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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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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에 관한 명상

등록 2001-04-24 15:00 수정 2020-05-02 19:21

일제 잔재에 대한 우리 사회의 낮은 이해, 그 과정에서의 몇 가지 편향에 관하여

최근 친일잔재 청산에 대한 관심이 두 가지 이유에서 새롭게 고조되고 있다. 그 이유의 하나는 언론개혁운동 과정에서 의 떳떳하지 못한 과거가 재조명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 우익들에 의한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이 심화되면서 이 문제를 우리 사회 내의 친일잔재 문제와 연결시켜 생각하게 된 점이다. 앞으로 박정희 기념사업회쪽에서 기념관 건립을 위한 모금운동을 전개하면 이에 맞서 박정희의 친일 경력이 커다란 논란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다.

‘pro-Jap’과 ‘pro-job’

해방 직후 일제 잔재의 청산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데에는 분명 민족적 합의가 존재했다. 우리 민족사가 일제 잔재 청산을 못해 뒤틀렸는지, 아니면 민족사의 진행과정이 뒤틀렸기 때문에 일제 잔재가 살아남아 새끼를 치게 된 것인지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 사회에서 친일파들이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그것도 단순히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부끄러운 과거를 철저히 은폐할 수 있는 권력을 쥔 채 숱한 민간인 학살의 무덤 위에 살아남았다.

도대체 해방된 땅에 건설된 새 나라에 어떻게 일제 잔재가 온존되고, 친일파들이 권력을 확대·강화할 수 있었을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미국의 보호가 없었으면 친일파들은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미국은 일본에서는 한때나마 군국주의에 대한 철저한 이념적, 제도적, 인적청산을 추구한 바 있다. 하지만 일본의 질곡에서 ‘해방’되었다는 이 땅에서는 일제 잔재의 청산을 단 한번도 생각한 적이 없다.

제국주의 국가로서의 미국은 군정을 실시하면서 일제에 강하게 저항했던 전투적 민족주의 세력보다는 제국주의에 순응할 줄 아는 친일파 내지는 온건 민족주의자들과 손을 잡았다. 미국은 백범 김구를 수반으로 하는 임시정부 세력에 대해서는 제휴대상으로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임시정부 세력이 일본에 대해서뿐 아니라 민족의 자주성을 침해하는 모든 제국주의 세력에 저항하는 전투적 민족주의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미국은 옛 조선총독부 관리와 경찰들을 그대로 등용하였는데, 이들에 대해 친일파라는 여론의 비판이 일자 미국은 이들이 pro-Jap, 즉 친일파가 아니라 pro-job, 즉 자기 직무에 충실했던 사람들이라고 옹호했다.

친일파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또다른 이유는 한반도가 동서냉전의 각축장이 되면서 남쪽에 반공정권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민족해방운동이 전개되던 시기의 기본적인 대치구도는 민족 대 반민족, 또는 애국 대 매국의 구도였다. 다시 말해서 민족해방운동 진영 대 일본제국주의 및 그 앞잡이들간의 대립이 주된 전선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해방 이후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민족 대 반민족의 구도는 좌우대립의 구도로 재편되었다. 좌우대립의 정치지형이 수립되자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친일세력들은 살아남을 기회를 잡은 것이다.

좌우대립의 대치구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념과 계급적 입장이지, 민족적 입장이 아니었다. 좌우대립의 구도는 민족 대 반민족의 구도와는 전혀 다른 논리와 기준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좌우대립의 지형은 친일파들에 어떤 점이 유리하였을까? 한 예로 일제의 고등계 형사였던 조선인들을 보기로 하자. 이들은 민족 대 반민족의 대립구도하에서는 일제의 앞잡이로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고 고문·살해한 민족반역자들이지만 좌우대립의 구도 속에서는 공산당 때려잡는 데 풍부한 경험을 지닌 전문가들로서, 이승만으로부터 “자네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발뻗고 잘 수 있다”는 칭찬을 듣는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친일파 연구, 폭로수준을 뛰어넘어…

친일잔재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지워지지 않는 상처였다. 제때에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고 때를 놓치고 보니 계속 곪아터지고 진물이 흐를 수밖에 없는 그런 상처가 바로 친일문제였다. 잘 알려진 것처럼 우리는 친일잔재 청산에 실패했다. 친일파들은 권력을 잡았고, 친일의 부끄러운 과거에 대한 반성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철저히 은폐되고 말았다. 이렇게 땅에 묻힌 친일의 어두운 과거를 집요하게 파헤쳐 지금 부족한 대로나마 우리가 친일잔재 문제에 대한 이해를 가질 수 있도록 기반을 다진 분은 임종국(1929∼89) 선생이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 자료를 뒤져가며 친일파들의 행적을 하나하나 추적한 임종국 선생과 그 제자들의 엄청난 노력에 우리는 모두 큰 빚을 지고 있다.

