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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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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 뚫고 본 세상, 인생은 빵꾸똥꾸


김병욱 시트콤의 절정 <지붕 뚫고 하이킥>, 코미디로 돈과 계급이라는 처절한 문제를 삼키네
등록 2010-01-21 01:43 수정 2020-05-02 19:25
〈지붕 뚫고 하이킥〉

〈지붕 뚫고 하이킥〉

처음엔 웃겨서 좋았다. 시간·장소 구애 없는 이순재의 방귀 소리에, 슬랩스틱 몸개그를 보여주는 황정음이라니. 한데 문화방송 (이하 )을 ‘닥본사’(닥치고 본방사수)하다 보니 김병욱 PD 시트콤만의 숨겨진 코드가 자꾸 읽힌다. 사소한 일상에 대한 불안과 불편함이다. 그는 웃기기만 잘하는 게 아니라 울리기도 잘했다. 가족 내 권력, 돈과 가난 이야기는 식모살이 하는 세경·신애 자매가 등장하면서 노골적인 계급 이야기로 팽창했다. 여기에 자옥이네 하숙집 이야기까지 보태지며 ‘대안 가족’ ‘88만원 세대’ 소재도 끼어든다. 사회를 압축해놓은 가족 시트콤은 장르와 세대를 아우르는 문제작이 됐다. 강명석 대중문화평론가는 “드라마와 시트콤, 류 코미디를 좋아하는 이들까지 모두 흡수하는 새로운 형식의 기승전결 블랙코미디인 ‘김병욱표 장르’가 탄생했다”고 말했다. 시청률 20%를 넘은 은 이제 100회(2월1일)를 향해 달려가는 중이다. 웃긴데 볼수록 불편한 ‘김병욱표 장르’에 사람들은 왜 열광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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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생 김윤경씨는 을 일종의 ‘종합선물세트’라고 설명한다. “유아발달 보고서인 , 노인들의 사랑을 그린 영화 , 양극화 시대를 다룬 다큐멘터리 , 중산층 가정을 비튼 영화 까지 장르와 세대를 불문하고 희로애락을 담은 ‘인생은 이것이다’ 같아요.”

‘본방사수’ ‘다시보기’ 하며 보는 에서 김윤경씨는 인생 공부를 한다. 가장 기억나는 에피소드는 해리가 신애를 괴롭히는 이야기. 세경이 장난감 없는 신애에게 종이박스 집을 만들어주자 질투가 난 해리가 이를 빼앗는다. 그러곤 자신이 종이박스에 숨어 누군가가 찾아주기를 기다리는데 가족들은 나 몰라라 한다. 김씨는 “종이박스를 뺏긴 신애보다 빼앗은 해리가 불쌍해 눈물이 났다”며 “뺏고 뺏어도 불안에 떠는 승자들의 탐욕과 고독을 동시에 발견한 기분이었다”고 했다. 의 욕심쟁이 미달이가 10여 년이 지나 의 외톨이 해리가 됐음을 발견한 순간이자, 김병욱 시트콤의 특별함이 보이는 에피소드다.

김병욱 PD는 예리한 사람 관찰자다. 비루한 일상이나 남들에게 보여주지 않는 삶의 모습을 묘사하고 풍자하는 솜씨가 기발하다. 그에게 가족은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우주다. 중산층 가정 내의 권력관계, 도시 빈민으로 전락할 백수 문제를 한 그릇에 담을 줄 안다. 시청자는 코미디라는 틀 안에서 돈과 계급이라는 처절한 문제를 실감하며 인생의 쓴맛을 삼킨다.

〈지붕 뚫고 하이킥〉

〈지붕 뚫고 하이킥〉

대중적인 가족 시트콤이지만 은 흔한 가족애가 없다. 대한민국 가정에서 대부분 경험하는 힘의 관계를 따라 충실하게 움직일 뿐이다. 김병욱 시트콤에선 언제나 일관된 캐릭터들이 비슷한 권력관계를 형성해왔다. 버릇없는 아이, 경제력을 갖춘 권력자 할아버지, 무능력한 아들이나 사위, 강한 엄마 캐릭터 따위다. 문화학 전공자인 대학원생 신정수씨는 “가족 내 권력관계에서 이순재는 경제력 때문에 뻔뻔하고, 현경은 하이킥을 제대로 날릴 줄 아는 ‘힘’의 소유자이기에 당당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힘과 돈의 약자인 사위 보석은 가족 먹이사슬의 최하에 있다.

