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은 줄다리기다. 감추려는 쪽의 힘이 크거나, 감추려는 쪽과 밝히려는 쪽의 힘이 팽팽하면 비밀은 비밀로 남는다. 그러나 밝히려는 쪽의 힘이 커지면 숨기려는 쪽은 앞으로 넘어지기 마련이고, 숨기려는 쪽이 줄을 놓아버리면 밝히려는 쪽은 맥없이 무너지게 된다. 비밀의 줄을 잡고 있는 손은 잠시라도 긴장을 놓을 수 없다. 숨기려는 쪽의 손은 더욱 그렇다. 그 비밀이 사랑일 경우, 줄다리기는 더 흥미진진해진다.
“내일이 기다려진다”
30대 직장인 김희진(가명)씨는 2년이 다 되도록 같은 회사의 동료와 열애 중이다. 같은 부서는 아니었지만 업무상 만나는 일이 잦아지면서 서로 감정을 키워간 둘은 연애를 시작했다. 처음 1년 동안 둘은 아무도 모르게 만남을 이어갔다. 회사 휴게실이나 계단에서 회사 사람들의 눈을 피해 ‘잠깐 데이트’를 즐겼다. 그러나 몇 달 전부터 둘의 관계를 의심하는 이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남자친구가 속한 부서의 소식을 김씨가 잘 알고 있다는 점과 회사에서 간혹 부딪히는 둘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주변 동료들은 둘에게 집요하게 물어보기 시작했고, 결국 몇몇 친한 동료들에게만 연애 사실을 털어놓았다. 결혼을 생각하고는 있지만 구체적인 결혼 계획은 아직 없는 시점에 서서히 소문이 퍼지자 둘은 고민에 빠졌다. 비밀이라서 더 짜릿했던 연애 감정은 이제 종종 불안감으로 엄습한다.
연애 사실을 밝힐 수 없는 대표적인 비밀 연애는 사내 연애다. 사내 연애는 회사마다 차고 넘치는 반면, 밝혀지는 경우는 드물다. 김희진씨는 “나도 사내 연애를 하고 있지만 주변에 내가 알고 있는 사내 연애만 세 커플이 넘는다”고 말한다. 끝내 밝혀지지 않은 채 이별을 맞은 커플까지 고려하면 생각보다 많은 수의 직장인들이 회사에서 연애 중이라는 얘기다. 이제 막 직장 생활을 시작한 20대 중·후반의 남녀부터 회사 생활이 슬슬 지루해지는 30대 초·중반의 남녀에게 사내 연애는 자연스럽고도 보편적인 연애 방식이다. 회사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직장인에게 옆자리나 옆 부서의 동료가 자연스럽게 이성으로 눈에 들어오는 건 어쩌면 당연한지 모른다.
드라마 에서 주인공 동진(감우성)은 이렇게 말했다. “내일이 기다려지지 않고, 1년 뒤가 지금과 다르리라는 기대가 없을 때 우리는 하루를 살아가는 게 아니라 하루를 견뎌낼 뿐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연애를 한다. 내일을 기다리게 하고, 미래를 꿈꾸며 가슴 설레게 하는 것. 연애란 어른들의 장래희망 같은 것.” 내일을 기다려지게 하는 것이 ‘어른들의 연애’인데, 내일을 기다려지게 하는 사람이 회사에 있는 사람이라면 하루하루가 얼마나 설레겠는가. 연애칼럼니스트인 ‘라이너스’ 김종오씨는 “아침 출근길 발걸음이 경쾌해지고 즐거워지기 마련”이라며 “원할 때 볼 수 있고, 회사에서의 고충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라고 말한다.
‘스릴 만점의 데이트’는 사내 연애를 하는 자만이 만끽할 수 있는 재미다. 아무도 모르게 오가는 눈빛과 미소, 서로의 책상에 몰래 밀어넣는 음료수나 과자, 메신저나 휴대전화로 오가는 둘만의 대화, 회사 구석구석에서 잠시 만나 살짝 손을 잡고 지나치는 긴장감 등이 그렇다. 사내 연애를 포함해 주변인들 몰래 비밀 연애를 하는 커플의 감정이 더 깊어지는 건 두 사람만의 언어가 있기 때문이다. 심리학에서는 “두 사람만이 통하는 언어나 표현, 신호 등은 둘 사이에서 자극적으로 작용해 애정이 깊어지는 계기가 되고, 심리적 거리를 단번에 줄일 수 있다”고 설명한다. 비밀 연애는 이토록 짜릿하다.
