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size="5"><font color="#991900">그들의 운명에 울고 웃는 현대 시민들</font></font>
<font color="#1153A4">현실과 허구의 융합,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그리스 비극의 연민·공포·카타르시스를 읽다</font>
진중권 문화평론가
몇 번 채널을 돌리면 알 수 있듯이 넘쳐나는 것이 이른바 ‘서바이벌 게임’ 프로그램. 요리·패션·노래 등 경쟁 분야도 다양하고, 아마추어에서 해당 분야의 전문가까지 참가자도 다양하다. 하지만 어디서 이미 본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 아마도 미국에서 방송 포맷을 베낀 모양이다. 미국 방송을 베끼는 것이야 모든 나라에서 하는 일이다. 하지만 서바이벌 게임이 특히 한국에서 이토록 선풍적 인기를 끄는 데에는 각별한 이유가 있을 게다. 그것은 한국이 미국 못지않게, 아니 미국보다 더 치열한 경쟁사회이기 때문이 아닐까?
가장 현실에 가까운 ‘놀이’
경쟁은 우리 신체 안에 프로그래밍된 생물학적 본능일지도 모른다. 자신을 더 널리 퍼뜨리려고 유전자들끼리도 경쟁을 한다지 않는가. 경쟁은 이 체제를 지탱하는 원리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력’이라 불리는 인간들도 서로 경쟁해야 한다. 그 안에도 공평함이 있다면, 우리를 경쟁시키는 자본들께서도 서로 경쟁을 해야 한다는 것. 이 치열한 경쟁이 자본주의적 생산력의 비결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 경쟁이 글자 그대로 생존경쟁이 된다면, 인간은 늑대가 되고, 사회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장으로 변할 것이다.
어떤 이론에 따르면, 유전자는 이타적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유전자가 늘 경쟁만 하는 것은 아니고, 서로 협력하기도 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비합리적으로 지나친 경쟁은 외려 생산의 효율을 떨어뜨린다. 나아가 과도한 경쟁은 거기에 참여하는 개체들에게 극심한 스트레스를 주게 된다. 유독 우리나라에서 학업 때문에 자살을 하는 일이 빈번히 벌어지는 것은 극심한 입시 경쟁 때문이다. 입시 경쟁은 졸업 뒤 입사 경쟁으로 이어진다. 유난히 경쟁이 과도한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편, 하위징아가 지적하듯이 인간에게는 ‘유희 본능’이 있다. 그리하여 굳이 삶이 강요하지 않아도 인간들은 무료함을 쫓으려고 경쟁을 즐기곤 한다. 물론 ‘놀이’로 행해지는 이 경쟁은 진짜가 아니라 허구에 불과하다. 허구라 해서 진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남미의 어느 두 나라는 놀이를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여 축구경기가 끝난 뒤 서로 전쟁을 벌였다. 반면 놀이를 너무 하릴없이 받아들이면 아예 재미가 없어진다. 놀이의 진정한 적은 상대가 아니라, ‘쓸데없다’는 말로 ‘놀이의 분위기를 깨는 자’(Spielverderber)다.
오늘날 ‘놀이’는 차고 넘친다. 후기 자본주의는 아예 ‘엔터테인먼트’의 산업이 되어버리지 않았던가. 차고 넘치는 오락들의 경쟁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놀이의 몰입도를, 말하자면 놀이에 동반되는 진지함과 긴장감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 놀이는 현실에 가까울수록 진지해진다. 가령 장난으로 하는 카드놀이와 도박으로 하는 카드놀이의 차이를 생각해보라. 수많은 놀이에 익숙해져 웬만한 놀이에 만족하지 못하는 대중을 만족시키려면, 놀이를 가능한 한 현실에 가깝게 가져가야 한다. 서바이벌 게임은 이 필요성에서 탄생했을 것이다.
