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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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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기고도 부드럽게, 국수의 힘은 세다


국수문화 가장 발달한 경상도의 시원한 누름국수·건진국수,
냉면 사촌 밀면, 얼큰한 모리국수, 달큼한 메밀소바
등록 2010-06-10 23:33 수정 2020-05-03 04:26
경남 진주 진주냉면집에서 면을 삶아 건지는 모습.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경남 진주 진주냉면집에서 면을 삶아 건지는 모습.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경상도는 남한에서 국수문화가 가장 발달한 곳이다. 한국전쟁 뒤 미군의 원조물자로 밀가루가 대량 공급되면서 지역별로 다양한 국수가 만들어졌다. 해안지방에서는 생선을 넣은 국수를, 내륙지방에서는 채소를 넣은 국수를 해먹었다. 경북 안동 풍천면 저우리 마을 반장인 박재숙(66) 할머니는 “경상도에서는 여름이면 밥 대용으로 국수를 말아먹었다”고 했다.

쫄깃하고 고소한 안동국시의 참맛

안동 사람들은 낙동강에서 잡은 은어로 육수를 낸 ‘건진국수’와 ‘누름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예전엔 낙동강에서 은어가 많이 잡혔대요. 은어는 석빙고에 저장했다가 임금님께 진상도 했고요. 그런데 지금은 댐이 생겨 자연산 은어 구경하기가 힘들다고 하네요.” 저우리 주민 김정희씨 얘기다. 어릴 때부터 먹어온 건진국수와 누름국수를 만들어주겠다며 나선 박 할머니도 은어로 낸 육수는 맛보지 못했다고 했다. 은어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워지면서 대신 닭이나 멸치로 육수를 만든다.

건진국수(왼쪽), 누름국수(오른쪽).

건진국수(왼쪽), 누름국수(오른쪽).

건진국수와 누름국수는 면과 육수, 고명이 모두 같다. 다만 면발의 굵기, 면을 삶는 법, 육수 온도 등이 다르다. 안동에서는 콩가루와 밀가루를 섞어 면을 만든다. 콩가루가 들어가면 면이 더 구수해진다.

“손국수는 얇아야 맛있지.” 박 할머니는 반죽을 소나무 밀판에 올려 30분이 넘게 박달나무 홍두깨로 밀었다. 밀가루를 고슬고슬 뿌려가며 밀어낸 반죽이 종잇장처럼 얇아지자 칼질이 시작됐다. 차갑게 먹는 건진국수용은 얇게, 따뜻하게 먹는 누름국수용은 굵게 썰어낸다. 건진국수는 면을 삶을 때 봄배추를 같이 넣는다. 봄배추, 호박, 콩나물 같은 채소를 같이 삶는 게 안동 지역의 특징이다. 찬물에 헹궈낸 면을 그릇에 담고 미리 차갑게 얼려둔 멸치 육수를 붓는다. 고명으로 깨소금, 달걀지단, 잘게 다져 볶은 쇠고기, 김가루를 올리면 완성이다. 누름국수는 멸치 육수에 면과 봄배추를 넣고 같이 끓인다. 멸치 육수에 채소의 시원함이 더해진다. 한소끔 끓여 면이 익으면 건진국수와 똑같이 고명을 올린다.

건진국수와 누름국수는 재료가 같아 온도 차만 있고 맛이 똑같을 것 같지만, 먹어보면 맛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시원한 건진국수는 멸치 국물이 밍밍한 듯하면서 깔끔하다면, 면과 채소를 넣어 함께 끓인 누름국수 국물은 담백하면서 단맛이 난다. 두 국수 모두 콩가루가 들어간 면이 쫄깃하고 고소하다. 고유명사가 된 ‘안동국시’의 참맛은 안동에서 국수를 먹어보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진주냉면

진주냉면

교방문화가 꽃폈던 경남 진주에는 ‘진주냉면’이 있다. 당시 한양에서 내려온 한량들이 유곽의 기생들과 어울려 입가심으로 먹었던 대표적인 음식이다. 조선의 2대 냉면으로 평양냉면과 함께 꼽힐 만큼 유명하다.

진주냉면은 고기 육수를 사용하는 평양냉면과 달리 멸치·홍합·문어·바지락 따위 해산물을 끓인 물과 조선간장으로 육수를 만든다. 간이 짭짜름해 식초나 겨자가 필요 없다. 국물 끝맛에선 가쓰오부시 향이 난다. 면은 고구마 전분을 사용해 평양냉면보다 쫄깃하다. 고명으로는 채 썬 육전을 쓴다. 육전은 쇠고기 양지머리와 등심에 달걀물을 입혀 부쳐낸 것이다. 면과 함께 씹으면 고소한 감칠맛이 난다. 애초 교방청(일종의 기생학교)에서 시작된 별식답게 예전에는 전복, 석이버섯 따위의 비싸고 귀한 재료가 고명으로 올랐다. 그러다 냉면이 서민 음식이 되면서 고명도 소박해졌다.