사내 연애를 밝힐 수 없는 이유
짜릿함이 전부라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비밀은 자발적 의지보다 주변 상황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내 연애 역시 마찬가지다. 회사라는 일터에서 개인감정이 오가기 때문에 그만큼 위험 요소가 많다. 사내 연애 경험이 있는 이들은 대부분 “주변 동료들과의 관계”를 비밀의 첫째 이유로 꼽는다.
회사에서 자신보다 나이는 많지만 직급은 낮은 남자 직원과 사귀는 한영선(가명)씨는 “남자친구가 부하 직원이다 보니 둘의 관계가 알려지면 주변인들이 불편해질 수밖에 없다”며 “내 눈치를 보느라 직원들이 남자친구에게 해야 할 말을 못하게 되는 경우가 생길 것 같다”고 설명한다. 한씨는 같은 사무실에서 남자 동기가 후배인 여직원과의 관계가 밝혀지면서 힘들어하는 모습을 이미 목격했다. 동료 커플에게 “축하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회사에 연애하러 오는 거야?” 식의 비아냥이나 둘의 사적인 부분에 관한 도가 넘은 질문이 오갔다. 회사 안에서 오가는 ‘뒷담화’식의 이야기도 사내 연애 커플에게는 쉽지 않은 장애물이다.
사내 연애는 남자 직원보다 여자 직원이 공개를 꺼린다.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을 경우 손해를 보는 건 여자 쪽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같은 회사를 다니던 동료와 회사를 그만두고 연애를 시작해 결혼한 이미진(가명)씨는 “같은 회사를 다녔던 상황이라면 절대 연애를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회사 상사들은 이미 여직원이라는 이유로 색안경을 끼고 보는데, 같은 회사 직원과 연애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나는 그들에게 직원도 여직원도 아닌 그냥 여자로 보일 것이 뻔하다”고 단언한다. “헤어지고 난 다음의 후폭풍이 두렵다”는 점도 사내 연애가 숨어들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 역시 여직원에게 좀더 가혹하다. 사내 연애를 하다가 헤어지면 둘의 관계도 어색해지지만, 그 연애가 ‘과거’가 되어 ‘미래’의 발목을 잡는다.
사내 연애에 관한 회사의 눈총은 예전보다는 줄었지만 여전히 존재한다. 지난해 12월 취업포털 ‘사람인’이 기업 인사 담당자 750여 명을 대상으로 사내 연애에 대한 생각을 조사한 결과 61%가 찬성한다고 대답했다. 찬성 이유로는 ‘직원들의 사생활 존중’ ‘직장 생활의 활력소’ ‘가족적인 분위기’ 등을 꼽았다. 반면에 반대하는 39%의 기업은 ‘사적인 문제가 업무에 이어진다’ ‘헤어진 뒤 이직률이 높다’ ‘업무에 집중하지 못한다’ ‘헤어지면 동료들까지 어색해진다’ 등을 이유로 들었다. 사내 연애에 반대하는 기업 중 15.4%는 사내 연애 커플에게 인사발령 등의 불이익을 주는 것으로 조사됐다.
비밀 연애 자체가 갈등 요소가 되기도비밀 연애는 사내 연애뿐 아니라 친구의 오빠나 여동생 등 지인의 가족과 연애를 하거나 모임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의 친구와 사랑에 빠지는 경우, 동호회 같은 모임에서 상대를 만나는 경우에 발생한다. 비밀 연애의 짜릿함이 지나고 나면 비밀 연애 자체가 연인 사이의 갈등 요소가 되기도 한다. 비밀의 무게 때문이다. 소설가 강지영씨는 “계속 주변인들에게 거짓말을 하게 되고, 데이트는 남들의 눈을 피해 바퀴벌레처럼 숨어들게 되면서 연애 자체가 밝아지기 힘들다”고 말한다.
연애 사실을 밝힐지 말지를 두고 의견이 엇갈리면 서로에 대한 사랑 자체가 위험해진다. 일하며 만나게 된 사람과 사랑에 빠진 회사원 박상혁(가명)씨는 공개 여부를 두고 여자친구의 거센 항의를 받았다. 여자친구에게 쏟아지는 뭇 남자들의 ‘러브콜’을 차단하기 위해 공개하고 싶었던 박씨와 사생활이 사람들의 입길에 오르내리는 게 싫었던 여자친구는 이로 인해 몇 차례 갈등을 겪어야 했다. 연애 사실을 공개하는 것은 때로 ‘사랑의 확인’이 되기도 한다. 힘들더라도 연애를 밝혀 많은 이들에게 인정을 받는다면 ‘그만큼 나를 사랑하는구나’라고 여기게 되지만, 거꾸로 공개를 꺼리면 ‘이 사람이 나를 숨기고 싶어하나’ 혹은 ‘다른 사람이 있나’ 의심하게 된다.
