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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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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책’을 빌려드립니다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 만나 인생을 얘기하는 국회도서관 ‘리빙 라이브러리’…
‘모든 사람이 다른 모든 사람을 위한 한 권의 책’이라네
등록 2010-02-10 16:50 수정 2020-05-03 04:25

의 이현경(오현경)은 요리도, 화장법도, 키스도 글로 배운다. 읽은 대로 했는데 결과는 꽝. 요리사, 메이크업 아티스트, 키스 경험자를 만나 직접 배웠다면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지난 2월3일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 책을 빌리는 사람으로 늘 북적이는 이곳에서 이날만은 이색적인 도서 대출 상황이 벌어졌다. ‘책’이 아닌 ‘사람’을 빌려준 것. 행사 이름은 ‘리빙 라이브러리’, 살아 있는 도서관이다. 리빙 라이브러리의 콘셉트는 간단하다. 도서관은 책 대신 사람을 대출해준다. 대출 시간은 30분. 독자들은 인터넷에 미리 공개된 도서 목록(사람 목록)에서 읽고 싶은 책(사람)을 고른다. 그리고 그 책(사람)과 마주 앉아 독서(대화)를 한다. 글이 아닌 대화로 인생을 나누고 배우려는 사람들이 책과 대출자가 되어 만났다. 결과는 어땠을까?
이날 소개된 책(사람)은 모두 43권이다. 남자 간호사, 여자 소방관, 방송작가, 연극인, 다문화가정, 성적 소수자 등 다양한 직업과 인생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을 주제 삼아 기꺼이 책이 됐다. ‘사람 책’은 도서관 책보다 대출 횟수가 유연했다. 3시간 동안 준비된 43권의 책을 읽은 사람은 모두 123명이나 된다.

‘리빙 라이브러리’는 모든 사람이 다른 모든 사람을 위한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다는 발상을 담은 도서관 이벤트다. 지난 2월3일 국회도서관에서 열린 리빙 라이브러리 행사 모습.

‘리빙 라이브러리’는 모든 사람이 다른 모든 사람을 위한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다는 발상을 담은 도서관 이벤트다. 지난 2월3일 국회도서관에서 열린 리빙 라이브러리 행사 모습.

위로를 주고, 오해와 편견을 거두고

11살 한결이는 미술치료사 임지향씨를 책으로 골랐다. 정신지체 장애가 있는 동생 건이와 좀더 많은 대화를 하고 싶었다. 임씨는 한결이에게 종이에 손바닥을 그리게 하고 자주 하는 말을 손가락 마디에 적으라고 했다. 역시나 한결이는 동생보다 엄마와 나누는 말이 많았다. 한결이에겐 동생과 대화할 수 있는 자신감이 필요했다. 임씨는 “미술치료사는 미술로 다가가 꿈을 도와주는 조력자”라며 “미술치료를 통해 한결이가 동생과 어떤 대화를 할 수 있을지 가르쳐줬다”고 말했다. 임씨와 대화를 나눈 한결이의 표정도 밝았다. “선생님과 대화하며 그림을 그려보니 재미있었다”며 “건이랑도 같이 놀겠다”고 웃었다.

3년차 간호사인 정은진씨가 읽은 책은 남자 간호사 김진효씨. 주제는 ‘남자로서 그들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이었다. 간호사가 되어 부딪히는 현실의 어려움, 간호사가 가져야 할 소명 의식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김씨는 “간호사를 할 바엔 의사가 되지 그랬느냐는 평가를 받을 만큼 간호사는 사회적으로 저평가돼 있는 게 사실”이라며 “여성의 직업으로 보는 간호사가 실은 양성의 직업이라는 것을 알리려고 나도 노력하듯이, 은진씨도 본인이 갑갑하다고 여기는 현실의 문제를 바꾸려고 노력해보라”며 힘을 줬다. 정씨는 “30분이란 시간이 아쉬울 만큼 즐거운 대화였다”며 “다음에 다시 기회가 된다면 다른 관심 있는 주제로 사람 책을 빌리고 싶다”고 말했다.

