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10년 전이었다. ‘하루키 신작 판권 따기… 출판사의 출혈 경쟁’( 1999년 5월22일)이 신문의 제목으로 뽑혔다. 당시 을 두고 12~13곳의 출판사가 출간 경쟁을 벌였다. 선인세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하루키의 책을 가장 많이 펴낸 문학사상사와 열림원이 3만달러를 제시하고도 탈락해 화제가 되었다. 2009년 6월19일 입찰을 마감한 에서도 그대로 반복된 데자뷔다.
1999년 의 데자뷔
을 계기로 열림원은 하루키 작품 출간을 포기한다. 당시 열림원 편집장이었던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는 “이전의 저작권을 정리해 정식 계약을 체결해서 하루키 전집을 꾸몄다”며 “신작에 대한 우선권이 주어질 것으로 예상했는데 아니어서 실망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열림원은 앞서 1997년부터 정식 저작권 계약을 맺어 하루키의 데뷔작인 부터 까지 11종 12권을 출간했다.
이후 5년 단위로 갱신되는 계약의 대부분은 문학사상사로 넘어갔다. 문학사상사는 그 뒤 하루키의 공식 파트너의 자리를 확고히 했다. 역시 오픈(입찰 방식)으로 진행된 계약도 문학사상사의 파트너십이 인정된 결과로, 최고가가 아님에도 판권이 주어졌다. 선인세는 3억원 수준이라고 알려져 있다.
2009년 하루키의 신작 는 10년 만에 소설로서는 처음으로 문학사상사가 아닌 출판사에서 판권을 가져갔다. 이번 선인세는 10년 전과 자릿수가 다르다. 낙점된 문학동네가 지불하는 선인세는 8천만엔(약 10억원) 수준으로 알려졌다. 의 손익분기점은 당시 10만 권이었다. 는 1~2권 각각 30만 권이 분기점이다. 은 자유문학사에서 신속하게 출간되었다. 계약이 알려진 한 달 뒤 책으로 나왔다. 의 1권은 입찰 마감 두 달 뒤인 8월25일 발행될 예정이다.
논란은 차치하고 이런 ‘출혈 경쟁’은 하루키가 한국에서 지닌 경쟁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소개된 지 20년 동안 하루키는 최고의 해외작가의 지위를 누렸다(단일 작품만 따지면 지난해 댄 브라운의 신작 가 100만달러에 계약된 것으로 알려져 최고가다). 하루키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그에 영향을 받은 문단도 몸살을 몇 번 앓았다. 하루키와 문단의 애증관계는 문제적이다.
첫 번째 논란은 1992년의 표절 논란이다. 당시 연속으로 나온 이인화의 (1992년 3월), 박일문의 (1992년 6월), 주인석의 (1992년 7월), 장정일의 (1992년 8월) 등이 논란을 점화했다. 장정일은 같은 해 7·8호 합본호에 ‘표절의 세 가지 층위에 관해서’라는 글을 발표해 이 하루키를 표절한 ‘무뇌아적 해프닝’이라고 주장했고, 박일문은 이에 맞대응해 장정일과 발행인을 고소하기도 했다. 장정일은 자신의 이런 경험을 녹여 (1993년)를 썼다. 소설은 꿈을 꾼 내용을 소설로 써 신춘문예에 당선되지만 결국 표절 혐의로 취소되는 ‘나’와, 같은 꿈을 꾸었다고 찾아오는 ‘바지 입은 여자’의 이야기다. 이인화는 ‘패스티시’(혼성모방)라는 ‘기존의 질서를 짜집기해 창작하는 수법’으로 자신의 작품을 옹호했다. 이인화는 다음 작품인 에서 작품의 모티브와 인용 출처를 밝히는 후기를 수록하기도 했다. 오늘의 문학상(), 작가세계 문학상() 등 문학상을 휩쓴 작품들, 그리고 ‘젊은’ 작가의 작품들이 한꺼번에 ‘하루키를 닮았다’란 시비에 휘말린 것이다.