유부남·유부녀 등 기혼자들끼리, 혹은 기혼자와 미혼자가 연애를 할 때 비밀의 무게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무거워진다. ‘신정아 스캔들’이 터지고 8개월이 흐른 2008년 3월12일, 학력 위조 및 업무상 횡령 혐의로 서울 서부지법에서 열린 결심공판에서 신정아씨는 이렇게 토로했다. “사람은 누구나 한두 가지 비밀은 있다. 몇 개월 동안 나는 완전히 발가벗겨졌고, 속에 있는 창자까지 모두 다 까발려졌다.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 봄을 기다리는 초라한 여인이 돼 있다.”
신씨의 항변처럼 누구나 비밀은 있다. 신정아씨의 비밀은 하필 외국 명문대학의 박사학위 위조와 정부 고위 인사와의 관계라는, 선정적 제목이 가장 잘 어울리는 것들이었다. 그중에 언론이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었던 부분은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과의 사랑이었다. 30대 신정아와 50대 유부남 변양균의 비밀스러운 연애는 그들이 주고받았던 전자우편까지 모조리 세상에 공개되며 ‘까발려졌다’. 그리고 또 3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난 3월, 신씨는 사람들이 그토록 알고자 했던 자신의 비밀에 관한 책 (사월의책 펴냄)을 내놓았다.
이 책에는 변양균과의 비밀 연애가 자세히 적혀 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은 둘만의 비밀 연애가 순탄치만은 않았다. 신씨는 이렇게 적었다. “혹시라도 누가 알게 되면 자기는 끝장이라고 했다. 나는 그렇게 무섭고 두려우면 나쁜 짓을 안 하면 되지 왜 숨어서 나쁜 짓은 혼자 다 하면서 나만 이용해먹느냐고 큰소리를 냈다. 역시 힘든 사랑이었다.” 신씨가 학력 위조 의혹에 시달리다가 미국 뉴욕으로 떠났을 때에 관한 내용에도 밝혀져서는 안 되는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 들어 있다. “똥아저씨(변양균)는 뉴욕에 도착하면 변호사 선임부터 하고, 그다음에는 반드시 매일 글을 쓰라고 했다. 단 ‘우리 두 사람 이야기만 빼고’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세상은 이들의 관계를 ‘스캔들’이나 ‘불륜’이라고 했지만 신정아씨는 “우리는 정말 ‘사랑’이라는 말, 또는 ‘불륜’이라는 말 하나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관계였다”고 적었다. 불륜이라는 비밀 연애는 이처럼 무겁고 복잡하다.
영원한 비밀 혹은 신중한 공개
무겁든 가볍든 비밀 연애가 갈 길은 두 가지다. 연애의 결론이 이별 아니면 결혼(혹은 계속된 만남)인 것처럼, 비밀 연애 역시 이별로 영원히 비밀이 묻혀지거나 결혼 등으로 세상에 밝혀진다. 비밀 연애로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전문가들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면 자연스럽게 공개하라고 조언한다. 김종오씨는 “둘 사이의 친밀한 모습을 단계적으로 주위에 공개하면서 서서히 밝히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한다. 다만 사내 연애의 경우 공개에 신중해야 한다는 게 중론이다. 자칫하면 둘의 의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상황이 흘러갈 수도 있기 때문에 먼저 회사의 선례나 분위기를 참고하고, 되도록이면 결혼이 결정된 뒤 공개하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비밀 연애로 상처받은 사람이나 이제 막 한 차례 비바람 같은 비밀 연애를 끝낸 이들에게는 어떤 말을 건넬 수 있을까. 강지영씨는 이렇게 말한다. “비밀 연애는 그로 인해 아파도 누구에게 위로받기조차 어렵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비밀스럽게 시작한 연애를 끝냈다면 그것으로 인해 분명 깨닫고 배우고 성장하는 게 있을 거다. 비밀 연애는 수많은 연애 중 한 가지 방식일 뿐이다. 이런 연애 한 번쯤 해도 괜찮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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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일러스트레이션 이우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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