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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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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것은, 짧다면, 두 배로 좋다

21세기 문학을 주도하는 ‘짧은 소설’…

떠오르는 생각의 몸피를 보존하는 소설을 써보라
등록 2010-12-08 16:50 수정 2020-05-03 04:26

“깨어나보니 공룡은 아직도 거기에 있었다.”
과테말라 작가 아우쿠스토 몬테로소의 작품 ‘공룡’이다. 이게 다다. 시가 아니고 소설이다. 스페인어 일곱 단어로 된 이 글은 의심의 여지 없이 ‘픽션’으로 인정받았고, 쓰인 단어의 몇백 배 단어를 동원한 작품 해석이 이루어졌고, 수많은 패러디가 바쳐졌다. “공룡이 깨어났을 때, 신들은 아직도 저기 있었다. 서둘러 나머지 세상을 창조하면서.”(에두아르도 베르티의 ‘또 다른 공룡’) “작가가 생애에서 가장 짧은 단편을 쓰고 있었을 때, 죽음 역시 가장 짧은 작품을 쓰고 있었다. 이리 와.”(후안호 아바네스의 ‘결말’)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공룡은 저기 없었다.”(파블로 우르반이의 ‘공룡’) 패러디에 바치는 패러디도 있다. “내가 그의 작품을 표절했을 때 저작권은 아직도 그에게 있었다.”(하이메 무뇨스 바르가스의 ‘철면피’) 지금 이 상황에 빗대자면 이렇다. “깨어나보니 마감은 아직도 거기에 있었다.”

엽편소설, 담배짬소설, 서든픽션, 플래시픽션…
우리는 손바닥 장편(掌篇)소설, 엽편소설, 콩트라고 부르는 ‘짧은 소설’이 세계 소설 판도를 장악해가고 있다. 이 판도를 주도하는 라틴아메리카 문학은 ‘미니픽션’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됐다. 2000년 한국에 미니픽션을 소개한 송병선 교수(울산대 스페인중남미학과)는 미니픽션을 21세기 문학의 특징이라고 말한다. “축소 지향의 미니픽션은 ‘더 적게, 더 많이’를 외치는 21세기 문명정신과 조화되는 문학이다.”
‘짧은 소설’의 부흥을 이루면서 부르는 말도 백가쟁명이다. 서든픽션, 마이크로픽션, 마이크로스토리, 쇼트쇼트스토리, 엽서소설, 프로즈트리(Prosetry), 담배짬소설, 커피잔소설, 플래시픽션 등으로 불린다.
이 ‘짧은 소설’의 특징을 분량 외에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을 인용해 둘의 차이를 이렇게 말한다. “단편소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라고 묻는 것인데, 콩트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라고 묻는 것이다.” 에는 이런 말076도 있다. “단편소설은 마지막 소식인 반면 콩트는 최초의 이야기이다.”(La nouvelle est une derniere nouvelle, tandis que le conte est un premier conte)
에세이와 엽편의 중간인 를 펴낸 소설가 이기호는 비슷하게 이렇게 푼다. “탁, 사건들을 하나의 장면으로 만들고 해석은 독자의 몫으로 돌려야 한다. 단편이 파헤치는 것이라면 콩트는 발견하는 것, 타격을 주는 것이다. 탁! 그렇게만.”
시도 쓰고 소설도 쓰는 이장욱( 시인조선대 문학창작과)은 “짧은 소설은 떠올렸던 몸피 자체의 보존성이 높다. 풍요로운 육체성은 못 갖추지만 정곡을 찌른다”고 짧은 소설의 특징을 이야기한다.

