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이 다니는 올림포스스쿨. 선생님인 옥황상제가 출석을 부른다. 힌두교 지혜의 신 가네샤가 지각을 하자 옥황상제는 교무실 가서 ‘깜지’(반성문) 100장을 쓰라고 벌을 내린다. 힌두교 파괴의 신 시바도 깜지 쓰기 벌을 받는다. 이유는 선생님이 “시바, 시바”라고 이름 부르는 소리를 “선생님이 화가 나서 하는 소리”로 알고 대답을 못해서다. 잠시 뒤 교무실에 간 옥황상제. 반성하며 깜지를 작성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가네샤와 시바가 웃으며 각각 6개의 팔로 전광석화처럼 깜지를 써내고 있는 걸 발견한다. -이말년 작가의 ‘올림포스스쿨’편
“시바 시바” 시바신을 불렀으나…인터넷 신조어 중에 ‘병맛’이라는 단어가 있다. 설명하지 않아도 느낌이 오는 이 말은 ‘병신 같은 맛’의 줄임말이다. 조롱의 의미를 담아, 맥락 없고 형편없으며 어이없는 것을 접할 때 주로 쓴다. 결말이 충격적이던 을 두고도 누리꾼은 ‘병맛 결말’이라 불렀다. 병맛의 응용단어는 어울리지 않는 기승전결을 말하는 ‘기승전병’이다. ‘결’론이 ‘병’맛이란 얘기다.
병맛이란 단어를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건 인터넷에서 유행 중인 ‘병맛 만화’다. 웃기기로 작정한 개그만화에서 뿌리를 내린 병맛 만화는 그림도, 내용도, 형식도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다. 열심히 그리지 않은 그림과 정상적이지 않은 스토리텔링, 상식을 벗어난 구성이 특징이다.
병맛 만화의 대표주자로 꼽히는 이말년 작가. 디시인사이드에 그림을 올리다가 야후·네이버 등에 를 연재하면서 유명해진 만화가다. ‘올림포스스쿨’편에서 이름이 욕설처럼 들리고 팔이 6개라 반성문 쓰기도 수월한 시바가 웃음을 주듯 그의 만화에선 신화·속담·영화 따위 소재가 어이없게 패러디돼 웃음을 준다. 이른바 병맛 만화의 주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중 가장 유명한 ‘불타는 버스’편도 패러디에서 나왔다. 담배를 피우던 한 남자가 버스 정류장에서 막 출발하려는 버스에 급히 올라탄다. 그리고 실수로 요금통에 불씨가 남은 담배를 떨어트린다. 버스에 불이 붙어 활활 타기 시작한다. 동네 아이들이 연기 나는 버스를 소독차인 줄 알고 “와~” 하며 따라붙는다. 한 승객이 “뭐해? 차 안 세우고. 불부터 꺼!”라고 외치자 다른 승객이 그를 때려눕히고 소리친다.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버스기사는 “오케이!”를 외치고, 불타는 버스는 청와대로 돌진한다. 가던 길에 ‘XX산성’과 부딪치게 된 버스는 장렬하게 폭발. 승객 전원이 사망하며 끝이 난다. 이게 웃기냐고? 영화 를 패러디한 이 만화에 누리꾼은 “완전 병맛”이라며 뒤집어졌다.
이말년·조석·귀귀 등 포털 웹툰에서 활약이말년 외에도 비교적 제도권에 안착한 병맛 만화가는 제법 있다. 조석(), 귀귀(), 마사토끼() 등 포털 사이트 웹툰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이다. 이들이 양지에 있다면 음지에는 김탁봉·잉위를 비롯한 무명작가들이 있다. 디시인사이드·루리웹 따위 커뮤니티 사이트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무명작가들은 규제가 없기 때문에 만화의 형식조차 무시한 작품을 주로 선보인다. 욕설과 성적인 내용을 포함한 ‘19금급 병맛 코드’가 이들의 장기다. 김낙호 만화연구가는 “소재나 형식의 제한 없이 어이없게 틀어버려야 병맛 만화”라고 분석했다.
만화전문가들은 “싸구려 B급 문화”로 규정할 수 있는 병맛 만화의 시작을 1990년대부터 유행한 ‘악취미 개그만화’로 본다. 악취미 개그만화란, 지저분한 그림이나 화장실 유머처럼 누구에게는 고약하지만 나름의 재미를 주는 만화를 말한다. 일본 만화 등이 대표적이다. 김낙호 만화연구가는 “악취미 개그만화의 직접적 영향을 받고 자라난 세대가 창작과 향유를 하고 있다”며 “예전 개그만화의 코드가 명랑모험이나 풍자 위주였다면 요즘은 부조리와 파격이 개그 코드로 새롭게 인식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병맛 만화의 인기는 포털 사이트 웹툰 클릭 수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네이버 웹툰의 한 담당자는 “병맛 만화류의 이용자 수를 따로 추출하기는 어렵지만, 코리안 클릭 기준(3월28일 기준)으로 주간 330만 명의 웹툰 이용자 중 대다수가 이런 만화를 즐기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인기 만화는 평균 2천~3천 개의 댓글이 달린다”고도 했다.
젊은이들의 패배감을 달래다병맛 만화가 인기를 끄는 이유는 뭘까? 이명석 대중문화평론가는 “드라마·만화 등 웰메이드 문화가 쌓여가는 요즘, 반대로 어설픈 낙서나 그림을 보며 웰메이드가 주는 완전무결함에서 해방된 재미와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 “경기침체로 젊은이들에게 패배자라는 정서가 강해졌는데, 스스로를 병맛으로 규정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는 증거”라고 분석했다. 자기 비하가 강한 루저 문화가 병맛 만화를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루저들이 떨쳐일어나는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지지 않는 한 당분간은 병맛 만화의 유행이 지속될 조짐이다. 아마추어와 프로의 경계가 없고 온라인 커뮤니티 사이트 안에서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만화인 만큼 병맛 만화에서 즐거움을 얻는 이가 많기 때문이다. 병맛 만화는 웰메이드만 살아남는 ‘지루한 세상’에 던지는 ‘불타는 구두’가 되고 있다. 을 그리는 귀귀는 “그리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모두 머리와 마음을 비우고 병맛 만화를 즐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명석 문화평론가도 “만화를 통해 해방구를 찾는 것이니만큼 만화의 소재를 도덕적 잣대로 재거나 터부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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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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