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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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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 불가능, 재벌 3세는 알고 있다

서민성으로 위장하지 않는 새로운 재벌 자제분들의 안방극장 등장…

‘신데렐라 스토리’면 되던 ‘2세 드라마’에서 ‘판타지’가 필요한 ‘3세 드라마’ 시대로
등록 2010-11-24 11:18 수정 2020-05-03 04:26

“먼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나는 여자랑 호텔로 올라가는 걸 다른 사람들이 보면 안 되는 그런 사람이다.” 그 말을 듣고 쿡쿡거리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사람들. 그 반응에 김주원(현빈)은 자신이 “나중에 엘리베이터를 같이 탄 줄 알면 깜짝 놀랄 만한 사람”이라고 강변한다. 로엘백화점 사장님 김주원은 ‘잘난체계’의 왕님이다. 잘하는 것은 돈 버는 것, 보일 수 있는 특기는 지갑의 돈이며, 돈 쓰는 것이 취미라고 떠든다. “입만 벌렸다 하면 아이디어”라고 이 잘난 체에 ‘브레인’까지 포함시킨다. 하지만 그의 정체가 실제로 엘리베이터에 같이 탄 줄 알면 깜짝 놀랄 만한 사람인 ‘재벌 후계자’이듯 그의 잘난 체 역시 허언만은 아니다. 보아하니 일주일에 두 번밖에 회사에 안 나오지만 일을 대충 하진 않는다. 기획안으로 회장님의 오른팔인 박상무도 꼼짝 못하게 만든다. ‘슬렁슬렁 천재형’이다. (SBS, 토·일 밤 9시50분)의 김주원은 그 흔한 ‘재벌 2세’이되 지금까지 없던 유형이다. 출생의 비밀 대신 신경증을 가졌고, 후계자라며 회사에서 한자리 꿰차는 대신 그 자리에 걸맞은 ‘능력’이 있음을 보여준다.

‘정글의 법칙’을 재벌 2세라고 모르랴

새로운 ‘재벌 2세’는 그간의 허세를 버리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한다. 로엘백화 점 사장 김주원은 추리닝을 입고 거리를 활 보하고, 구용식은 오토바이를 타고 다닌다. 김민재는 집을 떠나 자전거 여행을 한다. 재벌 2세는 드라마의 어디든지 등장한다. <자이언트> <제빵왕 김탁구> <글로리아>는 장르는 다르지만 재벌 2세가 주인공이라 는 공통점이 있다.

새로운 ‘재벌 2세’는 그간의 허세를 버리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한다. 로엘백화 점 사장 김주원은 추리닝을 입고 거리를 활 보하고, 구용식은 오토바이를 타고 다닌다. 김민재는 집을 떠나 자전거 여행을 한다. 재벌 2세는 드라마의 어디든지 등장한다. <자이언트> <제빵왕 김탁구> <글로리아>는 장르는 다르지만 재벌 2세가 주인공이라 는 공통점이 있다.

의 구용식(박시후)은 김주원에 비해 ‘덤벙형’이다. 하지만 그의 안하무인과 젠체형 말발은 못지않다. “내가 재벌 2세이긴 하지만 오늘 좀 과소비했어” “이거 다 회사에서 못 사주겠다 해서 제 사비로 산 겁니다”라며 솔직하다. 첩의 자식이라는 구태의연한 설정에도 당당하다. 같이 잔 여자에게 “첩의 자식이라는 거 알지?”라고 말하고, 배다른 형이 어린 시절 자신을 못살게 군 것을 유려하게 비난한다.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접근한 뒤 ‘짜잔’ 하는 설정도 버렸고, 첩의 자식이라서 모난 어린 시절을 보낸 뒤 ‘꽁’해진 성격도 버렸다. 구용식의 현실성을 더하는 것은, 오랜만에 드라마에서 보는 ‘일하는 사람들’ 덕분이기도 하다. 그는 모든 일을 ‘전략가’인 비서에게 의지한다. 비서는 유학 시절 친구다. 이 친구 역시 “네가 돈이 없으면 같이 지내지 않을 것”이라며 냉정하다. 주인공 황태희(김남주)는 ‘을’이 돼본 적이 없는 남자에게 ‘당신이 하는 말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라’고 충고한다. 구용식은 황태희에게 수작을 거는 남자에게 “저처럼 힘깨나 쓰는 사람들이 우기면, 그게 법이 된다는 거. 제가 빽이 좀 든든해서, 우기려고 맘먹고 우기기 시작하면, 그쪽 분을 확 매장시킬 수도 있거든요!”라고 ‘바른말’을 한다. 잘생긴 배우가 “잘생겼다”는 칭찬에 손을 내젓는 것이 못 미더운 세상에, ‘정글의 법칙’을 재벌 2세라고 모를 리 없다. 그는 회사에서 ‘꼬픈남’(꼬시고 싶은 남자)으로 통한다.