다른 게임과 달리, 서바이벌 게임은 현실과 허구가 구별되지 않는 지점에 서 있다. 그 안에서는 현실과 똑같이 경쟁이 일어난다. 가수 지망생들은 노래를 하고, 초보 디자이너들은 옷을 만들고, 미래의 요리사들은 요리를 한다. 이는 ‘경연대회’나 ‘선발대회’라는 이름으로 현실에서도 벌어지는 일이나, 우리는 이 현실의 경쟁을 ‘오락’이라 부르지는 않는다. 서바이벌 게임의 상황은 가령 ‘가요제’나 ‘공모전’에서 벌어지는 것과 똑같다. 하지만 그 속에서 벌어지는 경연이나 경쟁은 어디까지나 허구다. 애초에 방송을 위해 연출된 것이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카타르시스미디어 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서바이벌 게임은 올드미디어가 뉴미디어를 재매개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치열한 경쟁 속에 살아남는 것이 컴퓨터 게임에 즐겨 사용되는 서사 중 하나라면, 서바이벌 게임은 대중에게 익숙한 이 오락의 문법을 방송에서 차용한 것이라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현실과 허구의 존재론적 융합이자, 동시에 방송과 게임이라는 매체의 융합이기도 하다. 이 이중의 융합을 통해 서바이벌 게임은 경쟁사회의 심리적 압박, 그 스트레스를 오락으로 바꾸어 향유의 대상으로 제공하는 게 아닐까?
이 명제를 그럴듯하게 만들기 위해 고대 그리스로 돌아가보자. 오늘날 우리는 영화나 연극, 드라마가 ‘허구’에 불과하다고 보나, 비극을 보는 고대인들은 ‘현실’과 ‘허구’를 그렇게 분명하게 구별하지 못했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가 말한 ‘연민’(Eleos)은 그저 주인공이 ‘불쌍하다’는 수준을 넘어, 그의 운명이 곧 내 것이 될 수 있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가령 내 차례를 기다리며 친구가 먼저 선생님에게 매 맞는 모습을 바라보는 심정이랄까? 따라서 그가 말한 ‘공포’(phobia) 역시 영화를 보는 우리의 것보다 훨씬 강력해, 거의 ‘경악’에 가까웠다.
그리스 비극의 심리적 바탕이 된 것은 아마 ‘운명’에 대한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아직 인문과학이나 사회과학이 발달하지 않아, 인간과 사회의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어려웠다. 게다가 고대 정복사회에서는 한 번의 전쟁, 혹은 한 번의 부채로 유력한 시민이 졸지에 처참한 노예 신세가 될 수 있었다. 미래의 불확실성에서 오는 이 두려움을 그리스인들은 비극을 통해 해소했다. 영웅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을 통해 ‘연민’을 느끼고, 그의 몰락에 ‘공포’를 느끼는 가운데, 그들은 ‘운명’이 주는 심리적 압박을 배설(‘카타르시스’)했던 것이다.
지금의 상황과 비슷하지 않은가? 세계를 휩쓴 신자유주의 물결은 현대사회에 신화적 상황을 연출했다. 도처에서 삶의 안정감은 무너지고, 인간은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불안감을 느끼며, 그 불안함에서 서로 무한경쟁을 하도록 강요받는다. 시청자는 서바이벌 게임의 참가자들에게서 생존경쟁의 상황에 처한 자신의 모습을 본다. 그리하여 탈락의 위협에서 ‘공포’를 느끼고, 탈락자의 현실에 ‘연민’을 느끼는 가운데, 대중은 자신의 신체가 살벌한 경쟁사회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배설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열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문화방송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은 좀 다르다. 무명들의 경쟁은 가능성의 지대에서 숨은 재능을 발굴하는 역할을 한다. 반면 현역들의 경우, 경쟁은 현실성의 지대에서 검증된 재능을 가짜로 폭로(?)하는 역할을 한다. ‘탈락’의 의미는 무명과 현역에게서 같을 수 없다. 무명의 탈락자는 결과에 ‘실망’할지언정 ‘상처’는 받지 않는다. 반면 현역의 탈락자는 그 결과에 치명적 타격과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다. 쟁쟁한 현역들의 경쟁은 서바이벌 게임의 긴장감을 극도로 높이나, 그에 따르는 결과 역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난감할 수밖에 없다.
원형극장에서 치명적 콜로세움으로‘나는 가수다’는 원형극장의 아티카 비극이 아니라, 콜로세움의 검투사 대결에 가깝다. 어제의 영웅이 쓰러졌다. 관객은 일제히 엄지손가락을 밑으로 향한 채 그를 죽이라고 외친다. 하지만 갑자기 그에게 연민을 느낀 황제(PD)는 대중의 아우성에도 엄지손가락을 위로 치켜세웠다. 그러자 대중(demos)은 분노했다. 민란이 일어나고, 황제는 퇴위하고, 그로써 콜로세움의 첫 희생자가 된다. 외려 그리스적인 것은 황제의 운명일 게다.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은 도덕적으로 탓할 수 없는 사소한 과실 때문에 몰락한다.