예상치 못한 입말로 단숨에 결말 짓기
문학평론가 돌로레스 코흐는 미니픽션의 열 가지 특징을 이렇게 설명한다(코흐는 미니픽션·미니서사·미니단편을 엄밀하게 구분하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이 특징들은 미니서사의 것이다). 우리나라에 바로 적용되지는 않지만 영감을 주는 바가 있다. 널리 알려진 등장인물의 사용, 본문에 나타나지 않는 이야기 요소를 제목에 삽입(‘수요일 오후면 97세의 로돌포 몬돌포가 아직도 친구들을 만나는 동네의 오래된 카페에서 아침 9시에 먹는 반달빵의 맛’이라는 제목에 “좋다”라는 글도 이 수법에 해당한다), 외국어 제목 붙이기(고도의 간결성을 성취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비속어나 예상치 못한 입말로 단숨에 결말 짓기, 생략, 조탁된 언어-정갈한 언어-적확한 언어, 낯익은 요소에 뜻밖의 형식, 문학 외적인 형식, 낯익은 배경과 텍스트의 패러디, 문학적 상호텍스트성이다(이상 ‘latin21.com’에서 인용).
미니픽션이 21세기 문학을 주도하게 된 이유는 이 소설이 온라인을 중심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담배짬소설’이나 ‘플래시픽션’ 등은 모두 글을 모으는 온라인 창구가 있다(smokelong.com, www.flashfictiononline.com, www.vestalreview.net, www.365tomorrows.com). 짧은 글들에 수여하는 ‘마이크로 어워드’도 2007년부터 온라인에서 수상작을 발표했다(www.microaward.org).
한국에서도 이런 짧은 글은 온라인과 친화성이 높다. ‘낙농콩단’(conte0303.tistory.com)에 ‘콩트’를 쓰는 김영준씨는 “10~20장으로 씁니다. 온라인 글쓰기의 경우, 쓰는 이에게는 분량의 제한이 없지만 읽는 이들은 분량에 부담을 느낍니다. 조금만 길어져도 읽히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조절합니다.” 그가 사이트에 모은 10∼20장에 이르는 콩트는 233편에 이른다.
미니픽션 연구소(www.minifiction.com)는 2004년 10명의 회원을 시작으로 이제 일반인을 대상으로 미니픽션을 모집하고 그것을 책으로 발간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소설가 서진씨가 운영하는 ‘1pagestory’도 2004년부터 일반인을 대상으로 A4용지 한 면에 들어가는 원고지 10장 분량의 원고를 모집한다. 현재까지 730편의 글을 수집했다. 한 사람당 하나의 글만 등록되므로 에누리 없이 730명의 글이다(pagestory.egloos.com).
활발한 물밑 흐름과는 달리 한국 문학잡지나 소설집에서 짧은 소설을 만나기는 어렵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이를 잡지의 ‘청탁 시스템’에서 찾는다. 문학잡지에서 단편소설을 청탁하면서 원고지 70∼120장의 분량으로 못박는 것이다.
이장욱은 ‘정형화’된 한국 문학에 다양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보르헤스 같은 외국 작가들의 작품집을 들여다보면 들쭉날쭉하다. 한국 문학은 장편과 단편으로 이분화돼 있다. 단편소설은 원고지 80장 정도로 틀이 지워져 있다. 더 짧아져야 할 단편도 있고, 길게 써야 할 것도 있는데 풀어줄 필요가 있다.”
이장욱은 최근 황정은의 (문학동네·2009)와 김영하의 (문학동네·2010) 내의 짧은 소설을 예로 들면서 ‘다른 분량의 소설에 대한 욕구’를 말한다.

왜 짧은 소설은 원고지 80장이어야 하는가
황정은 소설집의 ‘초코맨의 사회’와 ‘G’는 20장 분량의 소설이다. ‘초코맨의 사회’는 패션지의 청탁으로, ‘G’는 인터넷 문학동인지의 청탁으로 쓴 글이다. 황정은은 “아, 이런 이야기는 10장, 30장, 50장 안팎으로 쓰면 딱 좋겠다 싶은 이야기가 떠오를 때가 더러 있어요. 이런 이야기들은 수첩에 간단히 메모해둬요. 나중에 써보려고. ‘초코맨의 사회’나 ‘G’를 쓸 때 그렇게 짤막하게 치고 빠지는 것이 굉장히 재미있었어요. 이런 작업도 본격적으로 해보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김영하의 짧은 소설 ‘바다 이야기’ ‘오늘의 커피’ 등은 청탁을 받지 않은 글이었다. 김영하는 “청탁을 받지 않았기에 길게 쓸 필요가 없어서 짧은 소설을 썼다”며 “어찌 보면 80장 이상의 단편만 존재하는 상황이 부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한다.
1996년에 나온 (최성각 지음, 세계사 펴냄)의 서문에서 문학평론가 우찬제는 벌써 이런 이야기를 한다. “단형 서사체의 전통과 서구나 일본의 단편의 영향이 어우러진 가운데 1920년대 이후 정착된 우리의 단편소설 전통이 근대문학사를 추동하는 핵심 동인이 되면서, 70∼80장 단편의 광휘에 20∼30장의 작은 이야기들이 밀리게 된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작은 이야기들이 문예지가 아닌 기업 사보를 중심으로 펼쳐지게 된 것도 작은 이야기 퇴조의 한 원인이었다. 잠시의 흥미를 위한 기발한 발상, 깜짝 놀랄 만한, 혹은 엉뚱한 반전 등이 요구됨에 따라 작가들도 언어미학이나 이야기의 세계관과는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세속의 풍향계를 좇는 경우가 흔했던 터이다. 그 결과 이야기가 되다 만 소품거리로 그저 한 번 읽고 잠시 웃다가 버리면 그만이라는 오해를 낳게 되었다. 그야말로 변두리 형식으로 전락한 것이다.”
‘짧은 소설’을 북돋우는 글귀도 같은 책의 맨 앞에 있다. 벨타사르 그라시안의 말이다. “좋은 것은, 짧다면, 두 배로 좋다.”
의 손바닥 문학상의 작은 손바닥 부문은 분량이 원고지 10∼20장인 문학작품을 찾는, 한국에서 보기 드문 ‘짧은 소설’ 공모다. “짧아서 두 배로 좋은 글”을 위하여 분투하시라.
*위의 글에는 픽션이 포함돼 있습니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성석제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 <재미나는 인생>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인간적이다>/오정희 <돼지꿈>/김소진 <바람 부는 쪽으로 가라>/<현대문학> 2010년 7월호 엽편소설 특집 ‘짝퉁’

