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희 YES24 도서 3팀장
1995년, 창립 30주년을 맞은 민음사는 전집 간행 위원회를 구성했다. 김우창 교수 등 4명의 편집위원이 전집 간행 목록을 작성했고, 3년의 준비 끝에 세계문학전집의 제1권을 냈다. 오비디우스의 였다. 민음사 장은수 대표편집인은 “세계의 거장들과 직접 계약한 국내 최초의 문학전집”이라는 점이 민음사 전집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지적한다.
적어도 10년을 한결같이 견뎌야 하는 일
2004년, 민음사는 으로 100권 목록을 채웠다. 영미·유럽 문학에 치우치지 않겠다는 기획 의도를 다시 밝힌 셈이다. ‘새로운 기획, 새로운 번역, 새로운 편집’을 모토로 세계문학전집을 펴낸 지 7년 만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또 3년 뒤, 전집의 200번째 줄엔 다시 우리 고전인 이 올라 있다.
2009년, 을유문화사의 세계문학전집이 발간 50주년을 맞았다. ‘구 을유세계문학전집’은 1959년에 제작되기 시작해서 1975년에 100권 목록을 완결지었다. 이 전집은 세로쓰기에 활자를 써서 인쇄됐고 한글과 한자가 섞여 있었다. 2008년 6월에 이 을유세계문학전집 제1권으로 다시 나왔다. 이전 전집과 이름은 같지만, 작품 목록, 번역자 모두 달라졌다. 편집을 맡고 있는 김영준 편집장은 “새로운 전집이 구 전집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문학전집을 만드는 것은 큰일이다. 도서 선정의 원칙부터 표지 디자인의 일관성까지, 적어도 10년을 한결같이 견뎌야 하는 작업이다. 근래 출판사 두 곳이 잇달아 이 야심찬 기획에 뛰어들었다. 2008년 5월엔, 펭귄 클래식 시리즈가 한국어로 소개됐다. 2009년 12월에는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의 첫 20권이 서점에 깔렸다.
‘페이퍼백’(paperback)의 대명사 격인 펭귄 클래식 시리즈는 1935년, 출간과 함께 보급판 도서에 대한 독자의 인식을 바꿨다. 펭귄 클래식 시리즈 가운데 블랙 클래식(Black Classic)만 1천 권이 넘는다. 이 시리즈를 국내에 소개하는 펭귄클래식코리아 심하은 편집장은 시대와 장르를 넘나드는 도서 리스트를 가장 큰 장점으로 꼽는다. 물론 독자 입장에선, 검은 바탕색과 일러스트가 깔끔한 표지는 거부하기 힘든 매력이다. 또 펭귄 클래식 시리즈 원서에 실린 석학들의 서문과 주해는 펭귄 클래식 시리즈만의 장점이다.
2009년 12월에 첫 권을 펴낸 문학동네의 세계문학전집은 가장 빠른 속도로 100권 목록을 완성할 예정이다. 1차분 20권을 냈고, 2010년 안에 60여 권을 출간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각 언어권의 문학 전공자들로 이뤄진 편집위원들의 회의를 통해 이미 100권의 출간 계획이 잡혀 있다. 번역 마지막 단계에서 독자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까지 마련했다고 하니, 이 전집에 얼마나 많은 준비가 돼 있는지 알 수 있다.
미래의 고전도 외면하지 않는다민음사 장은수 대표편집인은 “전집은 무엇보다 그 목록으로 독자에게 평가받고 인정받는다”고 말한다. 이제까지 234권을 펴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도서 목록에는 세계 20개국 이상의 국적을 가진 작가들이 모여 있다. 기존 서양 고전을 새로 번역하는 한편, 비유럽권 작가와 작품을 많이 소개했으며, 한국 문학 작품을 자연스럽게 포함시킨 것도 좋은 평가를 받는다.