신세대 담론을 견인한 장본인해당 소설들은 ‘신세대 담론’과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을 불러일으킨 중요한 작품이기도 하다. 1990년대 신세대들은 새롭게 등장한 작품들에 열광했고 은 40만 부가 팔렸다. 시인 장석주는 “1989년 처음 하루키를 봤을 때 얼리어답터들은 정말 새롭다, 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우리 문학 역시 이 방향으로 갈 것이다, 거대담론이 소멸하고 일상·자아·욕망·사랑·성을 다루는 방향으로 갈 것이다, 그리고 그 모델이 하루키가 될 것이다라고 이야기를 나누던 기억이 난다”고 말한다. “구효서, 윤대녕, 장정일 등 새롭게 등장한 소설들이 실제로 그러했다. 가 회고하는 상황이 한국과 흡사했다. 우리 작가들이 그런 대중 의식의 변화, 정서의 변화를 선점당했다.” 작가들은 준비가 돼 있지 않았고, 자신의 이야기로 느낄 만한 작품은 이미 완벽한 형태로 나와 있었다. 하루키는 신세대 담론을 견인한 장본인이다.
하루키에 대한 두번째 비평적 논란은 1997년 후반 일본 문학의 부흥과 엮여 집중적으로 이루어진다. 남진우는 1997년 여름호에 발표한 글 ‘오르페우스의 귀환’을 통해 “젊은 작가들의 상당수가 음으로 양으로 하루키에게 많은 부분 빚지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면서 윤대녕·이응준이 하루키의 창조적 변용을 이뤄냈다고 평가한 뒤, 재능 있는 작가마저 그를 따라 하는 현실에 대해 ‘서글픔’을 토로했다. 한기는 ‘한국 문학 속의 일본 문학’(, 1997년 가을호)에서 왕자웨이의 한국 관객 수용과 하루키의 한국 독자 수용을 비교했다. 하루키가 동시대적인 보편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과 작가들에게서 호응을 얻고 있지만, 이러한 90년대적 특성은 ‘의식은 없고 제스처만 있다’고 비판한다.
2000년대까지도 하루키 문학의 문학성을 둘러싼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유종호는 ‘문화의 전략-무라카미 현상을 놓고’( 2006년 6월호)에서 하루키를 호되게 질타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청년기는 좌절 경험을 안겨주고 미래 전망 또한 불투명한 불안과 방황의 계절이다. 그러한 불안의 계절에 가벼운 우울증을 앓고 있는 심약한 청년들에게 이 책은 마약과 같이 단기간의 안이한 위로를 제공해줄 것이다. 우리 모두가 죽음과 실패와 허무 앞에서 평등하다는 생각은 적지 않은 위안을 안겨줄 것이기 때문이다. 약삭빠른 글장수의 책이지 결코 예술가의 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본 바로는 은 고급문학의 죽음을 재촉하는 허드레 대중문학이다.” ‘허드레’라는 표현을 그는 한 번 더 반복한다.
박민규와 하루키 사이이에 대해 조영일은 ‘비평의 빈곤: 유종호와 하루키’( 2006년 가을호)에서 유종호가 시대적 변화는 인정하면서도 문학적 변화는 전혀 인정하지 않고, ‘고급문화 대 대중문화’라는 구분을 깔고 논리를 전개하고 있음을 비판한다. 조영일은 “오늘날의 작가들도 하루키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90년대 작가들이 하루키에 의식적인 영향을 받았다면 2000년대 작가는 내면화가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그런데 묘한 것은 젊은 작가들이 하루키를 인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2006년 9월 에서 실시한 30대 문인 설문조사(평론가 30명, 소설가 30명, 시인 35명)에서 가장 과대평가된 해외 작가로 하루키가 지목되기도 했다(19명). 조영일은 “하지만 한국에서 하루키가 제대로 평가를 받은 적도 없다”며 “평론가 중에서도 하루키를 언급한 적은 있지만 애정 고백이었지 본격적인 평은 아니었다. 박민규·김애란 등 젊은 작가들에 대해 높이 평가하면서 그의 원조 격인 하루키는 폄하하는 것은 같은 비평관 내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하루키는 여전히 한국 문학에서 ‘목의 가시 같은 문제적 존재’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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