성석제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 <재미나는 인생>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인간적이다>/오정희 <돼지꿈>/김소진 <바람 부는 쪽으로 가라>/<현대문학> 2010년 7월호 엽편소설 특집 ‘짝퉁’


추천! 짧은 소설 ①
번쩍하는 황홀한 한국 소설들

1. 성석제
우리나라의 짧은 소설을 이야기하려면 크게 성석제를 호명해야 한다. (개정판 도서출판 강 펴냄·1994)는 그가 시에서 소설로 건너오는 발판이 된 소설집이다. 형식도 소재도 길이도 다양한 이 소설집은 놀라움의 연속이고, 짧은 소설이지만 읽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물건에 대한 전설스러운 단상, 얼토당토않은 계략, 도저히 생길 수 없는 결사, ‘어처구니’없는 발명이 능청스럽게 전개된다. 가끔은 코끝이 알싸한 서정적인 글도 아무렇지 않게 포개져 있다. 그는 ‘책 한 권’을 쓰러 고시촌에 들어가면서 그 책이 어떤 것이냐는 물음에 “노신이 노신 자신의 짧은 글을 이름 붙인 바 잡감이 어울릴 듯도 한데, 어쨌든 흔히 말하는 소설도 아니고 우화도 아니고 콩트나 에세이도 아니”라고 말했다(원재길의 발문). 에세이와 콩트와 우화가 한꺼번에 녹아버린 그 여름은 도대체 어떤 여름이었단 말인가.
(개정판 도서출판 강·1997)은 좀더 꼴을 갖춘 이야기가 많다. 술자리에서 웃음소리의 데시벨을 측정한 듯 보이는 스토리도 많지만, 듣도 보도 못한 능청스러운 이야기도 여전하다. “한번 박은 진드기의 머리는 돌아나올 줄 모른다. 죽어도 안으로 파고들다가 죽는다. 나는 그 광경을 몰두라고 부르려 한다.”(‘몰두’) (문학동네 펴냄·2003)에는 좀더 사람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리고 긴 글이 많다. 원숙함이 묻어나는 아포리즘을 선보일 만한데 그는 여전히 대답보다는 질문을 준비하고 있다. 그의 짧은 소설에 대한 ‘몰두’는 (하늘연못·2009)에까지 이어진다.
2. 오정희
과작의 오정희가 여러 잡지에 발표한 소설들을 모아 오랜만에 펴낸 작품집(랜덤하우스코리아·2008). 길이는 엽편보다는 길고 단편보다는 짧은 편이다. 남자가 죽은 집에 들어온 수수께끼의 여자, 아이를 안기고 어디론가 사라진 새댁, 남자친구 무리에 끼어든 어린애 같던 여자 후배 등 단정한 이야기들에 놀랍도록 섬세한 결이 숨어 있다.
3. 김소진
1990년대 말은 ‘엽편소설’의 시대였다. 1996년 세계사는 최성각의 를 시작으로 전은강의 을 엽편소설선으로 내놓았다. 같은 해 하늘연못에서는 ‘젊은 작가 짧은 소설’ 시리즈를 선보였다. 박상우(), 윤대녕(), 구효서() 등이 쓴 시리즈가 나왔다. 14년 새 이 중 ‘품절’이 아닌 책이 없다. 다만 김소진의 짧은 소설 는 전집 발간에 힘입어 서점에서 구할 수 있다(개정판 문학동네 펴냄).
4. 2010년 7월호 엽편소설 특집 ‘짝퉁’
문학 월간지 은 7월호에서 ‘짝퉁’이란 주제로 19편의 ‘엽편소설’을 모았다. 시인도 소설가도 이 짧은 형식 앞에서는 패가 나뉘지 않는다. 이장욱은 기사를 옮기는 척하면서 사실 속에 허구를 집어넣는다. 남태평양의 작은 섬 알라프의 라무씨가 사망하면서 ‘알라피’라는 언어가 사라졌다. 이 언어는 모든 명사가 하나의 사물만을 지시하는 특색이 있다. 첫 번째 바위가 ‘페’, 그 옆 갈색바위가 ‘피’, 그 옆은 ‘핏’, 이런 식이다. 오늘의 태양은 ‘누누’, 어제의 태양은 ‘달루’, 그제 비 내린 날은 ‘시누’라고 부른다며 소설가는 하나의 언어 세계를 짧은 소설 내에서 생성해낸다. 시인 김경주는 침대를 사러 가 그 위에 누워본 이야기를 하고(‘침대’), 마광수는 평범한 샐러리맨의 비밀스러운 여정을 뒤쫓는다. 그는 한 달에 두어 번 여장을 하고 거리를 활보한다(‘남자로 태어난 슬픔’).