‘김병욱 월드’에선 가족 문제 해결법도 독특하다. 순재는 가족들의 무관심을 ‘이순재 고사’로 깨려 하고, 식구들에게 무시와 면박을 당하는 보석은 상위 계급자로서 세경에게만은 무시받지 않으려고 기를 쓴다. 때론 식 게임이 임시방편으로 벌어진 관계를 이어주기도 한다. 지훈과 정음, 현경과 자옥이 조금이나마 가까워진 것도 각종 모임에서 함께한 장기자랑 덕분이다. 어이없고 황당해 보이지만 억지스러운 일은 아니다. 이영미 대중문화평론가는 “가족 문제를 극복할 때 바람직한 가족상을 보여줘야 한다는 짓눌림이 있는 일일 연속극과 달리 시트콤은 코미디여서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움이 있다”고 했다. 게이커뮤니티 친구사이 활동가인 기즈베씨는 그 점에서 자옥이네 집을 주목한다. “피붙이가 모여 사는 순재네에 따뜻함이 없는 대신 외국인을 포함한 여러 사람이 모여 사는 한옥집 자옥이네는 서로 도우며 사는 공동체 가족이 엿보인다”고 했다.

가족 시트콤에 가족애가 없다
김병욱 시트콤 속 캐릭터들은 모두가 주인공이다. 공동체 가족인 자옥이네 하숙집 식구들, 세경·신애 자매, 순재네 가족이 어울려 에피소드를 만든다. <씨네21> 오계옥 기자

김병욱 시트콤 속 캐릭터들은 모두가 주인공이다. 공동체 가족인 자옥이네 하숙집 식구들, 세경·신애 자매, 순재네 가족이 어울려 에피소드를 만든다. <씨네21> 오계옥 기자

김병욱 시트콤은 가족이 중심이지만 사회성도 놓치지 않아왔다. 전작에 견줘 드라마성이 강해진 은 이런 사회를 은유하는 상황도 늘었다. 에서 대통령과 검사들의 대화를 병원 사우회 문제로, 에서 이라크전을 패러디하며 월세가 밀린 콧수염 사내의 순댓국집을 영규가 쳐들어가는 에피소드로 그렸던 김병욱 PD는 에서도 돈과 권력이 얽힌 시대 문제를 놓치지 않는다. 어른들의 도박 중독처럼 인형 뽑기에 중독된 신애를 보여주고, 순재가 자옥에게 선물할 종이학 1만 마리를 접기 위해 청년백수·외국인 노동자·개성공단 노동자까지 등장시킨다. 보여주는 것 이상을 생각하게 만드는 김병욱의 시선은 언제나 상반된 가치를 함께 품어 웃기고 슬프다. 최지은 기자는 “이 프리즘이 되어 우리 세상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했다.

이렇게 냉담한 세상을 웃음으로 보여주는 김병욱 시트콤의 위력은 단연 캐릭터에서 나온다. 주인공과 감초 빼면 등장인물이 눈에 띄지 않는 드라마와 달리 김병욱 시트콤에선 모두가 주인공이다. 희화화됐지만 현실성 있는 캐릭터들이 관계하며 갈등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시청자마다 사랑하는 캐릭터도 달라진다. 영화평론가 듀나는 “혼자서 정극하는 신세경과 ‘괴물 아역’ 해리”를, 김중혁 소설가는 “때로는 무신경하고 가끔 거만하며 자기 일에만 몰두하지만 그래도 매력 있는 지훈”을, 시트콤 를 연출했던 김성덕 감독은 “이순재에게 당하기만 하는 찌질한 구박데기 정보석”을 좋아하는 캐릭터로 꼽는다.

세경은 식모살이를 벗어날까, 정음은 취업할까

김병욱 PD는 비슷한 캐릭터도 시대에 따라 다르게 만들어 보여준다. 같은 데릴사위여도 의 박영규가 짠돌이로 생활고에 시달렸다면, 에서 풍족하게 사는 정보석은 바이크에 대한 로망을 키우고 힙합으로 자유를 외친다. 가족주의를 탈피한 가족은 개인주의를 보여준다. 절대 권력자였던 의 야동순재는 에서 황혼 로맨스에 빠져 가족은 안중에도 없다. 김병욱의 캐릭터는 이렇게 반복되지만 시대성의 거울에 비추어 변주된다.