금방 외국에서 도착한 ‘유럽형 재벌 2세’(공부한 곳은 미국)도 있다. (문화방송, 토·일 밤 9시50분)의 김민재(유승호)는 욕망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집안에서 건강하게 중심을 잡는 남자다. 젊을 때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해보려 혼자 자전거 여행을 떠나고, 외삼촌이 운영하는 영어학원에서 강사로 일하겠다고 한다. 길가의 강아지에게 함박웃음을 짓고, 내장탕 먹기를 연습한다. 스캔들 기사에 연연하지 않고 그 사람이 정말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판단한 뒤 순수하게 좋아한다. 자신을 향한 어머니의 집착에 “어머니 무서워요”라고 말할 줄 안다. ‘완소남’은 세상에서 가장 순박한 미소를 지녔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재벌 캐릭터’들이다. 이를 ‘재벌 2세 드라마’와 차별해, ‘재벌 3세 드라마’라 부를 수 있겠다.

전형적인 ‘재벌 2세’는 모호했다. 이미지였다. 재벌 2세 드라마는 기업 드라마가 아니게 된 때부터 ‘신데렐라 스토리’다. 부엌데기를 끄집어내는 먼 나라의 왕자님은 그 자체로 빛나기에 구체적일 필요가 없었다. 그 기업이 중화학공업 회사든, 제조업이든, 서비스업이든 중요하지 않다. 그 남자가 상무든 이사든 최고경영자(CEO)든 중요하지 않다. 그들의 비슷비슷함은 ‘재벌 2세’라는 단어로 족한 경우가 많았다.

거의 모든 로맨틱 코미디는 남장여자든, 여성 재벌 2세든 ‘재벌 2세’ 스토리다. 클리셰로 익숙해져서, 역사물로도 변형 가능하다. (2010)는 숙종(지진희)이라는 왕으로 둔갑한 재벌 2세 스토리며, (2010)은 현대판 ‘꽃보다 남자’다. 가족극에도 ‘재벌 2세’가 스며든다. (한국방송, 토·일 저녁 7시55분)에서는 생수를 배달하고 택시기사를 하는 남자(한상진)가 재벌 2세로 밝혀진다.

서민성 대신 ‘노블레스 오블리주’
방영 중인 드라마 재벌 가계도(위) / 재벌 등장 드라마 세대별·유형별 특징(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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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영 중인 드라마 재벌 가계도(위) / 재벌 등장 드라마 세대별·유형별 특징(아래).
(※클릭하시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재벌 2세 드라마’ 진화의 마지막은 ‘스펙터클’이었다. 어떻게 더 럭셔리하게 묘사하느냐가 관건이었다. 기둥이 늘어선 빌딩 앞으로 검정 외제차가 들어선다. 고개를 숙인 운전사가 차를 돌아 뒷좌석 문을 열면 미끈한 슈트를 바로 하며 남자가 내린다. 그를 아래에서 잡은 화면 위로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빌딩이 높이 솟아 있다. 회전문을 열고 들어서면 도열한 직원들이 고개를 숙인 채 그를 기다리고 있다. 현관 로비는 넓고 높고 두 줄로 선 직원은 소실점을 향해 뻗어 있다. 이 스펙터클은 더 세지고 더 강해지는 대한민국 재벌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

재벌가 스토리는 ‘3대를 가도 망하지 않는 부’를 습득하면서 ‘부의 완성’에 도달했다. 그리하여 ‘재벌 3세 스토리’가 등장한다. 김주원과 김민재는 명실상부한 ‘재벌 3세’이기도 하다. 김주원의 외가 쪽 할아버지가 로엘그룹의 수장이며, 김민재의 할아버지는 대서양그룹 창업주다. 3세에게 부는 필수적이지만 다가 아니다.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하는 똑똑함과 편력 없는 유연함, 곤경에 처할 일 없는 자신감에서 나오는 순수함을 지녔다.

