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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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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박한 땅의 구수한 향기

옥수수·메밀을 주원료로 쓰는 강원도,
밍밍한 별미 올챙이국수·얼큰한 칡국수·동치미 맛이 일품인 막국수…
등록 2010-06-03 15:51 수정 2020-05-02 19:26
강원도의 음식은 맛을 즐기는 음식이 아닌 배고픔을 견디는 음식이었다. 옛 맛을 간직한 강원도 정선시장.

강원도의 음식은 맛을 즐기는 음식이 아닌 배고픔을 견디는 음식이었다. 옛 맛을 간직한 강원도 정선시장.

“생명 앞에 맛은 무의미하다. 평야에서 대지의 축복 속에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한 사람들은 높고 깊은 땅의 척박한 맛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 괴리감은 올챙이국수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혀에서 전달되는 미각으로 올챙이국수 맛을 평가하는 건 정선 사람들의 강인한 생활력에 대한 무례이다.”( 19권 중에서)

콧등치기국수, 멸치 육수에 말아 후루룩

지역을 떠올리면 풍경보다 음식이 먼저일 때가 있다. 각종 나물과 약재를 파는 5일장이 들어서는 강원도 정선도 그런 곳이다. 외진 곳에 자리잡아 찾아가기 쉽지 않은 이곳은 ‘올챙이국수’와 ‘콧등치기국수’가 유명하다. 이 두 가지 음식을 먹지 않곤 정선을 다녀왔다 말할 수 없다. 올챙이국수를 파는 식당이 늘어선 골목에서 5년째 장사를 하고 있는 아리랑맛집 윤금화 사장은 “장이 설 때면 앉을 자리도 없이 사람들이 들어차 국수를 먹고 간다”고 말했다.

강원도 정선은 산골이 깊다. 쌀이 없어 퍽퍽한 감자나 옥수수를 주식으로 먹고, 메밀가루를 이용해 찰기 없이 툭툭 끊어지는 메밀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자연을 닮아 생활력이 강한 사람들이 만들어 먹은 음식은 ‘즐기는 음식’이 아닌 ‘견디는 음식’이었다. 올챙이국수도 그런 음식이다.

올챙이국수

올챙이국수

정선을 비롯해 평창·홍천·인제 등지에서 주로 먹는 올챙이국수는 만드는 방법이 간단치 않다. 옥수수를 5시간 이상 끓는 물에 삶은 뒤 녹말을 헝겊으로 걸러내 무쇠솥에서 다시 끓인다. 제법 걸쭉해지면 불을 끄고 4시간 이상 뜸을 들인다. 그다음 구멍이 숭숭 난 체에 내리면 올챙이 모양의 국수가 뚝뚝 떨어진다. 이때 찬물로 받아 담가야 붇지 않는다. 이렇게 뽑은 올챙이국수를 식초맛이 느껴지지 않는 오이냉국에 말고 양념간장을 뿌려 숟가락으로 뚝뚝 떠먹는다. 밍밍하고 미끈한 면도, 맹맹한 국물도 별맛 없이 싱겁다. 윤금화 사장은 “우리 어머니는 어릴 때 질리게 먹었다는데, 강원도 토박이인 나도 장사를 하면서 처음 맛을 봤다”며 “옛날 배고픈 시절에 허기를 달래던 강원도 음식이 이젠 외지 사람들에게 별미가 됐다”고 말했다.

콧등치기국수도 올챙이국수처럼 먹을 것이 부족한 시절에 해먹던 메밀국수다. 면을 후루룩 먹다 보면 면발이 콧등을 친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멸치·다시마 육수에 멀겋게 된장을 풀어 끓인 뜨거운 육수를 부어 온국수로 먹거나 오이냉국을 말아 냉국수로 먹을 수 있다. 주로 먹는 방식은 온국수다.

콧등치기국수의 원조집으로 알려진 정선 아우라지역 앞 청원식당은 정선시장에서 맛본 콧등치기국수와 육수가 조금 다르다. 이곳에서는 된장을 풀지 않은 멸치·다시마 육수에 말아준다. 20년 넘게 식당을 운영한 방순옥 할머니의 며느리는 “손님들이 된장을 풀어달라고 하면 그렇게도 끓여준다”며 정선시장과 다른 맛을 설명했다.

