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작문이 열리면서 궁을 지키는 무사 8명이 문지방을 넘는다. 궁의 남문, 우리로 치자면 경복궁의 들머리인 광화문쯤 되는 곳이다. 열리는 문 너머로 일본 특유의 짙푸른 산세와 하늘이 그대로 드러난다. 뜨거운 한여름이지만 고층 건물의 방해를 받지 않으면서 확보된 시선이 시원한 느낌을 준다. 일본 나라현 여행은 바로 헤이조큐(平城宮)의 스자쿠몬(朱雀門)에서 시작된다.
지난 8월6일 1300년 전 일본에서 본격적인 중앙집권국가를 건설한 헤이조 시대의 헤이조큐 복원 현장을 찾았다. 이곳을 그들은 ‘본격’수도라고 부른다. 1300주년이 되는 올해까지 헤이조큐 발굴에 걸린 시간은 40년이다. 그 가운데 주작문과 천황의 집무실인 대극전을 건설하기까지는 20년이 걸렸다. 3년 만에 뚝딱 복원된 광화문과 비교하면 완성을 향한 이들의 집착 같은 끈기를 느낄 수 있다.
<font color="#00847C">백제와 신라 언급 없는 건 아쉬워</font>주작문을 넘어서면 가로·세로 1km의 궁터가 한눈에 들어온다. 한가운데로 긴테쓰선이라는 철도가 떡하니 놓여 있다. 헤이조 천도 1300년 기념사업협회의 우도 기요하루(52)는 “철로가 놓일 당시에 이곳은 논과 밭뿐이었다. 나라 시민을 위해 철도는 꼭 필요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다만 지금은 철로를 우회시키는 방법을 고려 중이라고 한다. 물론 서둘지 않는다. “주변의 복원 작업이 현재도 진행되고 있어서”라고 한다. “1300년을 기다렸는데 10년을 더 못 기다리겠느냐. 정확하게 천천히 해야 한다”는 그의 깍듯하면서도 반듯한 말투에서 자부심이 묻어난다.
궁을 중심으로 한 옛 도시 복원이라는 점에서 일본 극우사관과의 연관성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곳에서 만나는 복원 작업은 그보다는 옛 역사의 로망을 되살리는 것에 가깝다. 자국 문화의 우수성 이전에 당시 당나라 등 선진 문물을 수입하기 위한 노력을 강조하기도 한다. 헤이조큐 복원 현장 한켠에 견당사라는 당나라 방문단의 역사를 복원해놓은 것 또한 그런 의도다. 하지만 백제나 통일신라 등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거대 규모의 궁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긴테쓰선 건널목을 지키는 20대에서 60대까지의 교통통제원들이다. “요이~! 호이~!” 인상적인 일본 사찰의 독경 같은 수신호로 사람들을 통제한다. 열 걸음이 채 되지 않는 건널목을 지키는 인원이 무려 8명. 한여름 땡볕에 모두 도열해 있다. 우도 기요하루는 당연한 광경이라는 듯 “안전을 위해서”라는 말을 반복했다. 효율을 강조하는 쪽에서는 “쓸데없이 사람을 많이 둔다”라고도 말할 수 있지만 느리게 진행되는 그들의 복원 작업과 함께 공존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광경이다.
<font color="#C21A8D">한국어 표지판 ‘사슴 돌진 주의’</font>궁 복원 현장 뒤로 이어지는 것은 일종의 사찰 순례다. 일본 전체의 불교를 관할하는 사찰이었다는 도다이지(東大寺)부터 담징의 금당벽화가 있는 호류지(法隆寺)까지 차로는 5분 거리, 걸어서는 30분 내에 도달할 수 있는 사찰들이다. 거대한 불상과 오래된 목조건축이 인상적이지만, 그것은 우리나라에서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으니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을 찾겠다면 목조좌상과 담징의 금당벽화가 단연 으뜸이다. 고후쿠지(興福寺) 국보관 등에서 만날 수 있는 목조좌상들은 일본 역사에 등장하는 유명 승려들을 형상화한 것으로 12세기 전후에 만들어졌다. 목재 조각의 섬세함이 살아 있는 일본 국보다. 재미있는 것은 인자함이나 여유로운 표정이 없다는 것이다. 승려 개인의 인생까지 담아놓은 듯한 표정은 “솔직히 말해서 수행은 쉽지 않아”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 고통스러운 표정은 오히려 익살스럽기도 하다. 그 생생함에 관람객은 발을 떼지 못하고 한참을 머물렀다.