60여 년 전 진주의 나무전거리(지금의 중앙시장)에서 냉면 장사를 시작했던 황덕이(81) 할머니의 진주냉면집이 원조집으로 통한다. 1966년 중앙시장에 화재가 나면서 지금의 서부시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3대째 운영 중인 진주냉면집은 사천·부산 등 6곳에 분점이 있다. 서부시장 본점은 황 할머니의 막내사위 정운서씨가 맡아 20여 년 전부터 운영하고 있다.

남으로 내려온 냉면, 진화 혹은 변화

진주냉면의 내력이 알려지면서 인기를 얻게 된 것은 최근 일이다. 정씨는 “10여 년 전만 해도 우리 집이 진주냉면의 맥을 잇고 있는지 몰랐다”고 말했다. “장인어른이 하던 대로 했는데, 대학교수나 음식연구가들이 와서 ‘이게 진주냉면’이라고 하면서 널리 알려졌다”고 했다.

진주냉면은 허영만 화백의 에 소개되면서 더 유명해졌다. 만화에는 경상도 바닷가에서 구전으로 내려온 생선 비린내 없애는 방법이 그려져 있다. 뜨겁게 달군 무쇠를 끓는 멸치장국에 넣어 순간적으로 온도를 올려 비린내를 없애는 것인데, 정씨가 가게를 맡은 뒤부터는 쓰지 않는 방법이다. 지금은 항아리로 비린내를 잡는다. 육수를 항아리에 담았다가 보름이 지난 뒤 사용하면 잡내가 나지 않는다.

부산밀면

부산밀면

이북 음식인 냉면은 남하할수록 옛 맛 대신 새 맛을 찾아냈다. 부산에는 냉면의 사촌인 밀면이 있다. ‘부산밀면’도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난 온 이북 사람들이 만든 음식이다. 메밀가루 대신 보급품으로 흔해진 밀가루에 고구마 전분을 섞어 면을 만들었다. ‘밀냉면’ ‘부산냉면’으로 불리다 ‘부산밀면’으로 이름이 굳어졌다.

밀면의 원조 격으로 꼽히는 집이 부산 우암동의 내호냉면이다. 함경도에서 냉면 장사를 하던 고 정한금 할머니가 부산으로 피난 와 문을 연 냉면집이다. 3대 사장인 이춘복(62·여)씨까지 벌써 57년째 그 자리에서 장사를 하고 있다. 지금은 이씨의 딸 유미옥(42)씨가 대를 이어 맛을 배우고 있다. 유씨는 “가게 문을 처음 열 때부터 밀면을 판 건 아니다”라고 했다. 밀가루가 흔해지면서 밀면을 만들어 판 게 1959년이라고 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만들어 팔던 음식이라고 했다.

얼음 동동 띄운 차가운 밀면은 쇠고기 육수로 맛을 낸다. 밀가루와 고구마 전분을 섞어 만든 면은 메밀면보다 하얗고 쫄깃하다. 함흥냉면처럼 질기지 않지만 이로 끊어 먹을 정도론 질기다. 고명으로는 돼지고기 편육, 오이, 양념 무, 삶은 달걀, 다진 양념 등이 올라간다. 젓가락으로 사리를 살살 풀어 다진 양념까지 섞는 동안 매운 향이 올라와 입에 침이 고인다. 육수는 시거나 쏘는 맛이 없어 밍밍하다. 똑같은 육수를 써도 돼지고기 편육이 올라가는 밀면은 4천원, 쇠고기 편육이 올라가는 냉면은 6천원이다. 전쟁 뒤 시장통에서 먹던 피난민의 음식답게 맛도 가격도 소박하다.

모리국수

모리국수

경북 포항 구룡포항 앞에도 어부들이 먹던 소박한 국수가 있다. ‘모리국수’다. 커다란 양은냄비에 갓 잡은 생선과 콩나물, 고춧가루 양념을 넣고 푸짐하게 끓여낸 모리국수는 어민들의 뱃속을 채워주는 별미였다. 얼큰하고 시원해 해장용으로도 많이 찾았다.

42년 동안 구룡포 읍내에서 까꾸네 모리식당을 운영하는 이옥순(67) 할머니는 모리국수가 처음엔 이름도 없던 음식이라고 말한다. “어부들이 어판장에서 팔고 남은 생선을 판잣집으로 가져와 국수 넣고 끓여달라고 해서 만들어준 게 모리국수의 시작”이라고 했다. 싱싱한 생선을 ‘모디’(모아의 사투리) 넣고 여러 사람이 ‘모디가 먹는다’고 해서 ‘모디국수’가 됐다는 설도 있고, 양이 푸짐하다는 뜻에서 일본어로 많다는 뜻의 ‘모디’가 붙었다는 설도 있다.