‘꼴도 보기 싫은’ 꼴두국수

칡국수

칡국수

산이 주위를 둥그렇게 에워싼 산중마을인 영월에도 정선의 콧등치기국수와 비슷한 메밀국수가 있다. ‘질리게 먹어 꼴도 보기 싫은 국수’라는 의미의 ‘꼴뚜국수’다. 콧등치기국수와 맛과 모양이 거의 비슷하다. 맛이 아닌 향수로 먹는 음식이다. 영월엔 이런 국수가 하나 더 있다. 칡국수다.

산이 많은 영월 지역도 정선처럼 흉년이 지면 도토리·칡·산채 등으로 허기를 달래야 했다. 그중 가장 흔한 칡을 가루로 내 칡국수를 해먹었다. 칡으로 만든 국수는 약간 쌉쌀하면서 달짝지근해 심심한 메밀면보다 맛이 좋았다. 고씨동굴 앞에서 칡국수를 파는 성숙자(62) 할머니는 “동굴 앞길로 흐르던 동강에서 기념품과 닭곰탕을 함께 팔다 집에서 먹던 칡국수를 내놓았더니 반응이 좋아 칡국수 전문점을 낸 게 벌써 30년이 됐다”고 했다. 칡국수를 먹기 위해 일부러 할머니의 가게를 찾으러 오는 손님이 늘면서 할머니 식당 주변으로 칡국수 전문점이 하나둘 늘어났다. 칡국수는 할머니가 어릴 때 먹던 방식 그대로 만든다. “우리 어릴 땐 국수를 아침저녁으로 매일 먹었어. 밀가루에 칡가루나 콩가루를 섞어 면을 만들어 칼국수를 해먹었지. 다들 못사니까 국수를 많이 해먹었어.”

할머니네 칡국수는 쫄깃쫄깃한 면발이 특징이다. 칡가루와 밀가루를 반반씩 섞어 손반죽해 1인분씩 면을 나누어 쟁반에 담고 옥수수 전분을 뿌려 들러붙지 않게 놔둔다. 준비된 면은 냉장고에 넣어 저온숙성시키는데, 칡의 특성상 잘 굳고 부서져 그날그날 뽑아 써야 한다. 새벽 4시에 일어나는 할머니가 하루에 뽑는 국수량은 약 800인분. 지금은 가업을 잇겠다며 장성한 두 아들 내외가 일을 돕고 있어도 물 농도가 중요한 반죽 배합은 늘 할머니 손을 거쳐야 한다. 할머니와 함께 가게를 돌보는 할아버지는 “우리 할매가 면 뽑다가 허리가 다 꼬부라졌어”라며 칡국수가 까다롭고 힘든 음식이란 설명을 길게 뽑았다.

할머니가 만드는 칡국수는 메밀면처럼 색이 거무튀튀하고 넓다. 이 면을 따로 육수를 내지 않고 감자채를 끓인 물에 함께 삶아 그릇에 담고 고명을 얹어 낸다. 김, 다진 김치, 부추, 감자채, 달걀지단, 참깻가루, 다진 양념 등이 고명으로 올라가 먹음직스런 색을 낸다. 옥수수전분이 녹아 진득해진 국물은 다진 양념과 섞여 얼큰하고 구수한 맛이 일품이다. 고기 한 점 올라가지 않아도 한 그릇을 비우고 나면 뱃속에 기름기가 도는 듯 든든하다. 할머니는 “멸치 육수의 비린 맛 없이 감자채를 삶은 물에 간장과 소금으로 밑간을 한 육수를 쓰는 게 우리 집 비법”이라고 했다.

콧등치기국수(왼쪽), 동치미막국수(오른쪽).

콧등치기국수(왼쪽), 동치미막국수(오른쪽).

칡국수가 배고픈 시절을 달래준 든든한 식사였다면 기나긴 겨울밤 배가 출출해질 때 먹는 ‘동치미막국수’는 겨울 입맛을 돋워주는 별미였다. 인제를 지나 고성으로 올라가면 이북 방식 그대로 동치미막국수를 만들어 파는 백촌막국수가 있다. 이북 출신 시아버지의 손맛을 따라 며느리가 25년 전통을 지키고 있는 집이다. 한국전쟁 이전에 38선 이북 지역이었고 전쟁 후에는 피난민들이 많이 내려와 정착했던 지역의 솜씨 좋은 국숫집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이들로 늘 문전성시를 이룬다.