속 캐릭터들이 껴안은 사회문제는 100회를 향해 가는 지금도 무게감이 덜하지 않았다. 세경은 변함없이 가난하고, 정음은 취업을 못하고 있으며, 보석은 여전히 무시받는 가장이다. 준혁·세경, 지훈·정음이 만드는 사각 로맨스 안에서도 학벌과 신분 차이 등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받아쓰기 100점 맞은 신애가 과외 없이 중·고등학교에서 1등을 할 수 있을까? 세경은 식모살이를 벗어나 아빠와 함께 살며 도시 빈민 생활을 청산할 수 있을까? 서운대 정음은 취업도 하고 현경의 반대 없이 의사인 지훈과 결혼을 할 수 있을까? 가난이 죽도록 대물림되고 자본으로 인간이 계급화되는 사슬이 끊어지지 않는 이 땅에서 김병욱 시트콤은 말한다. 인생은 아름다운 게 아니라 빵꾸똥꾸라고.



팬픽·움짤·패러디 폭발 중
“안 보면 왕따 돼요”



타닥, 타닥, 키보드를 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시청자 의견란이 레알(진짜) 맞나요?” 의견란에 쓰면 실제 에피소드에 반영이 되는 건지 묻는 누군가의 질문이 올라오기 무섭게 “준혁·세경 커플 지지” “준혁이 불쌍해서 어째요?ㅜㅜ” “작가님, 이 글 좀 봐주세요” 따위 의견이 시청자 게시판을 빠르게 채운다.
(이하 ) 방영이 끝나는 저녁 8시께, 준혁·세경 커플(준세 커플), 지훈·정음 커플(지정 커플)에 관한 에피소드가 나온 날이면 각종 커뮤니티 사이트의 드라마 게시판이 불을 뿜는다. 시트콤은 끝나도 인터넷 속 시트콤 이야기는 네버엔딩이다. 결말 예측, 지지하는 캐릭터에 대한 응원, 에피소드에 대한 항의까지 을 즐기는 드라마 팬심이 인터넷에서 출렁인다. 팬픽, 움짤(움직이는 짤방), 패러디 따위는 이들이 드라마를 즐기는 또 다른 방법. 지정 커플이 잘되길 응원하는 이들은 ‘정음이 힘들어 보일 때 지훈이 그냥 아무 말 없이 꽉 안아주기’ ‘정음이가 지훈네 식구들과 같이 밥 먹다가 지훈과 달달하고 따뜻한 눈빛 교환하기’처럼 자신이 보고 싶은 에피소드를 정리해 올리기도 한다. 어린 준세 커플과 달리 지정 커플이 등장하는 팬픽은 노출 수위도 아슬아슬하다.
초등학생 내윤혜(12)양도 의 열혈 시청자다. 본방 사수를 위해 학원이 끝나면 서둘러 집으로 달려오고, ‘다시보기’로 그날 방영분을 5번 이상 돌려본다. 사인회도 가고 팬카페 운영도 해봤다. 윤혜양은 “시트콤이 재밌어서 김병욱 PD의 이전 작품인 (이하 ), 도 다시보기로 모두 봤다”며 “김병욱 PD의 팬”이라고 했다. 재수생 구지현(19)양도 에 이어 네이버 공식 팬카페의 카페지기로 활동 중이다. “소소한 일상에서 나오는 웃음이 김 PD의 장점”이라고 꼽는 그는 “을 보지 않으면 친구들 사이에서 왕따 취급당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같은 김 PD 작품이라도 과 의 팬카페 분위기가 다를까? “ 때는 정일우·김범과 관련된 게시물이 많았고, 은 준혁(윤시윤)과 세호(이기광)의 글과 사진이 많아요.” 이 ‘야동순재’ ‘식신준하’ 등 캐릭터 네이밍에 몰입했다면 은 러브라인을 톺아보는 ‘지정가이드’ 등이 쏟아진다. 강명석 대중문화평론가는 “김병욱 PD의 시트콤 중 팬덤이 가장 심했던 건 사각 러브라인에 예민하게 반응한 이었다”며 “이전과 달리 은 캐릭터들이 골고루 사랑받으며 안티 없이 호감으로 이야기를 따라가는 분위기”라고 변화를 짚었다.