<hr><font color="#1153A4">현역 가수들의 서바이벌 게임 ‘나는 가수다’에 비친 진화론의 성선택설과 신자유주의식 경쟁 논리’</font>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바이오및뇌공학과
다윈의 진화론으로 인간의 문화와 예술 행위를 설명하려는 진화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인간이 노래를 부르는 이유는 이성을 유혹하기 위해서란다. 다윈의 진화론 가설은 크게 두 가지,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과 성선택(sexual selection)이다. 생존을 위해 자연에 좀더 잘 적응한 개체가 다음 세대에 살아남아 진화가 거듭됐다는 가설(자연선택)과 함께, 이성에게 매력적으로 보여 짝짓기에 성공하고 다음 세대에 유전자를 전하기에 유리한 행동을 선호하도록 유전적으로 코딩돼 있다는 가설(성선택)이다.
다시 말해, 다윈은 성적 에너지가 왕성한 데 비해 그것을 충분히 발산하고 표현하지 못해 ‘승화’시킨 것이 예술이라고 주장한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틀렸고, ‘인류가 살아 있는 한, 에로티시즘은 예술의 원천으로 존재한다’라며 섹스 에너지가 예술 창작의 원동력이라고 믿은 프랑스 작가 장 콕토는 옳다고 손을 들어준 셈이다.
유혹하기 위해 노래한다
왜 인간은 마약산업의 5배나 많은 돈을 매년 음악 파일을 내려 받고 콘서트 티켓을 구입하는 데 사용하는가? 왜 세상의 모든 가수와 연주자들은 배우자 선택이 코앞에 닥친 20~30대에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며 걸작을 남기는가? 왜 사람들은 결혼적령기의 가수와 연주자들에게 깊은 매력을 느끼는가? 진화심리학이 맞다면, 우리가 이토록 열정적으로 음악을 즐기는 이유는 성선택 가설로 설명할 수 있다. 그들이 성적으로 가장 왕성한 시기에 음악에 몰두하고 우리가 그토록 음악에 심취하는 이유는 그것이 ‘섹스로 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그들 스스로는 인지하지 못하더라도 우리의 유전자는 짝짓기에 유리한 행동을 선호하도록 유전적으로 코딩돼 있다는 의미다).
그런 맥락에서, 프로페셔널 가수들을 한 무대에서 노래로 경쟁시켜 꼴찌를 탈락시키는 문화방송 ‘나는 가수다’ 프로그램은 진화심리학자들에겐 피 튀기는 ‘서바이벌 버라이어티’가 아니라 ‘이성 유혹 버라이어티’, 자연선택을 위한 서바이벌 게임(survival game)이 아니라 성선택을 위한 메이팅 게임(mating game)이란 얘기다. 설령 일반인 평가단 500명 중에 40~50대 기혼자가 포함돼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진화심리학이라는 삭막한 관점에서 봤을 때, 아름답게 노래하는 가수가 아닌 메이팅 게임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래새로 전락한 김범수와 짝짓기 유혹에 실패한 꼴찌 정엽에겐 너무 죄송한 말씀. 게다가 성적으로 매력적인 정엽이 왜 꼴찌를 했는지는 진화심리학자들도 설명하기 난감할 게다!)
내공 깊은 고수들이 자신의 기량을 한껏 뽐내고 진 자는 살아남지 못하는 ‘진검승부’는 항상 매력적인 법. 지난 한 달간 우리가 ‘나는 가수다’에 열광한 것도 그 때문이다. ‘가수들이 이토록 열심히 노래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며 감동한 관객들은 아이돌 가수들의 ‘초콜릿 복근’으로는 충족되지 못한 성적 욕망을 그들에게서 찾았는지도 모르겠다. (다시 한번 노파심에서 말하지만, 듣는 이들은 짝짓기 목적을 의식적으로 염두에 두고 음악을 즐기는 건 아니다! 우리의 유전자가 찍짓기에 유리한 행동을 선호하도록 코딩해두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아무리 지난 3만 년 동안 우리의 유전자는 이런 ‘노래자랑 경연대회’에 열광하도록 진화해왔다고 믿더라도, 지난 한 달간 우리가 ‘나는 가수다’에 보인 관심과 반응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였다. 첫 경연에서 일반인 평가단 투표로 ‘꼴찌’ 판정을 받은 김건모에게 재도전의 기회를 준 제작진에게 호된 비난을 보내고, 이를 부추긴 이소라·김제동을 싸잡아 질책한 것도 그렇고, 그렇다고 ‘쌀집 아저씨’를 바로 경질한 문화방송 사장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경박함’도 그렇다.