동치미 국물을 세 단계로 즐기는 법

이 집의 막국수는 100% 메밀가루만 이용해 면을 뽑는다. 이 때문에 툭툭 잘 끊기고 시간이 지나면 쉽게 불어터진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면 사진 찍으며 수다 떨지 말고 동치미국물을 말아 후다닥 먹어야 한다. 얼음이 떠 있어 보기에도 시원한 동치미 국물은 양푼에 따로 넉넉히 담아 내놓는다. 같은 강원도라도 춘천 막국수가 닭 육수를 섞어 쓰는 것과 달리 이곳에선 순순한 동치미 국물만 쓴다. 면과 동치미 육수를 따로 내놓는 건 입맛에 따라 국물을 즐기라는 주인장의 배려다. 국물엔 들기름, 식초, 설탕, 다진 양념, 겨자를 넣어 먹으면 맛있다는데, 더욱 맛있게 즐기는 방법이 따로 있다. 세 단계로 나눠 국물을 즐기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릇에 동치미 국물을 붓고 추가 양념을 넣지 않은 상태에서 시원하게 마신다. 사이다를 넣은 듯 새콤달콤하고 톡 쏘는 시원한 동치미 국물이 입안에서 뱃속으로 미끄러지며 더위를 싹 식힌다. 두 번째는 들기름과 식초만 넣어 먹는다. 면 위에 올린 김가루와 깨가 어울려 입안 가득 고소함이 퍼진다. 마지막으로 겨자와 다진 양념을 넣으면 알싸한 맛이 혀를 톡톡 건드린다. 한 그릇을 다 비우고 물 대신 동치미 국물로 입가심을 해도 입안이 개운하다.

이름을 밝히길 꺼리는 이 집 며느리는 “그릇에 담을 무와 국수를 말 국물용 동치미를 따로 만드는 게 비법”이라며 “동치미막국수가 원래 겨울 음식이었듯 동치미는 여름에 담근 것보다 겨울에 담근 것이 맛이 훨씬 좋다”고 했다. 국물 맛에 반한 이들이 국물 포장을 원해도 말리는 이유가 발효식품인 동치미의 맛이 쉽게 변하기 때문이다. 인제 가면 언제 오냐고 할 만큼 멀다던 인제보다 더 먼 고성까지 가서 국수 한 그릇을 먹고 오는 이유는 하나다. 잘 익은 김칫국에 만 찰기 없는 메밀국수 한 그릇이면 매끄러운 쌀밥 열 그릇이 부럽지 않아서다.



강원도 국수와 함께 먹는 요리
면발의 맹맹함을 만회하는 메밀전병·메밀전

메밀전병

메밀전병


맛보다 향수로 먹는 음식이라지만 강원도 정선의 콧등치기국수와 올챙이국수는 솔직히 너무 맹맹하다. 정선의 맛에 살짝 실망하려고 할 때 점수를 만회하는 건 메밀전병과 메밀전이다. 메밀전병은 들기름으로 부쳐낸 얇은 메밀전에 다진 배추김치를 속으로 넣어 둘둘 만 음식이다. 김치 맛이 짭조름해 간장을 찍어 먹을 필요가 없다. 메밀은 부드럽고, 김치는 아삭하게 씹힌다. 메밀전은 역시 얇게 부쳐낸 메밀전에 배춧잎 두 개를 얹어주는 전이다. 전 부치는 시간이 눈 한 번 감았다 뜨는 시간만큼 빠르다. 사치스럽지 않게 뱃속을 채우는 소박한 맛이다. 가격도 저렴하다. 메밀전병과 메밀전 모두 한 접시에 2천원이다.
칡국수를 파는 강원도 영월 강원토속식당에서 사이드 메뉴가 많다. 사람들이 주로 찾는 건 도토리묵과 감자전, 감자송편이다. 여느 산자락 아래서 즐길 수 있는 술안주와 간식거리를 다 먹을 수 있다. 감자송편은 그냥 감자떡인데 쫀득하고 고소하다.
막국수와 가장 잘 어울리는 음식은 역시 돼지고기 편육이다. 고성 막국수로 불리는 백촌막국수에서도 편육을 한다. 너무 얇지도 두껍지도 않은 두께의 고기가 퍽퍽하지 않고 부드럽게 씹힌다. 고기는 명태식해를 싸서 먹으면 맛있는데 이 명태식해가 별미다. 고추장 양념에 무친 새콤달콤한 명태포가 고기와 어울려 색다른 맛을 낸다. 백김치에 싸먹으면 시원하고 달큼하다. 보통 국숫집은 반찬이 없지만 백촌막국수는 국수 한 그릇에도 백김치·열무김치·명태식해를 기본 반찬으로 준다. 편육과 같이 나오는 반찬인데 한 번 맛을 본 이들이 계속 찾아 기본으로 제공하고 있다.

글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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