김병욱 PD 인터뷰
“슬픈 이야기를 하는 게 코미디보다 즐겁다”


김병욱 PD. <씨네21> 오계옥 기자

김병욱 PD. <씨네21> 오계옥 기자

‘시트콤의 명장’ 김병욱 PD에게 지금 가장 절실한 건 시간이다. 잠자고 밥 먹을 시간에도 대본을 고치느라 바쁜 그에게 여유 시간은 촬영장으로 이동할 때뿐이다. 지난 1월7일, 운전 중인 그와 30분 남짓 전화 인터뷰를 했다. 터널을 지나고 주유소에 들르느라 전화는 세 번이나 끊어졌지만 다행히 교통체증이 모처럼의 인터뷰 시간을 이어줬다.
- 어느덧 (이하 )이 100회(2월1일)를 앞두고 있다. 소감은?
= 하루하루 일용할 양식을 구하느라 바빠 소감이랄 게 없다. 무사히 연장 방영분(130회)까지 끝내는 게 유일한 바람이다.
- 매 작품 ‘초치기’를 하는 상황이다. 시스템 변화를 줄 수 없나.
= 일일 시트콤은 한 회에 2개의 에피소드를 담아 5일을 방영한다. 이어지는 이야기가 있어도 적어도 한 주에 새로운 소재 7~8개가 필요하다. 또 여러 작가가 공동 창작을 하니까 작품을 균질하게 만들 조정자가 필요하다. 직접 손대지 않은 작품은 콘티를 짜지 못하는 내 성향이 이 조정자 역할까지 자처하면서 시간에 쫓기고 있다. 45회까지는 어느 정도 자신 있었는데, 이후에는 버리는 에피소드가 어쩔 수 없이 발생한다.
- 캐릭터나 에피소드들이 전작과 비슷하다는 지적도 있다.
= 동어반복이 심한 게 내 한계다. 홍상수 감독 영화를 좋아하는데 를 보다가 이 사람의 한계를 사랑하기가 힘들어 (관객이) 떨어져나가나 보다라는 생각을 했다. 이번 작품은 멜로라인을 강조하며 물갈이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코미디를 기대한 분들에게 탐탁지 않았을 거다. 사실 예전 같은 코미디를 하는 게 내 우울증 탓에 즐겁지 않다. 세경이의 슬픈 이야기를 하는 게 때의 코미디를 만드는 것보다 즐겁다.
- 에 만족한다는 얘기인가.
= 이전과 달리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다. 계급 갈등에 관심이 많아서가 아니라 사회인이니까 가질 수 있는 생각들을 풀어놓는다. 때부터 하고 싶은 이야기가 신애의 ‘장래희망’ 에피소드에 들어있다. 우리 사회는 열린 사회라지만 열린 사회가 아니다. 언니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신애가 세경이처럼 될 가능성이 더 크지 않나. 가진 자(이순재)가 없는 자(세경)에게 절약을 강조하는 에피소드도 우리 사회 지도층의 이야기일 수 있다. 내가 희망적이지 않은 세계관을 가져서 그런지 이런 이야기를 만드는 게 보다 더 좋다.
- 사각 멜로라인에 시청자의 관심이 높다.
= 결말과 도킹이 잘될지 모르겠다. 계급에 대한 이야기뿐 아니라 이 멜로라인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자기도 잘 모르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불같은 사랑이 아니라 얇은 이야기 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감정의 모호함을 보여주고 싶었다. 시간에 쫓겨 다 보여줄 수 있을지 걱정이다.
- 작품을 끝낼 때마다 시트콤을 그만 만들겠다고 했는데 이번에도 혹시?
= 시트콤의 운명은 뜬 배우를 다시 만나기 어렵다는 점이다. 발굴한 신인이 스타가 돼 떠나고 나면 상실감이 크다. 학기말을 맞는 선생님의 마음처럼 슬프다. 육체적으로 힘든 것도 싫지만 그런 상실감과 허무감이 커서 시트콤을 그만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태껏처럼 2년 정도 시간이 지나면 치유돼 작품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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