일본의 교과서 왜곡 소동과 관련하여 우리는 우리 사회 내의 일제 잔재와 친일파 문제를 다시 돌아볼 기회를 갖게 되었지만, 우리 사회의 일제 잔재에 대한 이해는 불행히도 매우 낮다고 할 수 있다. 친일파들이 권력을 잡은 역사 속에서 친일문제를 제기하는 지난한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또 몇 가지 편향이 발생하기도 했다. 현재 친일파 청산에 관한 연구는 거의 폭로 수준에 머물러 있다. 단 한번도 자신들의 친일행위를 민족 앞에 사죄한 적이 없는 자들이 온갖 영화를 누려온 불행한 역사에서 그들의 행적을 까발기는 일은 물론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친일의 문제는 특정 개인의 문제는 결코 아니라는 점에서 단순한 폭로를 뛰어넘어, 식민지 지배가 우리에게 끼친 광범위하고 뿌리깊은 영향을 분석하는 작업이 요청된다.

또 하나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는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의 근원을 친일파 문제로 돌리는 경향이다. 친일파 문제를 오랫동안 다루며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크게 기여한 분의 글을 잠시 보자. “친일파 문제는 한국사회의 원죄이다. 이 문제를 풀지 않으면 한국사회가 발전할 수도 없고 존재하기도 어려운 그런 난제이다. 민족분단의 문제가 여기서 비롯되었고 경제종속의 문제가 여기서 시작되었다. 군사독재가 친일파의 사생아이고 사회혼란이 그 결과물이다. 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어떤 문제이건 친일파와 관련이 없는 것은 없다.… 실로 오늘 나타나는 우리 사회의 모든 병폐는 모두가 친일파가 저지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분명 친일파 청산의 좌절은 우리의 현대사에서 잘못 끼운 첫 단추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모든 문제를 친일파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지나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과연 친일파만 제대로 청산하였으면 모든 문제가 다 풀렸을 것인가? 그렇다면 친일파 청산에서 남쪽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했던 이북은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할 것 아닌가?

친일파 기준 지나치게 엄격

친일파에 대한 기준이 지나치게 엄격하게 설정된 것도 또 하나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이 문제는 두 가지 면에서 보아야 할 것인데, 하나는 친일파들이 권력을 잡아온 현실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된 것과 다른 하나는 해방 당시의 역사적 분위기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후자의 예로는 얼마 전 건국대 이사장 선임 당시 학생들의 반대를 받았던 현승종씨의 경우를 들 수 있다. 노태우 정권 아래서 총리를 지낸 현승종씨의 경우, 학생들이 그의 이사장 취임을 반대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학생들은 반대의 근거를 제시하면서 첫 번째로 현승종씨가 일제 말기에 학병으로 나간 친일파이기 때문에 민족 건대의 이사장에 취임할 수 없다는 것을 들었다. 학생들은 형식상 지원제인 학병에 나간 것을 친일 행위로 본 것인데, 이는 해방 당시의 정서와는 큰 거리가 있다. 물론 학병에 지원한 사람들 중에 황국신민 의식이 골수에 박혀 스스로 자원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당시 사람들은 학병을 대부분 끌려간 것으로 보았다. 때문에 학병 출신들은 일제 통치의 희생자로 간주되었고, 해방 정국 초기에 학병동맹을 결성하여 미군정의 탄압으로 해산될 때까지 진보진영 내에서 정치적으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은 당시에 대학교육을 받은 엘리트 신분에다 일제 강제동원의 피해자였다는 위치를 겸하여 일제 잔재 청산에 목소리를 높였다. 학병동맹의 위세는 대단했다. 학병동맹은 학병거부자동맹 앞에서야 한수 접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지만, 그 밖의 다른 모든 정치단체 앞에서는 큰소리를 칠 수 있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일제 잔재의 청산과 관련하여 또 하나의 편향은 나치 점령을 벗어난 프랑스에서의 나치 협력자들에 대한 단죄와 친일파 청산이 동일선상에서 비교된다는 점이다. 프랑스는 4년여의 나치 점령을 벗어난 뒤 괴뢰 비시 정권하에서 독일에 협력했던 사람들 7천여명을 처형했다. 많은 사람들은 불과 4년여의 점령을 당한 프랑스가 수천명을 처형한 데 반해 36년이나 강제 점령을 당한 우리의 경우는 단 한명의 민족반역자도 처형하지 못한 것에 대해 통분해 한다. 친일파 청산이 좌절된 것에 통분해 하는 심정이야 필자도 마찬가지이지만, 친일파 청산이 꼭 가혹한 처벌을 의미하느냐는 우리가 다시 한번 생각해볼 문제다. 자치파가 집권한 인도는 영국에 식민지 지배를 200년간 받았지만 친영파 청산은 독립 뒤의 핵심 과제로 부각되지 않았다. 사실 제국주의의 통치 기간이 오래될수록 제국주의에 협력한 자들에 대한 처벌문제는 어려운 법이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 세력이 집권했다 하더라도 인적 청산의 폭이 결코 프랑스에서처럼 광범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북의 청산방식, 탄백(坦白)