탈락 위기 가수와 닮은 우리의 운명
도대체 우리는 왜 그랬을까? 아마도 사람들은 ‘나는 가수다’에서 우리의 모습을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세계화의 깃발이 펄럭이는 21세기 들어, 신자유주의 시장 한복판에 내몰린 우리의 운명은 ‘꼴찌가 되면 탈락하는 가수들의 운명’과 너무도 닮아 있다. 자유주의 사회에선 개인에게 자유가 주어졌지만,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자유는 우리의 몫이 아니라 시장의 것이다. 그 안에서 무한경쟁으로 살아남아야 하는 무시무시한 적자생존의 원리는 ‘서바이벌 게임과 메이팅 게임이 결합한 이종격투기’ 링 안으로 날마다 우리를 내몰고 있다. 만신창이가 된 우리, 내일의 운명조차 알 수 없는 우리, 그것이 바로 일요일 프라임 시간대에 얼굴을 내비치기 위해 진검승부를 강요받은 ‘아이돌 시대의 가수들’이 지닌 운명인 것이다.
과학자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영향지수가 높은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SCI) 논문을 얼마나 많이 썼는가’와 ‘큰 금액의 정부과제를 얼마나 많이 따왔는가’로 평가해, 하위 30%에게는 테뉴어(tenure·종신재직권)를 주지 않거나 일자리를 뺏는 살벌한 제도 안에서 과학자들은 날마다 진검승부를 강요받는다. 그리고 윗사람들은 유례없는 실적에 감동의 눈물을 훔치며 ‘세계 대학 랭킹’(혹은 세계 연구소 랭킹)이 자신의 성적표인 양 흐뭇해한다.
학생들이라고 다르겠는가? 과외와 학원으로 밤잠 설치며 공부해 입학한 대학에서 조금만 학점이 떨어져도 엄청난 액수의 등록금을 부담해야 하는 그들 또한 ‘제2의 김건모’ ‘제3의 정엽’이다.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프로페셔널 가수(예술가)들을 한 무대에 데려다놓고 무슨 경연이냐’라고 비판이 일 만도 한데, ‘다양성이 존중되어야 할 가수들의 노래를 어떻게 비교하고 평가하는가’라며 애초에 공정한 평가란 불가능했다고 비난할 만도 하다. 그러나 많은 시청자가 ‘나는 가수다’를 어색하지 않게 보는 이유는 ‘예술의 다양성’이나 ‘프로페셔널 예술가들의 개성’을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그들 또한 예외일 수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리라. (전공 분야가 다른 교수들을 평가해 하위 30%에게 테뉴어를 주지 않는 시스템과 무엇이 다른가?)
‘나는 가수다’는 그동안 자신을 가수라 생각했던 자들을 무대에 끌어올려, 냉정한 평가와 함께 ‘당신은 가수가 아니다’라고 낙인찍는다. 그들이 살 떨리는 경연에서 꼴찌를 하지 않으려 최선을 다하는 것도 바로 이 ‘낙인’이 두려워서일 게다. 그러나 더 잔인하게도, ‘나는 가수다’는 동시대의 모든 가요 프로그램이 ‘음악 프로그램’은 아니었으며, 아이돌은 실상 가수가 아님을 우리에게 주지시킨다. 이제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서 1위를 해 팡파르를 받는 것은 ‘인기인’임을 축하하는 자리일 뿐, ‘가수의 무대’는 아닌 것이다.
경쟁 무대를 염원하는 이들
많은 젊은 가수가 ‘나는 가수다’에 초대받기를 은근히 희망하듯, 많은 젊은이가 신자유주의적 무한경쟁의 무대에라도 오를 수 있는 기회를 갖기라도 했으면 하고 절박하게 바라고 있다. 꼴찌한 자들에게 ‘재도전’이 사치이듯, 그들에겐 ‘무대의 경쟁’ 또한 부럽기만 한 역전의 기회다. 많은 포스트닥(postdoc·박사후연구원)들이 테뉴어 경쟁이라도 뛰어들 수 있기를 고대하며 빈 교수 자리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처럼.
일요일 저녁 ‘나는 가수다’가 끝나고 피곤한 주말을 마무리한 뒤, 우리는 다시 월요일부터 ‘나는 과학자다’ ‘나는 대학생이다’ ‘나는 공무원이다’에 뛰어들어야 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날마다 ‘나는 인간이다’에서 탈락을 한다. 재도전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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