모리국수는 구룡포에서 잘 잡히는 대게와 다시마로 육수를 낸다. 옛날엔 명태·대구·삼식이·낙지 등 다양한 해산물을 넣고 끓였는데, 지금은 예전처럼 많이 넣지 못한다. 어종이 고갈되고 값이 비싸져서다. 그래도 아귀, 물메기, 미더덕, 대게 등은 빠지지 않고 들어간다. 면은 공장에서 주문해 싱겁게 만든 풍국면을 넣어 삶는다. 고춧가루 양념을 진하게 풀어낸 국물은 시원하고 얼큰해 먹는 내내 땀이 난다. 아삭하게 씹히는 콩나물도 국수와 잘 어울린다. 민물 생선을 죽처럼 담백하게 끓인 충북 옥천 생선국수와는 또 다른 맛이다. 아귀와 물메기 등 살이 통통한 생선을 그대로 먹으니 국수를 먹는 건지 매운탕을 먹는 건지 헷갈릴 정도다. 이 할머니는 “모리국수 때문에 포항 식당에선 매운탕을 먹고 나면 국수를 넣어 끓여주는 음식문화가 생겼다”고 말했다.

 

장조림 국물과 멸치 육수의 황금비율
메밀소바

메밀소바

경남 의령의 ‘메밀소바’는 이름처럼 일본의 식문화에서 영향을 받은 음식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건너갔던 사람들이 해방 뒤 고향으로 돌아올 무렵, 의령군 부림면 신반마을의 한 할머니가 일본에서 메밀소바를 배워와 이웃 사람들에게 대접했던 음식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좋아해 장터 골목에서 장사를 시작하면서 의령의 대표 국수로 자리매김했다. 쓰유(장국물)에 적셔 먹는 일본식 메밀소바와 달리 의령 메밀소바는 따뜻한 국물에 말아 먹는다. 온소바의 육수는 멸치 국물이다. 여기에 장조림 국물을 섞어 맛을 낸다. 이 장조림을 제대로 만들어야 육수 맛이 난다. 친정어머니와 함께 40년 넘게 메밀소바를 만들어온 제일식당 박시춘(55) 사장은 “쇠고기에서 기름기가 가장 없는 엉덩이살로 장조림을 한 뒤 여과지로 기름기를 걷어낸다”고 했다. 그렇게 만든 장조림 국물은 간장처럼 색이 진하고 기름이 전혀 뜨지 않는다. 중멸치로 우려낸 육수에 장조림 간장 육수를 넣으면 맛이 고소하고 달곰하다. 고명으론 참기름으로 양념한 시금치를 올린다. 면과 같이 먹으면 아삭해서 식감이 좋다. 비빔 메밀소바도 맵지 않은 달큼한 맛이 난다. 고명으로 올린 장조림 고기와 잘 어울린다. 박씨는 “사계절 먹는 음식이라 요즘은 외지 사람들이 더 찾는 음식이 됐다”고 말했다. 주말이면 가게 앞으로 다양한 지역의 사람들이 줄을 선다. 땡볕도, 추위도 마다하지 않는다. 국수 한 그릇의 힘은 그렇게 세다.



경상도 국수와 함께 먹는 요리
든든한 찐만두·향긋한 망개떡·맑고도 독한 집집이 동동주
망개떡

망개떡


국수와 잘 어울리는 음식으로 부침개, 편육, 보쌈, 만두 등이 있다. 국숫집 메뉴에 꼭 끼어 있는 조연들이다. 그러나 경상도에서는 다른 지역과 달리 국수와 함께 곁들여 먹는 음식이 없다. 경상도에서 찾아간 국수 원조집 5곳에서는 모두 국수만 팔았다. 부산 내호냉면 정도만 찐만두를 판다.
하지만 메밀소바만 파는 경남 의령 제일식당은 5분 거리 시장으로 가면 디저트를 먹을 수 있다. 의령의 명물인 망개떡이다. 찹쌀가루를 쪄서 치대어 팥소를 넣고 반달이나 사각 모양으로 빚은 망개떡은 4개에 1천원이다. 망개나무라고 부르는 청미래덩굴잎 두 장으로 찹쌀떡이 서로 달라붙지 않게 해서 같이 찌는데, 이 나뭇잎 냄새가 떡에 배어 독특한 향이 난다. 찹쌀의 쫀득함과 팥소의 달콤함이 매력적이다.
경북 포항 모리국수는 술 생각이 나게 하는 독특한 국수다. 해장용으로도 좋지만, 아귀나 물메기같이 살이 많은 생선이 들어 있어 술을 찾는 손님이 많다. ‘까꾸네 집’ 근처 양조장에서 가져온 ‘집집이 동동주’는 서울에서 맛보기 어려운 포항 술이다. 술을 빚은 뒤 물을 전혀 넣지 않은 ‘전내기 기법’으로 만들었다. 공군 대위로 전역한 민속연구가인 양조장 주인이 여러 차례 실험을 거쳐 만든 술이란다. 사케처럼 맑지만 색이 누르스름하고, 냄새는 찝찌름하다. 맛은 막걸리보다 독하다. 시원하게 한 사발 쭉 들이켜려 하니 까꾸네 모리식당의 이옥순 할머니가 큰 소리로 말린다. “취해.” 값은 6천원. 장수막걸리보다 4천원이 비싸다.

글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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