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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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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익숙한 퇴락

맨얼굴의 미국을 찾아 떠난 소설가 유재현의 두 달…
“미국이 아니라 미국화를 완성한 우리 자신과 싸워야”
등록 2009-06-18 11:37 수정 2020-05-03 04:25
〈거꾸로 달리는 미국〉

〈거꾸로 달리는 미국〉


유재현 지음, 그린비 펴냄, 1만8900원

나이 쉰여덟에 찰리라는 푸들 한 마리를 조수석에 태우고 여행용으로 개조한 트럭을 몰아 미국 전역을 돌아다닌 존 스타인벡이 1962년에 낸 에서 이렇게 썼다.

“미국에 관해서 글을 쓰는 작가이지만 나는 실은 기억에만 의존해왔다. 그런데 기억이란 기껏해야 결점과 왜곡투성이의 밑천일 뿐이다. 나는 참된 미국의 언어를 듣지 못하고 미국의 풀과 나무와 시궁창이 풍기는 냄새를 모르고, 그 산과 물, 또 일광의 빛깔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유재현의 미국사회 기행’이라는 부제가 붙은 에서 이 글을 인용한 소설가 유재현이 바로 그 심정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무려 서른 번 이상 미국을 들락거렸다. 당연히 누구보다 미국이란 나라에 대해 좀 안다고 자부할 만도 했겠으나, 와 에서 먼지 이는 중서부 미국땅을 실감나게 그렸던 스타인벡조차 다시 찾아나섰던 ‘참된 미국’, 맨얼굴의 미국을 그도 다시 확인해보고 싶었던지 자동차 한 대에 몸을 싣고 떠났다. 62일간 서부 로스앤젤레스에서 샌프란시스코 방향으로 올라가 캐나다 밴쿠버까지 간 다음 다시 비스듬히 내려와 미국 대륙 중앙을 가로질러 동북부로 간 뒤 다시 남하해서 플로리다를 돌고 서진하다 멕시코까지 건너가고 마침내 출발지 캘리포니아의 이웃 네바다 라스베이거스와 후버댐까지, 미국 거의 전역을 홀로 일주했다. 책 앞쪽 미국 지도 위에 종횡으로 그려넣은 그의 답사 행적을 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하다.

두 달여의 기간마저 충분한 시간이라고 할 순 없겠지만, 그냥 스쳐지나가는 단순한 자동차 여행은 결코 아니었다. 쿠바나 멕시코, 팔레스타인, 동남아시아 등 그가 써낸 기왕의 지구촌 기행들도 그랬거니와 그의 여행기에는 초지일관 변함 없는 그만의 세상보는 눈이 날카롭게 관통하고 있고, 거기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박식한 인문학적 내공과 쉼 없는 공부가 생생한 현장실사를 뒷받침하고 있다.

2007년에 그렇게 돌고, 버락 오바마 민주당 정권 출범 뒤 2009년 초의 바뀐 현장 분위기까지 반영한 은 제목이 암시하듯 밝은 색깔이 아니다. “제국은 탐욕과 전쟁, 인종주의의 신음과 우민화, 민주주의에 대한 조롱과 염증, 만성적인 역사 왜곡, 팽창해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중산층의 허위의식과 이기심, 기층의 무기력, 오래된 패권의 피로가 충만했다.” 그것을 그는 ‘기억’이 아니라 ‘풀과 나무와 시궁창이 풍기는 냄새’ 속에서, 그리고 땀내 나는 인간과 그들의 삶터에서 직접 확인했다. 그리고 그 다음 말이 또한 인상적이다. “별로 새로울 것은 없었다. 그건 우리가 이미 미니어처로 주머니 속에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종류였으니까.”

그에게 퇴락한 미국 풍경이 ‘별 새로울 게 없었던’ 이유는 그 퇴락의 깊이와 너비가 별것 아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우리가 이미 우리 일상에서 체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은이가 보기에 ‘아메리칸 드림’이 상징하는 ‘미국을 향한 욕망’, 소비주의가 판치는 미국처럼 되고 싶은 욕망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모순은 전세계적 차원에서 재생산되며 수많은 유사 미국(Pseudo-America)을 만들어내고 있다. “미국은 특정한 지역이나 국가가 아닌 우리 세계 전체에 투영돼 있는 존재”이며, 미국을 극복해야 한다면 그것은 “미국이 아닌 세계의 내부, 우리의 내부에 각인돼 있는 미국을 극복해야” 비로소 가능하다. 특히 “지난 20년 동안 빠르게 유사 미국의 단계에 진입한 남한의 경우” 더욱 그렇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부득이 미국을 이해해야 하는 현실에 직면하고 있으며, 따라서 “미국을 향해 손가락질하기 전에 우리는 그 손가락 끝을 우리 자신에게로 먼저 돌려야”하며 “미국이 아니라 이미 미국화를 완성한 우리 자신과 싸워야 한다.” 현장답사를 거친 유재현의 이런 결론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지, 궁금하지 않은가.

한승동 한겨레 선임기자 sdhan@hani.co.kr

* 2009년 6월13일치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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