을유문화사와 문학동네는 모두 전문가로 이뤄진 편집위원회에서 도서 목록을 결정한다. 을유문화사는 작품과 역자 선정 모두 편집위원들이 결정하고 출판사는 관여하지 않는다고 한다. 문학동네 역시 편집위원들이 번역자 선정과 감수에 주도적으로 참여한다. 이 전집들의 출간 목록에는 등 문학전집 단골 번역서들이 포함돼 있다. 하지만 1980년대까지의 문학전집과 비교해 확연히 구분되는 작품들이 목록에 올라 있다. 특히 남미·중국·일본 등 이제까지 관심을 받지 못했던 국가의 소설들이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펭귄 클래식의 경우 처럼 이전 문학전집에서 찾기 힘들었던 대중적인 작품을 소개하기도 한다. 또 처럼 인문사회학 명저 역시 포함돼 있다. 심하은 편집장은 “고전문학 작품, 특히 영미문학 고전을 주로 선택하게 되지만, 러시아·프랑스·독일·스페인어권 문학, 중국과 한국의 주요 고전을 골고루 안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미래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현대문학 작품을 선별하는 데도 소홀히 하지 않겠다”고 방향을 잡았다.
미래의 고전을 찾아내는 일이 편집자로서는 가장 짜릿한 일이 아닐까 넘겨짚어본다. 지난해 민음사는 ‘모던 클래식 시리즈’를 새로 내놓았다. 20세기에 태어나 1990년대 이후에 왕성한 활동을 보인 작가들의 작품 10권을 이 시리즈 목록에 올려놨다. 들녘출판사의 ‘일루저니스트 세계의 작가’ 시리즈는 ‘진보적 세계 문학 시리즈’를 표방한다. “과거 명성에 연연하지 않고 가능성이 점쳐지는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엄선하는 것”이 이 시리즈의 목표이다.
‘전집의 장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을유문화사의 김영준 편집장은 ‘번역의 완전성’이라고 단언한다. 을유세계문학전집은 그 작품이나 작가를 전공한 번역자에게 번역을 맡기고 해당 언어 전공자에게 다시 검토를 요청한다. ‘논문에 인용할 수 있는 수준의 번역’이 이 시리즈의 목표이다. 이를 위해 원본 편집의 느낌을 최대한 살린다든지, 권말 소사전, 찾아보기 등 편집에서도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여기에 덧붙여 별개의 장을 배정해 원서 판본을 소개하는 것도 이런 엄밀함의 소산이다.
원서 판본 소개부터 소설가 번역까지영어나 일본어를 통해서가 아니라 작가의 언어를 직접 우리말로 번역하는 원칙은 민음사나 문학동네 전집 역시 마찬가지이다. 영어 타이틀을 국내에 소개하는 펭귄 클래식 시리즈 역시 번역은 영문 번역자가 아니라 작품이 쓰인 언어를 전공한 번역자가 맡는다. 다양한 국적의 소설들을 소개하는 들녘출판사의 ‘일루저니스트 시리즈’ 역시 이제까지 한 권을 빼고는 중역이 없다.
문학동네의 세계문학전집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소설가의 글맛을 살리는 새로운 번역도 시도하고 있다. 는 소설가 김영하가, 레이먼드 카버의 은 김연수가 번역했다. 하창수와 최수철 역시 소설가가 아니라 번역가로 만나볼 수 있다. 펭귄 시리즈는 다른 고민이 있다. 대중적인 작품이나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작품의 경우엔 정확한 번역뿐 아니라 쉬운 번역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학술 전공자보다는 전문 번역가를 섭외한다.
만든 이의 편파적 추천 목록을 눈여겨보라이 기사 작성을 위해 문학전집 편집을 맡고 계신 분들께 전자우편 인터뷰를 요청했다. 예닐곱 개 질문을 드렸는데, 대답마다 자부심이 묻어난다. 짧게는 3년, 길게는 10년, 20권에서 250여 권을 기획하고 편집하고 다듬었는데 왜 그렇지 않겠나 생각했다.
보낸 질문 가운데 가장 짓궂은 것은 ‘이제까지 낸 시리즈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무엇인가?’라는 것이었다. 긴 출간 목록에서 편집자가 뽑은 추천작들이다. 각 시리즈의 맛을 보고 싶다면 만든 이가 추천하는 책부터 손에 잡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만든 이의 편파적인 추천 목록을 무단으로 공개한다.