카프카의 <시골의사> / 체호프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 호시 신이치 ‘플라시보 시리즈’ / 레이먼드 카버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카프카의 <시골의사> / 체호프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 호시 신이치 ‘플라시보 시리즈’ / 레이먼드 카버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추천! 짧은 소설 ②
축소하거나 기묘하거나, 외국 소설들

5. 카프카의
카프카가 1919년에 펴낸 에는 여러 편의 짧은 소설이 모여 있다. ‘율법 앞에서’는 그의 유작 의 모티브가 되는 소설이다. 율법을 지키고 서서 들여보내주지 않는 문지기를 바라보며 한 남자는 늙어간다. ‘학술원에 보내는 보고서’는 인간이 된 원숭이가 그의 지난 과거를 되돌아보며 읊는 이야기다. 명쾌하지 않고 꿈처럼 흘러가는 스토리는 관료주의에 대한 비판과 사회의 억압에 대한 노동계급의 허망한 반항을 보여준다고 한다.
6. 체호프의
‘어느 관리의 죽음’은 제목에서 이미 결론이 드러난 소설이다. 오페라 상영 중 회계관리 이반 드리트리치 체르뱌코프는 재채기를 한 뒤 앞좌석의 통신부 장관이 투덜대는 것을 본다. 침 튄 것을 사과하러 가는데 장관은 무뚝뚝하기만 하다. 완전한 용서를 구하러 막간에 찾아가고, 다음날 장관의 접견실을 찾아가고, 그 다음날 또 찾아간다. 용서받지 못했다 생각한 그는 “기계적으로 집에 도착해 제복도 벗지 않고 소파에 누웠다. 그리고… 죽었다”. 단순한 사실을 열거하면서 기묘한 방향으로 이야기를 틀어가는 단편소설의 거장 체호프의 단편소설집은 여러 권 나와 있다. 그중 책 제목이 많이 들어 있는 단편집이 짧은 소설이 많은 책이다.
7. 호시 신이치 ‘플라시보 시리즈’
호시 신이치의 ‘플라시보 시리즈’는 한국에서 2008년까지 33권 출간됐다(지식여행 펴냄). 1997년 사망한 호시 신이치는 평생 1천 편이 넘는 공상과학(SF) 단편소설을 썼다. 꽤 긴 단편도 있지만 대부분 3~5쪽의 짧은 소설이다. 의 ‘이봐 나와!’는 어느 날 생긴 구멍에 관한 이야기다. 신사가 태풍에 떠내려간 뒤 생긴 구멍을 두고 마을 주민과 외부인 사이에 옥신각신이 벌어진다. 신사를 세워주는 대신 구멍을 받은 ‘구멍 메우기 회사’는 그곳에 뭐든지 집어넣는다. 묘한 반전이 있다. 1천 편이라, 이상한 일에 관한 온갖 스토리가 모인 우주이겠다. 그래서 SF의 SF다.
8. 레이먼드 카버
이 책을 딱히 ‘짧은 소설’로 넣을 수는 없다(문학동네 펴냄). 실린 단편 중 몇 개의 짧은 소설이 있다. 카버의 소설은 무슨 일이 딱히 일어나지 않고 갈등도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다. 가령 ‘미스터 커피와 수리공 양반’. 아내는 알코올중독자 모임에서 만난 수리공과 바람이 났다. 아내는 수리공 집에 가서 요리를 하고 청소를 한다. 독신주의 클럽 회원인 어머니 역시 바람이 났다. 남자는 어머니가 소파에서 남자와 키스하는 것을 목격한다. “이 모든 일은 그리 오래된 건 아니고 삼 년 전쯤 일이지만 당시에는 큰일이었다.” 심드렁하다. 사건이 일어났으되, 되도록이면 알려지지 않도록 ‘축소’하여 말한다. 호들갑스러워야 할 ‘소설’ 서술 방식과 완전히 반대다. 바람난 아내가 돌아온 날의 풍경도 심드렁하긴 마찬가지다. 그래서 글을 읽고 나면 사건이 남는 것이 아니라 그가 애써 숨기려던 것들이 가슴을 스산하게 비비고 간다. 그의 다른 소설집들에도 짧은 것과 조금 긴 것이 섞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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