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떴다. ‘발호세’의 ‘노바디’다! 부연 설명을 하자면, 호세(박재정)는 한국방송 의 남자 주인공 이름이고, 여기에 ‘발연기’(발로 하는 것처럼 못하는 연기)를 뜻하는 ‘발’이 붙어 ‘발호세’다. 박재정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만큼 호세를 연기하는 박재정의 연기는 극단적으로 어색하다. 실수로 컵을 떨어뜨리는 연기를 할 때는 일부러 컵을 쳐서 떨어뜨리는 게 눈에 보이고, 주먹에 맞아 쓰러질 때면 일단 맞은 뒤 ‘시차’를 두고 쓰러진다. 박재정의 연기는 사용자제작콘텐츠(UCC)를 통해 어느새 인터넷의 ‘구경거리’가 됐고, 급기야 박재정이 에서 원더걸스의 ‘노바디’ 춤을 춘다는 소식은 네티즌들을 ‘열광’시켰다. 배우가 연기를 너무 못해서 ‘DJ 쿠’나 ‘전스틴’ 같은 UCC 캐릭터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현상을 박재정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박재정이 연기를 잘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가 한국방송 에 출연했을 당시의 연기는 지금만큼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요즘 박재정의 연기가 이상한 건 이 그에게 끊임없이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을 연기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이다. 박재정은 아내인 새벽을 위해 ‘노바디’ 춤을 추거나 온 집안을 풍선으로 장식한 뒤 등에 날개를 달고 노래를 하고, 화난 어머니를 위해서는 “제가 좀 맞아야 해요 에잇! 에잇!” 하며 머리를 때린 뒤 “사랑합니다”라며 하트를 그린다. 박재정은 평범한 한국인이 경험하기 힘든 상황을 연기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비현실적인 것은 의 시청률이 40%대에 육박한다는 것이다. 40% 가까운 시청자들은 배우의 연기력에 심각한 문제가 있어도, 연장 방영과 함께 드라마에서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던 새벽의 생모가 갑자기 나타나도 이 드라마를 본다.
이는 한국 드라마의 불길한 징후다. 이 ‘발호세’를 탄생시키는 동안 문화방송 은 이연희에게 “난 슬플 땐 학춤을 춰”라는 대사를 읊게 했고, SBS 은 시작부터 은재(장서희)의 친구 애리(김서형)가 은재의 남편 교빈과 불륜을 저질러 아이를 낳는다. 이 드라마들은 모두 동시간대 최고 시청률을 기록 중이고, 그전에는 SBS 이나 문화방송 처럼 숱한 비난 속에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가 있었다.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 혹은 ‘막장 드라마’가 드라마 업계의 대세가 된 것이다. 이 건강 악화로 물러난 나연숙 작가 대신 문화방송 아침 드라마 의 이홍구 작가를 선택한 것은 상징적이다. 출생의 비밀과 선악 구도라는 진부한 구성의 에는, 악녀가 결국 재벌 회장인 시아버지를 죽이고 그 뒤 시아버지의 환영을 보고 괴로워하는 ‘막장의 끝’을 보여준 의 작가가 어울린다. 자극적일수록 시청률이 높은 아침 드라마의 문법이 프라임 타임의 드라마에까지 진출한 것이다.
이런 현상은 드라마에 대한 최소한의 고민마저 지워버린 제작사와 시청자의 합작품이다. 이 잘 보여주듯, 이런 작품에는 주연 배우의 좋은 연기나 개연성 있는 스토리가 없다. 대신 적나라한 욕망이 드라마를 움직인다. 과 , 은 모두 여주인공이 부유한 남자와 결혼하거나, 악녀가 그 자리를 빼앗는다. 은 이를 동철(송승헌)과 동욱(연정훈) 형제의 성공담으로 바꾸었을 뿐이다. 또한 은 목숨을 줘도 아깝지 않을 동생, 혹은 자식이 사실은 원수의 아들이라는 설정에서 시작되고, 에서 새벽은 지금의 부모에게 입양됐다는 이유로 호세의 어머니에게 미움을 받는다. 새벽과 호세 어머니의 갈등은 그에게 부유한 친어머니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뒤에야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다.
이 ‘막장 드라마’들은 신분상승과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에 대한 집착을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좋은 연기나 스토리로 승부하는 대신 시청자의 욕망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호세가 ‘발호세’가 되고, 과거 문화방송 에서는 나름의 연기 발전을 보여줬던 김남진이 에서 불안한 연기력을 보여준 건 이런 드라마의 구조적인 문제가 낳은 결과다. 여주인공의 신분상승을 이뤄주는 남자로 묘사되는 이들은 내면을 가진 인간이 아닌 욕망의 대상이고, 그렇기 때문에 갑자기 춤을 추든, 비현실적인 사랑 고백을 하든 시청자의 바람을 만족시켜야 한다. 물론 이래야 시청률이 잘 나온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현재를 위해 미래를 희생시키는 일이다.
자식 세대를 왜 이리 힘들게 하나이 드라마들은 한결같이 40대 이상이 주 시청자층이다. 다매체 환경으로 전반적인 시청률이 낮아지면서, 여전히 TV 시청 시간이 많고 경제 불황에 따른 취업대란으로 20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소비력을 유지하는 이들이 드라마 시장을 지탱하는 소비자가 됐다. 그리고 ‘막장 드라마’는 그들이 은근히 가져왔던 욕망들을 노골적으로 해소해준다. 이 ‘막장의 세계’에서 같은 신분상승의 판타지, 같은 핏줄에 대한 집착이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권력에 대한 욕망, 나 처럼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녀들의 이야기가 거리낌없이 펼쳐진다. 그 사이에서 젊은 배우들은 캐릭터에 대한 해석 대신 억지스러운 캐릭터나 비현실적일 만큼 극단적인 감정표현도 매끈하게 연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테크닉적인 연기만을 익히게 된다. 에서 이런 연기에 강점을 보여준 장서희가 에 캐스팅된 건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연기자들이 소모되는 사이 드라마 역시 더 이상 창조성의 동력을 찾지 못한 채 ‘킬링 타임’을 위한 장르가 될 것이다.
사회에서는 경제 불황이 내 집, 내 돈, 내 자식에 대한 기성세대의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나게 하면서 오히려 자식 세대를 더 힘들게 만들었고, 집에서는 기성세대가 그 욕망을 풀어내는 ‘막장 드라마’가 자식 세대가 볼 드라마의 미래를 갉아먹는다. 한국방송 에서 드라마 PD인 지오(현빈)는 길거리에서 드라마를 시청하는 노점상 아주머니들을 보며 좋은 드라마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한다. 그러나 정작 그런 고민을 하는 지오는 자신의 아버지가 보는 지극히 통속적인 드라마 때문에 드라마 만들기가 만만치 않다. 물론, 드라마는 자기가 보기에 재미있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왜 그 재미있는 드라마는 꼭 ‘막장 드라마’여야 할까. 그 자리를 한국방송 처럼 현실의 변화에 대한 기성세대의 고민을 재미있게 풀어내는 작품들로 채울 수는 없을까. ‘막장’이라도 재밌으면 그만이라고 하기엔 ‘발호세’가 된 호세가,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어쩔 수 없이 ‘발연기’부터 배우게 될 연기자들이 안타깝다.
강명석 기자 www.10-magazi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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