사찰 탐방의 하이라이트였던 담징의 금당벽화도 인상적이다. 역사책에서만 보던, 고구려 승려 담징이 그렸다는 금당벽화. 물론 호류지 금당이 아닌 박물관에서 만난 것은 아쉬웠지만.
일본 최초의 사찰 아스카지(飛鳥寺)는 다른 절과 달리 소박하다. 호랑이부터 ‘공부의 신’까지 각종 숭배물이 등장하는 일본 사찰의 요란함을 진정시키는 것은 절의 소박함이다.
나라의 사찰을 돌면서 공통적으로 만날 수 있는 것이 있다. 하나는 사슴이고, 나머지는 쇼토쿠 태자다. 나라에서 사슴은 3천 마리가 방목되고 있다. 모두 시내를 활보한다. 주의할 점은 그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매료돼 먹을 것을 건네주면 순식간에 사슴 떼가 몰려든다는 것이다. 나라현에 아주 드문 한국어 안내판 가운데 ‘사슴 돌진 주의’가 있는 걸 보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물론 위협적인 수준은 아니다. 옷자락을 물거나 엉덩이를 살짝 들이받으면서 놀라게 한다. 몰려든 사슴들 사이로 ‘두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우물 같은 눈망울로 똥을 누는 사슴도 볼 수 있다. 저 많은 사슴의 배설물을 어떻게 처리할지 궁금해 가만히 살펴보면, 있는 듯 없는 듯 길가에 앉아 있던 청소부가 소리 없이 다가와 쓱쓱 똥을 담아간다. “나라 사슴은 원래 똥을 싸지 않아요”라고 말할 듯 담담한 표정이다.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차가 서행할 정도로 거리의 사슴은 존중받는다. 예로부터 사슴은 일본에서 신을 맞이하는 매개로 여겨왔다. 이번 헤이조 천도 1300주년 행사의 마스코트인 ‘덴도쿤’의 머리에도 사슴뿔이 달려 있다. 물론 길거리 음식에 기웃거리는 사슴은 가차 없이 쫓겨난다.
사슴 못지않게 자주 만날 수 있는 것은 ‘쇼토쿠 태자’라는 이름이다. 쇼토쿠 태자는 일본에서 국가의 기틀을 잡은 상징적인 인물이다. “태어나자마자 말을 했으며, 두 살 때 천자문을 뗐습니다. 벌어지는 전쟁마다 죄다 승리를 거뒀어요. 게다가 얼마나 효자인지 열일곱 살 때는 부모를 위해 등불을 들고 거리를 돌며 공양을 드렸답니다.” 들어보면 황당한 전설이지만 거부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어차피 백제나 신라도 개구리를 타고 강을 건너는 유의 영웅신화는 다 있지 않은가.
<font color="#008ABD">규모와 속도의 영향을 비켜간 마을, 나라마치</font>사찰 순례가 주목적이 아니라 한국인 관광객의 손을 타지 않은 일본 그 자체를 보고 싶다면 ‘나라마치’라는 전통 마을 방문은 필수다. 전통 마을이라고 해도 우리로 말하면 서울 종로구의 북촌 한옥마을 정도다. 사찰에서 걸어갈 수 있을 정도의 시내에 자리잡고 있다. 안드로이드 로봇이 떡방아를 찧는 인위적인 풍경 대신 자전거를 타는 할머니가 “비켜!”라고 소리치는 생생함을 만날 수 있다. 세계적 건축가인 안도 다다오가 영감을 받았다는, 중정(중간 정원)을 가진 일본의 전통 가옥에 직접 방문할 수도 있다. 중정 한쪽에서 건너편 안방을 바라보면 공간을 미시적으로 분할해 미를 덧입힌 그들의 지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중정에 앉아 언제부턴가 규모와 속도에 집착하는 우리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다면 덤으로 얻는 수확이다.
나라(일본)=글·사진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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