, 원전을 능가하는 맛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가운데, 1999년 선정 우리 시대 최고의 프랑스 문학 번역가로 인정받은 김화영의 번역으로 탄생한 는 감히 원전을 능가하는 맛을 선사한다고 평가받는다. 번역을 위한 김화영 교수의 조사 작업은 방대한 것이었다. 먼저 파리에서 간행된 다섯 개 프랑스어 판본과 그 주석들을 참고해 1차 번역을 완성했다. 그리고 한국어판과 영어 번역판들을 참고해 보완 작업을 거쳤다. 그러나 여전히 불확실하거나 의문스러운 점들이 남았다. 고유명사의 발음, 19세기 초엽 노르망디 지방 풍속 등에 관한 것들이었다.
이에 역자는 프랑스 현지의 플로베르 전문가들에게 질문서를 보내어 자문했고,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답장을 받아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90여 개에 달하는 주석으로 살을 찌운 번역본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명실공히 1857년 파리에서 가 출간된 당시 딸려 있던 부제, 즉 ‘풍속의 연구’라는 부제에 합당할 만한 진정한 번역서라 할 것이다. / 장은수 민음사 대표편집인
묻혀 있는 초역 발견
7번 과 17번 입니다. 은 현대 독일 작가 보토 슈트라우스의 산문 작품으로는 처음 번역된 것으로, 현대에서 사랑에 대한 성찰입니다. 은 로베르토 볼라뇨의 국내 초역 작품으로, 문학의 의미를 묻고 있는 블랙코미디입니다. 볼라뇨는 이미 고인이지만 요즘 영미권에서 급상승하고 있는 인지도를 고려하면 10년 안에 보르헤스나 마르케스만큼 유명해지지 않겠는가 싶습니다. 한 사람의 독자 입장에서는 이 두 책이 가장 자극적이고 흥미로웠습니다. / 김영준 을유문화사 편집장
발자크 인간극을 열어젖힌 작품
모든 작품이 전 과정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나온 결과물들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 하겠습니다만, 이 중 몇 작품을 뽑아야 한다면 20권 중 국내에 초역되는 작품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는 오에 겐자부로가 자신의 마지막 소설이라 생각하며 쓴 작품으로서, 50년 집필 인생을 정리하는 기념작이자 노년에 들어선 대가의 원숙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프로이트가 생애 마지막에 읽은 책으로도 잘 알려진 발자크의 은 작가가 자신의 소설 전체에 이름 붙인 ‘인간극’ 목록 중 ‘철학 연구’의 첫 번째에 해당하는 작품으로서, 발자크와 프랑스 고전문학 연구에 너무나 중요한 텍스트입니다. 는 출간 당시 평론가들에게 카프카가 이름을 바꿔 발표했다고 오해를 받을 만큼 천재성으로 주목받은 스위스 작가 로베르트 발저의 대표작입니다. 그리고 현존하는 최고의 미국 작가 중 하나이며 다가오는 노벨문학상의 유력한 후보로 점쳐지는 필립 로스의 도 그의 대표작으로 국내에 처음 소개됩니다. / 임선영 문학동네 해외소설 2팀 팀장
독자적인 여성문학
개인적으로, 펭귄클래식만이 가지고 있는 여성문학에 특별한 애착이 갑니다. 래드클리프 홀의 , 진 리스의 , 이디스 워튼의 등은 펭귄클래식에서만 만나볼 수 있으며, 해당 전공자 선생님들이 심혈을 기울여 번역·소개한 최고의 여성문학 작품이라고 자부합니다. / 심하은 펭귄클래식 편집장
소설을 사유하고 형식을 뛰어넘다
는 2~3년 동안 출판하는 곳이 없던 원고였습니다. 좋은 작품이었지만, 이러한 ‘철학소설’이 과연 국내 문학시장에서 독자의 호응을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으로 모든 출판사가 출간을 꺼렸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인생에 대해 묵직한 성찰을 담은 이 작품은 점점 흥미에 치중하고 갈수록 가벼워지는 문학시장에서 소설을 ‘사유의 매체’로 삼고 싶은 독자의 욕구를 충족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출간 이후 예상을 뛰어넘는 독자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았습니다.
알베르트 피뇰의 작품 는 내용이나 형식 면에서 기존 소설 형식을 과감하게 뛰어넘은 21세기형 소설이라는 평을 받았습니다. 저희 출판사 또한 피뇰이란 작가와 그의 두 작품을 일루저니스트 시리즈의 전범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 선우미정 들녘출판사 편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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