 감독이 운영하는 식당(왼쪽)에서 맛집 프로그램을 촬영하는 방송 제작진을 몰래카메라로 다시 촬영하는 모습(오른쪽).(주)B2E 제공

그러나 식당들을 ‘맛집’으로 소개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프로그램에 협찬 규정만을 적용할 수 있을까.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에서는 “협찬주에게 광고 효과를 줄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제작·구성해서는 안 된다”(제46조)고 규정하고 있다. 드라마 등은 의도적으로 협찬주의 광고를 노출해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징계를 받은 일이 있다. 어떻든 현빈의 자동차나 김태희의 노트북이 각광받으니 협찬 기업으로서는 아깝지 않은 투자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5~15분가량 어떤 식당의 맛과 재료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는 맛집 소개 프로그램은 협찬이나 간접광고가 아니라 ‘긴 광고방송’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지상파 방송 3사는 특정 식당이 어느 지역에 있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외관을 슬쩍 비추는 것도 모자라 누리집에서 식당 전화번호와 주소를 안내하고 있다. 식당들이 맛집이 아니라 돈을 내고 출연한 ‘협찬 식당’이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규제는 물론 프로그램 형식의 변화도 필요하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 관계자는 “(돈을 받았다는) 사실관계가 확인되면 문제의 소지가 있다. 이 대목에서 신빙성 있는 제보가 있다면 식당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거나 의도적으로 부각한 내용은 심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했다.

는 지난 4월29일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대중에게 처음으로 공개됐다. “뜨겁지 않더라도 뜨거운 척해야 해요”라고 PD가 맛집 손님을 지도하고, 스타가 단골 식당을 찾아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소개해야 하는데 음식 이름을 제대로 대지 못하는 장면에선 객석의 웃음이 이어졌다.

몰래카메라에 담겼던 이 장면들을 방송사 쪽은 전면 부인했다. SBS 박두선 책임연출자는 “식당에 메뉴를 바꾸라고 요구한 일이 없다”며 “청양고추 전문점도 아닌 식당이 출연했다면, 식당이 있지도 않은 메뉴로 협찬대행사와 제작진을 속인 것”이라고 말했다. “가짜 손님들을 동원했다는 것도 금시초문”이라고 했다. SBS 쪽은 “맛집을 선정할 때는 주관이 개입할 수밖에 없어서 어렵기는 하지만, 맛집을 부풀리려고 손님을 동원하거나 내용을 조작한 일이 없다”고도 주장했다. 문화방송 김정규 PD도 “사실과 다른 내용이 있어 파악하는 중”이라며 “가공되거나 조작된 내용일 수 있어서 오히려 방송사가 피해자일 수 있다. 밝혀진다면 따로 해명하겠다”고 했다.

사전 연출·출연자 모집… 예견된 조작
» 식당은 방송에 작지만 확실한 광고주다. 영화 <트루맛쇼>는 미디어가 광고를 위해 시청자를 속이는 장면을 영화로 만들었다. 사진은 전주국제영화제 ‘관객과의 대화’ 때 김재환 감독. JIFF 제공

» 식당은 방송에 작지만 확실한 광고주다. 영화 <트루맛쇼>는 미디어가 광고를 위해 시청자를 속이는 장면을 영화로 만들었다. 사진은 전주국제영화제 ‘관객과의 대화’ 때 김재환 감독. JIFF 제공

김재환 감독은 “작가가 촬영 전에 전화를 해서, 메뉴로 청양고추 돈가스, 홍합 라면이 어떠냐고 했더니 ‘매워서 죽든지 말든지’라는 뜻으로 ‘죽말’ 세트 메뉴로 정하자고 아이디어를 냈다. 매운 정도에 따라 3가지 메뉴로 해달라고 주문했다. 손님들도 사장님 아는 사람으로 3팀을 구성해달라고 미리 요구했다”고 했다. 촬영 전 사장의 음식점 철학부터 손님 소감까지 자세히 적힌 구성안도 보내왔다. 또 4월16일 촬영 구성안에서는 김종민씨가 단골집을 소개하기로 돼 있는데 촬영 중 자연스럽게 되지 않자, 그날 대신 투입된 천명훈씨가 단골집으로 소개하는 해프닝도 있었다고 한다.