‘재벌 2세’와 구별되는 ‘재벌 3세 드라마’의 특징은 ‘서민의 건강함’이라는 핑계를 대지 않는다는 점이다. ‘재벌 2세 드라마’의 핵심은 ‘서민성’이었다. 왜 재벌 2세들은 ‘정략결혼’을 내팽개치고 부엌데기에게 무릎을 꿇는가. 사랑의 이유는 “나와 다르기 때문에”라는 것 외에는 별로 찾을 길이 없었다. 그것이 다른 유전자 풀의 인간을 선호하는 ‘짝짓기의 과학’은 아닐 것이다.

‘재벌 2세 드라마’는 재벌의 부도덕성의 반대편에 서민 생활의 건강함을 대비시킨다. 재벌 2세는 항상 서민의 가정을 방문해, 추리닝을 입고 집 안을 구경하며 온 가족이 모여 아침 식사를 하는 장면을 곁들인다.

(2010) 등 ‘출생의 비밀’을 품은 재벌 드라마에서도 서민성은 중요했다. 유전자의 우월함을 입증해야 하는 이 전쟁에서 평범하게 자라며 획득한 ‘서민성’은 승리의 비결이다. 의 재벌 2세 역시 ‘왕자의 난’을 벌이고 있는데, 이 드라마에서도 지역 주민의 말에 귀기울이고 그들의 요구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권력다툼에서 중요한 요건이다. ‘서민성’은 창업주 김태진(이순재) 회장이 어릴 적 친구의 약속을 지켜 결혼을 성사시킬 때 작동한 논리이기도 하다. 행복이 물질적 부 너머에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 그것이 ‘드라마의 윤리’였다.

이제 ‘재벌 3세’에게 필요한 것은 서민성이 아니라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김주원은 길라임(하지원)을 병원에 데려다주고 “사회 지도층의 윤리란 이런 거다”라고 말한다. “나 공부 못한다고 사람 무시하고 그런 사람 아니야”라는 대사도 등장한다. 구용식은 현역으로 군대도 다녀왔다. “재벌 2세가 무슨 군대냐”며 보통 사병처럼 엄청 굴렀다. 이 재벌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던 것이다.

그의 죄는 돈이 많다는 것뿐?

‘재벌 3세 드라마’에서 평민들은 대립한다. 에서 재벌가 아드님과 ‘오합지졸’이 한 팀을 이룬다. 그 반대편에는 ‘성공 지향 인물’ 한송이(하유미) 상무가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25살에 회사에 들어와 20년 동안 열심히 일해서 이 자리에 왔어. 친구·식구·결혼 다 잊고 살았는데, 구용식은 뭐야? 회장님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가뿐히 그 자리에 올랐잖아. 불공평한 일 아니야?” “정정당당하게 싸워서 이길 수 있어? 구용식인데. 노력 안 하고도 그 자리에 올라가잖아.” 한송이 상무의 말은 배경은 버리고 빈손으로 링 위로 올라와 정정당당하게 싸우자고 말하는 것 같다. 아마 정정당당한 싸움에서도 한 상무는 패할 것이다. 한 상무는 비열한 계략을 펼치며 오합지졸로 이루어진 사람들의 앞길을 방해한다.

서민이 성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성공을 향한 한 계단 한 계단은 비열한 술수와 상처로 얼룩져 있다. 음모와 술수는 재벌 1세대(창업주)에서 벌어지는 일(SBS )로, 세월이 흘러 서민의 몫이 된다. 재벌 3세는 유연하게 서민의 공격을 피한다. 그는 하얀 얼굴과 순진한 표정으로 나선다. 나의 죄는 돈이 많다는 것뿐이지 않냐며. 이 드라마의 제목이 임을 잊지 말자. 재벌2세를 ‘역전’팀에 포함시킨 것으로 보아, ‘계급 역전’이 불가능한 시대라는 것을 드라마는 알고 있다.

의 김주원은 길라임의 집을 보면서 이런 집에서 사람도 사느냐고 한다. “월세에 사는 사람을 아느냐”고 친구에게 물어보기도 한다. “집에 연못 없는 사람은 조금 불행한 거예요. 아파트 한 채 팔아서 집에 연못 만드세요. 아 왜 그러세요? 아파트 팔아도 아직 3~4채 정도는 남잖아요? 왜 그런 표정이세요? 친구 집에 수영장 있다면 겨울에는 따뜻한 물이냐고 묻는 사람들처럼”이라고 말하는 의 ‘행복 전도사’를 연상시킨다. 김주원은 자신이 사랑하게 된 길라임과 몸 바꾸기를 한 뒤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는 설정이다. ‘신데렐라 스토리’면 되던 때로부터, ‘뼛속부터 발끝까지 바뀌는 판타지’가 필요한 시대로 진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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