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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만에 간 도쿄, 한류는 어디에

2003년 8월과 2008년 12월 출장에서 피부로 느낀 한류 하강세, 기로에 선 ‘한국바람’
등록 2008-12-31 07:39 수정 2020-05-02 19:25

2003년 8월에는 분명히 있었다. 기자는 갓 시작되던 일본의 한류 현상을 취재하기 위해 도쿄를 찾았다. 젊음의 거리 시부야의 ‘쓰타야 레코드’ 입구에는 보아의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매장 안팎으로는 보아의 가 계속 울려퍼지고 있었다.
도쿄 최대 서점인 기노쿠니야의 신주쿠 본점에선 ‘한국 영화가 뜨겁다’라는 특집 코너를 운영하고 있었다. 기노쿠니야의 DVD 매장에선 갓 발매된 (일본명 ) DVD 특집 코너를 운영하고 있었다. 너비 4m는 될 듯한 매대 하나를 통째로 로 채우고 있었다. 도쿄 10대들의 천국인 하라주쿠 골목의 브로마이드 매장에는 배용준과 최지우, 장동건과 원빈 그리고 신화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뚝 끊긴 발길.’ 드라마 <겨울연가>의 촬영지 중 하나인 강원 춘천시 ‘준상이네 집’. 최근 일본 관광객이 찾지 않으면서 한산한 모습이다. 연합

‘뚝 끊긴 발길.’ 드라마 <겨울연가>의 촬영지 중 하나인 강원 춘천시 ‘준상이네 집’. 최근 일본 관광객이 찾지 않으면서 한산한 모습이다. 연합

팬미팅·패키지… “뻔한 상술 질린다”

5년 만에 다시 찾은 그 골목과 장소들에선 한류 콘텐츠들이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2003년 당시 기노쿠니야 CD 매장의 매대 하나를 차지하고 있던 한국 가요(K-POP) 코너는 한 뼘 크기의 한 줄로 줄어 있었다. 동방신기와 빅뱅 그리고 박용하의 CD가 전부였다. 보아는 올해 중반부터 활동무대를 미국으로 옮긴 상태다. 하라주쿠의 브로마이드 매장에선 유일하게 ‘팔리는’ 배용준 사진만 걸려 있었다.

이유가 뭘까. 현지에서 만난 일본인들과 한국인들은 모두 ‘악덕 상혼’을 이야기했다. 일본인 관광객 가이드 생활을 8년째 해오고 있는 이재은(37)씨는 “기획사와 여행사가 일부 한류 스타들의 뻔한 스토리의 팬미팅을 1만5천~2만엔(22만~30만원)씩 받고 계속 판매하고 있다”며 “부실한 내용에 질린 이들의 마음이 떠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열혈 한류팬이었던 가에코의 이야기. “팬미팅이라고 가보면 이벤트로 노래 몇 곡과 춤솜씨를 보여주고, 그간 일본과 한국에서의 활동을 동영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꼭 자신의 어머니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짓는다. 그때 팬미팅에 참석한 40~50대 여성들은 모두 같이 울게 마련이다. 그리고 당첨된 몇몇 팬들이 앞에 나가 포옹을 하거나 사진을 찍는다. 이게 끝이다. 딱 1시간30분 정도다. 이런 내용이 해마다 똑같이 반복되니까 1만5천엔이나 주고 참석할 이유를 못 느낀다.”

엔화 강세로 한국 여행은 늘어

일본 내에서는 배용준이나 조인성, 비 등과 같은 한류 스타들의 행사를 고가의 여행 패키지로 꾸며 판매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문제는 한류 스타들이 마련한 행사가 사실 무료 행사고, 여행사들은 이 행사의 표도 구하지 않고 판매부터 한다는 것이다. 12월23일 열린 가수 비의 브랜드 론칭 콘서트가 대표적이다. 이날 행사장 앞에서는 일본인 관광객 150여 명이 주최 쪽에 항의하는 소동을 빚었다. 이유는 이 콘서트 여행상품을 기획한 한국 여행사가 표도 구하지 않은 상태에서 상품을 판매해 참석한 일본인들이 콘서트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여행 프로그램의 가격은 14만엔, 현재 환율로 따지면 200만원이 넘는 고액의 여행 프로그램이다. 2박3일의 프로그램에는 이 콘서트 참여 이외에는 별도의 일정이 없었다고 한다.

도쿄에서 한류의 교두보 역할을 해왔던 에이전시 업체 ‘니칸브레인’의 허한조 사장은 “이곳의 ‘한국 바람’은 지금 기로에 서 있다”고 말한다. “한국 스타들은 일본에서 인기가 있다고 한번 휙 와서 인터뷰하고 가면 끝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는 생명을 지킬 수 없다.”

그래도 한류는 있다. 12월16일 밤 10시 〈NHK〉에선 드라마 이 방영되고 있었다. 〈TV아사히〉는 아침과 저녁을 가리지 않고 아사다 마오와 숙명의 한판 승부를 벌인 김연아의 이야기를 다뤘다. 기자가 우연히 들른 도쿄 외곽의 다마치역에서도 어렵지 않게 한국 식당을 만날 수 있었다. 한국 식당은 신주쿠나 신오쿠보, 우에노 등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곳에서 주로 영업을 해왔는데, 이제 도쿄 전 지역으로 퍼져나갔다는 것이 현지에서 만난 한국인들의 이야기였다.

문화콘텐츠 에이전시인 브레인즈 네트워크의 안성민 사장은 “노래나 드라마 등 대중문화 측면에서만 보면 한류는 분명히 마니아 시장으로 위축됐지만, 음식이나 패션 등 생활 속에서는 한류가 더 깊고 풍부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유가 뭘까. 바로 한국 여행이다. 사실 2002~2003년 시작된 한류 열풍의 근원도 한국 여행이었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를 정면으로 맞은 원화는 반토막이 났고, 일본에서는 1만5천엔부터 시작하는 염가 한국 여행 상품이 줄을 이었다.

일본에서 만난 한 여행업체 사장의 이야기. “그때 주고객은 대학생과 직장여성들이었다. 1만5천엔 정도에 2박3일을 진행하려면 대중적인 먹을거리를 꼭 넣어야 했다. 순대와 곱창, 지짐 등을 넣은 것은 가격을 낮추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그런데 그 시점에 일본에서 여성들 사이에서 콜라겐 바람이 불었다. 피부에 좋다는 소문 덕분이었다. 우리는 곱창을 먹이면서 콜라겐이 가장 많이 들어간 먹을거리라고 소개했고, 일본 여성들도 거부감을 없애고 먹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부대찌개와 감자탕, 심지어는 곰장어구이 전문점까지 만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저변 확대 덕분이다.

“일본 중·장년층 소외 등 구조 이해해야”

IMF로부터 11년, 우울한 사실이지만 엔화 대비 원화는 1500원대로 10년 내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다. 일본에서는 때맞춰 한국 여행 바람이 불고 있다. 도쿄의 여행사를 들를 때마다 최저 2만5천엔부터 시작하는 한국 여행 패키지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최근의 흐름은 한국을 찾지 않던 50~70대 장년 남성들이 한국 여행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라고 현지 여행 관계자들은 말했다.

안성민 사장의 이야기. “일본의 문화구조를 이해하면 한류를 지속시킬 방법을 알 수 있다. 일본 방송은 10대와 20대만을 위한 방송, 특히 드라마를 주로 만들기 때문에 30대 이상의 성인들이 볼 드라마가 없다. 이들이 한국 드라마에 열광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일본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일본에서 제2의 거센 한류 바람이 부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이태희 기자 herme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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