출연자 모집 과정을 보면 조작방송은 예견된 일이라고 해야 할 듯 하다. 식당이 결정되면 작가들은 출연자 모집 카페에 글을 올린다. 한 카페엔 “햇살 좋은 날 야외에서 삼계탕 드실 분 구해요.” “○월○○일 경기도 △△시 식당에서 촬영합니다. 출연료는 맛있는 점심 한 끼” 같은 글들이 250건을 넘는다.

조작방송이 밝혀져도 처벌은 무겁지 않다. 지난해 11월5일 한국방송 〈VJ 특공대〉가 ‘한국 아이돌 일본 점령기’ 편에서 한국에 있는 일본인 유학생을 관광객처럼 연출했다는 조작 의혹이 불거지자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한국방송에 경고 조처를 내렸다. 외주제작사 관리 책임을 물었을 뿐, 〈VJ 특공대〉는 여전히 한국방송의 장수 프로그램이다. 영화 가 조작방송 증거를 보여주더라도 실제 프로그램의 존폐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을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지상파 3사의 20개 넘는 프로그램에 1년에 1만 곳 넘는 식당이 출연한다. 뉴스와 교양정보 프로그램 구석구석을 점령한 넘쳐나는 맛집 중 진짜 맛집은 얼마나 될까. 대중이 1차로 평가하고, 전문가 집단이 최종 선정해 레스토랑 평가서를 내는 가 선정한 ‘2011년 전국의 레스토랑’을 보면 추천할 만한 레스토랑은 1200곳 남짓이다. 조사를 신뢰한다면 TV에 나오는 맛집 중 90%는 추천 대상이 아닌 식당이다. 평가 기준도 문제다. 방송사는 잡음을 줄이려고 식당을 선정할 때 대형 식당을 선호하지만, 청결과 위생 등 기본적 평가 절차를 건너뛴 탓에 신뢰할 수 없는 정보가 방송을 탄다. 지난 2월24일에는 유명 감자탕 프랜차이즈 업체가 대장균 범벅인 양념장을 쓰다 식품의약품안전청에 적발되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 업체는 한국방송 등 여러 방송에서 맛집으로 소개했던 곳이다. 방송사가 시청률과 협찬 금액이 줄어드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맛집 방송 편성을 줄이고 질을 높이려 하지 않는다면 무리한 추천은 멈추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내부고발’은 ‘맛쇼’를 바꿀 수 있을까

김재환 감독은 “방송사가 외주제작사에 바른 길을 걷지 못하게 하면서 자신들은 책임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는 “전주영화제에서 영화가 상영되자마자 네가 뭘 바라고 이런 일을 벌였느냐는 방송 관계자들의 전화가 쏟아졌다”며, 자신이 원하는 것은 “방송사가 이익을 줄여 제작비를 현실화하고 저작권을 나누는 것”이라고 했다. “방송 3사 노조가 답해야 합니다. 모두 이런 관행을 알고 있으면서도 방송사 직원 급여를 깎아서라도 양심 없는 프로그램은 만들지 않아야 한다고, 교양정보 프로그램을 만드는 젊은 작가와 프로듀서가 양심을 팔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왜 말하지 않습니까. 저는 진보적인 PD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보다 못한 처지에서 같이 방송을 만드는 다른 사람들의 인권의 문제입니다. 돈이 되는 프로그램만 만들어 방송사 직원들 임금만 지키려고 한다면 차라리 노조 간판을 내리십시오.” 16년차 PD이기도 김재환 감독은 영화 에서 내부고발을 시도했다. 그의 목소리는 여의도 질서에 새 바람을 몰아올 수 있을까.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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