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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의 기수들, 반공교육 나섰네

한국전쟁에 대한 성찰 없이 학도병들의 무용담만 판치는 영화 <포화 속으로>
등록 2010-06-10 06:57 수정 2020-05-02 19:26
영화 〈포화 속으로〉

영화 〈포화 속으로〉

2010년에 한국전쟁에 참전한 학도병의 실화를 다룬 영화가 개봉된다고 하면 어떤 영화가 상상되는가? 반전 메시지나 한국전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기대했다면 를 보지 말기 바란다. 는 반전이 아닌 반공 메시지를 담은 ‘무용담’이다.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은 냉전시대 ‘공식 입장’에서 한 치도 어긋남이 없으며, 어머니를 비롯한 온갖 클리셰가 포탄처럼 떨어진다. 국가보훈처가 150억원 예산으로 극장판 를 찍는다면 이와 흡사할 것이다.

자살폭탄 테러도 마다 않는 적대감

첫 자막부터 영화의 시각을 말해준다. “1945년 광복… 소련과 미국의 남북한 점령… 북한의 남침… 대구와 부산을 제외한 전역 함락….” 지겹게 듣던 풍월 아닌가. 하지만 한국전쟁의 기원이 그리 명쾌한 건 아니다. 개전 당시부터 현재까지 남침설·북침설·남침유도설 등 논란이 있으며 학계에선 남침유도설이 유력한 가운데, 누가 먼저 발포했는지는 그다지 의미가 없을 정도로 남한 단독정부 수립 이후 혼란과 교전이 계속되는 상태였음이 주지된다. 따라서 ‘평화로운 남한을 전쟁 준비를 마친 북한이 기습해 전면전을 벌였다’고 간단히 치부하는 건 반공교육 이상의 숙고가 없는 시각이다.

영화는 1950년 8월 포항여중을 사수하던 학도병들이 인민군과 접전을 펼친 실화와 당시 발견된 학도병의 ‘편지’를 뼈대 삼아, 학도병이라는 존재에 대한 감독의 상상을 살로 입힌다. 첫 시퀀스에서 펼쳐지는 화려한 전투 장면은 학도병(최승현)을 시점의 주체로 놓아 공포감을 배가한다. 부대는 포항으로 퇴각하고, 일군의 학도병들이 한 트럭 내린다. 영화는 이들의 ‘군기가 들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며, 곧이어 학도병 간의 껄렁한 갈등을 담는다. 권상우는 에서의 “한판 뜰까?” 모양새 그대로이고, 최승현은 ‘범생이’ 반장 역을 꾸역꾸역 해낸다.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한판 뜰’ 때 서로 “겁나면 도망가라” 외치는 장면은 이들이 자신의 공포를 외화하고 있을 뿐, 이들 간 갈등은 허깨비임이 드러난다. 영화가 살로 입힌 드라마는 응집력이 없다는 뜻이다. 영화는 학도병, 즉 ‘어린 군인’의 존재에 대한 고민을 두 번 드러낸다. 북한 소년병을 마주한 남한 학도병이 갈등하는 장면과 인민군 소좌(차승원)가 남한 학도병에게 투항을 권유하는 장면이다. 턱없이 어린 적을 대할 때 증오보다 연민이 앞서는 심정이 그려지는가 싶지만, 곧바로 정리된다. 북한 소년병은 “군인으로 죽을지언정 항복하지 않는다” 말하고 죽고, 남한의 학도병 역시 스스로를 ‘군인’으로 인식한다. 즉, ‘아무리 어려도 총을 든 이상 군인이요 적’임을 영화는 어린 군인의 입을 통해 발언하게 한다.

그런데 이 사기와 자살폭탄 테러도 마다 않는 적대감은 어디서 오는 걸까? 인민군 소좌는 죽어가는 학도병에게 말한다. 이 비극은 너는 남조선에서, 나는 북조선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남한군 대위(김승우)는 “학도병은 군인인가, 아닌가?” 묻고는 “자기들 나라이니, 자기들이 지키겠지”라고 말한다. 영화는 이들의 입을 통해 자신이 태어난 ‘나라’에 대한 소속감과 애국심으로 싸우게 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한국전쟁에서 진실이 아니다. 이들은 남조선과 북조선에서 태어난 게 아니라, 모두 1920~3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났다. 불과 2년 전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조선인 누구도 ‘하나의 조선’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한국전쟁 직전까지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이 팽배했으며, 서로 ‘괴뢰’로 부를망정 독립된 나라로 인정하진 않았다. 는 한국전쟁을 확고한 국경선을 사이에 둔 민족국가 간 전쟁인 양 그린다. 이는 해방 정국의 혼란으로 야기된 ‘내전이자 세계전쟁’이라는 한국전쟁의 독특한 위상을 전혀 숙고하지 못한 결과다.

뉴라이트 사관과 닮았다

영화 속 학도병들은 호기심으로 무기를 집어들고 좋아한다. 당시 중고생은 인텔리에 속했지만, 두려움과 용기 사이의 고민만 그려질 뿐, 이들이 무슨 마음으로 자원했으며 미군과 함께 동족과 싸우는 상황이 옳은지 고민하는 빛은 없다. 감독 역시 마찬가지다. 클로즈업과 콘트라스트로 디테일을 살린 미학에 매료돼, 전쟁영화라는 장르를 집어들고 좋아할 뿐 한국전쟁의 의미를 사유하지 않는다. 스펙터클을 중시한 조차 ‘보도연맹 사건’과 주인공이 국방군에서 인민군으로 갈아타는 금기 위반을 통해, 남북을 선악으로 구분하는 이분법적 반공 이데올로기를 교란시켰지만, 는 아무런 위반도 없다. 인민군은 호전적인데다 김일성 1인 숭배에 절어 있고, 남한군은 전쟁을 원하진 않지만 용감하게 응전한다. 해방 정국의 역사를 말소하고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대한민국’의 건국으로 의심 없이 받아들이며, 한국전쟁을 국가 간 전쟁인 양 사유하고, 북한을 통일의 당사자가 아닌 적대국으로 받아들이며, 평화를 위해선 전쟁도 두려워 않는 이 영화의 사관은 건국절, 통일부 존폐 논란, 북한 주적론, 전쟁불사론 등으로 드러나는 현 정권의 ‘뉴라이트’ 사관과 닮았다. 하지만 감독에게 이를 묻는다면 역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할 것이다. 곧 주말 연속극 가 방송될 예정이라 한다. 모든 것은 가치중립적이지만,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있다면 그건 전쟁일 것이다. 부디 는 ‘반공’이 아닌 ‘반전’을 전하는 드라마가 되길 기원한다.

황진미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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