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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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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똥덩어리

죽음과 항문기가 등장하는 반자본주의 에세이,
베르나르 마리스의 <케인즈는 왜 프로이트를 숭배했을까?>
등록 2010-01-15 16:48 수정 2020-05-03 04:25
〈케인즈는 왜 프로이트를 숭배했을까?〉

〈케인즈는 왜 프로이트를 숭배했을까?〉

“인간은 사실 서른 살이 넘으면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다. 최선은 적당한 시기에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괴테) “삶의 유용함은 그 길이가 아니라 용도에 있다. 즉 요절한 사람이 외려 오래 살았다고 할 수 있다.”(몽테뉴)

(창비 펴냄)를 지은 베르나르 마리스는 프랑스 파리8대학 경제학 교수이자 저널리스트다. 그가 지은 이 책은 경제서다. 그런데 ‘시간과 죽음’이 책의 맨 처음에 등장한다. 어떻게 경제는 죽음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인간이 평균적으로 지구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수명은 자본주의의 승리의 지표처럼 보인다. 기대수명의 상승은 1살 미만 영아사망률의 급격한 감소 덕분이다. 어린아이들이 더 이상 죽어가지 않는다는 사실은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일이다. 하지만 이를 ‘진보’라고 할 수 있을까. 자본주의 시스템에 종속된 사람들은 공포에 시달리며 살아가고 있다. 자본주의가 제시하는 이상한 제안 속으로 녹아들어간 결과다. 그렇게 하여 얻어걸린 것이 긴 수명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단언한다. “이는 파우스트적인 계약이라고 할 수 있는데, 소위 죽음에 대한 승리와 자신의 노동 및 공포를 맞바꾼 것이다.” 프로이트는 말했다. “삶이 피곤하고 즐거움은 적고 고통이 가득하여 죽음이 오히려 구원으로 여겨진다면 긴 생이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 자본주의 사회에서 죽음은 ‘질병’으로 치환되었고, 연장된 7.5년의 시간은 질병에 시달리며 죽음과 결전을 치르는 오만한 시간이 되었다.

죽음에 대한 승리와 맞바꾼 공포

저자가 경제라는 2차원 평면에 시간이라는 3차원 축을 하나 더해 얻어낸 것은 입체적 인간의 삶이다. 저자는 입체적으로 또박또박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반박을 해나간다.

예를 들면 특허권이라는 문제가 있다. 의약품의 특허권을 거대 자본이 보호하기 시작하면서, 그 엄청난 가격을 지불하지 못하는 가난한 이들이 죽어가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일어난다. 저작권도 비슷하다. 특허권과 저작권은 ‘지적재산권’으로 묶인다. “아이디어는 특허를 받을 수 없다.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기 위한 기술적 수단만이 특허가 가능하다”라는 논리에 따라 특허권에서 밀려난 아이디어를 보장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저작권이다. 버터 자르는 실에 대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 수준에서는 특허가 되지 않는데, 이 아이디어를 글로 적어놓고는 자본의 힘을 빌려 보호하는 것이 저작권이다.

저작권이 자본주의 시스템 내로 들어가자, 저작자마저도 권리로부터 소외되는 일이 생겨난다. 노벨의학상 수상자 해럴드 바머스가 논문 출판 6개월 뒤 온라인에 자료를 공개하라고 출판사에 요구하자 출판사는 거절했다. ‘도서관 죽돌이’로 지내는 학자들은 학술지에 거의 무상으로 논문을 제공하고, 이 논문은 학술지로 묶여 도서관만 살 수 있는 비싼 가격에 팔린다. 2000년 프랑스에서 출판사들은 도서관이 불공정한 경쟁을 하고 있다며 책 대여세를 물리려 했다. 공공재에 ‘소유권’을 부여하면서 발전하기 시작한 자본주의로서는 더 눈이 벌게서 새로운 ‘권리’를 찾아헤맬 것이다. 그것이 자본주의의 운명이다.

금과 화폐는 모두 ‘항문적’

경제학에서 출발해 인간의 삶을 입체적으로 구성하는 것은 책 제목의 ‘케인즈와 프로이트’ 결합에서 분명해진다. 1920년대 케인스는 을 준비하던 시기, 프로이트를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했다. 그의 책에는 콤플렉스, 리비도, 우울 같은 프로이트 용어가 가득하다. 프로이트의 돈에 대한 성찰은 케인스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프로이트 이론에 따르면, 금과 화폐는 모두 ‘항문적’(발음대로 쓴 것 아님)이다. 비약하자면 자본주의 경제학은 학문이 아니라 항문이다. 여기 다시 죽음도 등장한다. 프로이트는 에서 물신이란 삶에서 가장 위협적인 것인 죽음까지도 부정하는 수단이라고 말한다. 죽는 것도 모르고 똥물에 빠져 흐느적거리는 가련한 자본주의 시민에게는 어떤 구제가 있는 것일까. 비관적이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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