사람과 소통하며 쌍방향 소통이 가능한 책은 글로 읽는 것보다 훨씬 많은 감흥을 줬다. 상담과 치료의 역할을 겸한 대화는 위로를 주기도, 오해와 편견을 거두기도 했다. 평소 국제결혼에 관심이 많던 대학생 임나경씨는 우즈베키스탄에서 한국으로 시집온 김마리아씨와 대화하면서 다문화가정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임씨는 “이번 학기에 다문화가정 아이들의 공부를 돕는 봉사활동을 할 예정인데 이렇게 미리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좋았다”며 “국제결혼은 뭔가 특별할 것이란 편견을 지울 수 있어 대화 시간이 책을 읽는 것보다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이동도서관도 해볼까

대출자는 책에게 도움을 받았다지만 책은 대출자 덕분에 공부를 했다는 반응이다. 월드비전 홍보팀 노혜민씨는 김포여중 교지반 선생님과 학생들을 만나 대화했다. 으레 학교마다 다니며 강의했던 빈곤과 나눔에 대한 이야기를 할 줄 알았던 그는 뜻밖의 질문에 깜짝 놀랐다. “월드비전이 왜 필요한가”란 질문이었다. “내가 책으로 나와 (대표성을 띠고) 대화할 수 있는 자리인가 싶을 만큼 당황했다”는 그는 “말을 할 때 신중하게 되더라”고 말했다.

이렇게 어떤 직업과 인생의 대표로 얘기하게 된다는 점에서 사람 책은 부담을 느끼기도 했다. 인기 없는 책이 될까 두려워하기도 했다. 새터민 현인애씨는 “평소 북한에 관심 갖는 이를 만나기 힘들어 누가 나를 대출할까 했는데 대출자가 있어 기뻤다”며 “통일이 돼 북한 사람들도 사람 책을 빌려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리빙 라이브러리 행사를 직접 기획한 유종필 국회도서관장은 “책으로 참여한 내가 오히려 드림페인터(꿈을 그려주는 페인터), 트랙터 트레블러(트랙터 여행가)라는 이색 직업을 가진 대출자 덕분에 즐거웠다”며 “모든 인생이 한 권의 책을 쓰는 것 같다”고 했다.

책과 책은 서로의 대출자가 되고 싶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김기선 해비타트 사무총장은 “책들끼리 모이면 백과사전이 될 듯하다”며 “리빙 라이브러리 행사를 발전시켜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가는 이동 도서관 역할도 해보자”고 제안했다.

국내에서 처음 열린 리빙 라이브러리는 덴마크 출신의 사회운동가 로니 에버겔이 2000년에 창안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헝가리 등 10여 개 국가로 퍼진 도서관 이벤트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대화하고 소통하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서로 잘 알지 못해 가지게 되는 편견과 선입관을 지우자는 취지로 기획된 행사다. 책으로 나선 사람은 보수 없이 무료로 자신의 시간과 인생을 대출자와 나누게 된다. ‘모든 사람이 다른 모든 사람을 위한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다’는 발상은 반응이 뜨거웠다. 사람을 대출해주는 리빙 라이브러리는 빠르게 세계 곳곳으로 퍼졌다. 헝가리에서는 4일 동안 4천 명이 참가하는 기록을 남겼고, 스웨덴에서는 정기적인 행사로 자리잡았다. 홍정순 국회도서관 의회정보심의관은 “도서관에 꽂힌 책은 독자를 수동적인 습득자로 만들지만, 사람 책은 미리 대화 주제를 고민하고 공부하게 하는 능동적 습득자를 만든다”며 리빙 라이브러리가 훌륭한 독서 방법이 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리빙 라이브러리는 자발적인 참여를 하는 책과 능동적 독자가 필요한 만큼 대출 조건이 까다롭다. 한 권만 빌릴 수 있으며, 미리 예약해야 한다. 이날 새벽 베트남에서 비행을 마치고 돌아온 조종사 남종회씨는 대출자가 약속을 어겨 1시간을 빈 테이블에서 앉아 기다려야만 했다. 남씨는 “사정이 있었겠지만 섭섭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대출자는 처음 책이 대출되었을 때와 같은 육체적·정신적 상태로 책을 반납해야 할 의무도 진다. 하지만 사람과 사물이 아닌 사람과 사람이 대화를 나눴는데 책이 처음 그대로의 상태로 반납될 수 있을까. 연극배우 이주실씨는 “모든 사람의 인생이 한 권의 책인데 대출자의 인생을 경험해본 나도 행사에 참여하기 전의 나와는 다를 수밖에 없지 않겠냐”며 웃었다.

한 권만, 미리, 처음 상태 그대로…

한 사람의 속 깊은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몇 권의 책을 읽는 것만큼 황홀함을 안겨주는 일일지 모른다. 사람이 책이 되면 도서관에서만 빌리지 않아도 된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 내가 살고 있는 도시 자체가 거대한 도서관이 될 수 있다. “내 인생을 책으로 쓰면 10권이 넘어”라고 얘기하는 우리 주변 사람 모두가 살아 있는 인생 책이다. 국회 도서관은 리빙 라이브러리에 참여한 사람 책과 대출자의 반응을 본 뒤 정기적으로 행사를 이어갈지 검토할 계획이다.

글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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