이북의 경우도 대단히 철저하게 일제 잔재를 청산했지만, 민족반역자로 직접 처형한 사람의 수는 많지 않았다. 민족반역자로 처형된 사람은 거의 전부가 독립운동가를 체포, 고문, 학살한 고등계 형사들이나, 독립운동가들을 밀고하는 밀정질을 한 자들에 국한되었다. 우두머리급 친일파들이 대개 서울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북은 인적청산의 면에서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상당히 관대한 정책을 실시했다. 일제의 강점이 단기간에 끝나지 않고, 조선인들이 마땅히 취업할 만한 곳이 없던 사정 아래서 일제 기관에 복무한 사람들을 다 가혹하게 처리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또 만주의 산골에서 빨치산 생활을 한 사람들만으로는 새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전문지식을 가진 사람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수적이었다. 그런데 일제 시기에 교육받은 사람들은 극소수를 제하고는 일제와 이런저런 관계를 맺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런 처지에서 이들을 모두 엄격하게 처벌하거나 새 나라 건설에서 배제한다면 공장 하나 제대로 돌릴 수 없었다. 그래서 이북의 지도부가 채택한 방식은 탄백(坦白)이었다. 탄백이란 일제 통치 아래서 자신의 과거와 자신이 범한 잘못을 솔직하게 당과 인민 앞에 고백하고 용서를 받는 것이다. 여기서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고 자신의 죄과를 감춘 것이 뒤에 드러날 경우에는 엄한 처벌을 받았지만, 솔직하게 고백한 경우는 독립운동가를 밀고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개 용서를 받았다. 이렇게 탄백을 한 사람들은 당의 요직에 임명될 수는 없었지만, 정권기관과 기업소에는 등용되었다. 비록 나중에 해직시키기는 했지만, 초기 인민군의 건설과정에서는 일본군 장교 출신들을 군에 받아들이기도 했다.

요즈음 논란이 되고 있는 와 의 친일문제도 해방 당시의 기준에서 보면 조금 달리 볼 수 있다. 가 서로 민족지 경쟁을 벌인 두 신문의 친일 기사를 원래 지면 그대로 게재한 것은 독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를 거친 사람들에게 그것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이야기였다. 일제 말에 폐간당했던 두 신문이 해방 직후 복간할 때 두 신문의 친일행위가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일제의 강압에 의한 것이었지만 모두가 황국신민서사를 외우고, 전 국민의 80%가량이 창씨개명을 해야 했던 당시의 사람들로서는 일제 잔재의 철저한 청산을 원하면서도, 상대적으로 현재 우리의 감각에 비해 구체적인 친일행위의 범주에 대해 좀더 관대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백범도 친일파와 손을 잡았다?

한 가지 흥미있는 사실은 의 방응모 사장이 백범 선생이 이끌던 한국독립당이 환국한 뒤 이 당의 재정부장을 지냈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두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백범 선생 역시 해방 뒤의 현실정치에서 정치자금 문제 때문에라도 일정하게 친일파들과 손을 잡았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백범 선생 스스로 남북협상에 임하면서 자기비판을 했다. 다른 하나는 당시의 분위기에서 방응모가 한국독립당의 재정부장이라는 공식직함을 맡을 정도로 인적청산의 기준이 엄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방응모나 의 친일이 그냥 넘어가도 좋은 문제였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백보를 양보하여 그들의 친일이 하루하루 신문을 내기 위해 부득이한 행위였다 하더라도 방응모와 는 사과하고 용서를 빌어야 했다. 최소한 그런 부끄러운 과거를 갖고서 민족지라고 자랑하는 망발은 하지 않았어야 했다.

친일의 동기는 가지가지다. 그런데 당시 지식인들의 다수는 친일이 나쁜 짓인 줄 알면서도 마지못해 친일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천황 히로히토의 사진도 가급적 못생긴 것을 골라쓰고 황군이란 말을 가급적 안 쓰려고 나름대로 애썼다는 것이다. 참 큰죄를 지은 것이지만, 본인들이 뉘우치고 사죄한다면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본이 망할 줄 몰랐다는 말은 차라리 순진하기나 하다. 그러나 제국주의의 지배를 근대화의 길로 생각하고 자신들의 친일이 반민족 행위가 아니라 민족을 살리기 위한 길이라고 굳게 믿은 확신범들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이들의 근대화와 반공 논리는 그대로 대한민국에서 계승되었다. 일제의 밑에서 떡고물을 주워먹던 친일파들은 이제 해방된 조국에서 떡판을 송두리째 차지한 것이다. 친일파 청산을 부르짖던 사람들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의 구호 아래 굳게 결속한 친일파들에 의해 오히려 청산된 대한민국에서 해방은 친일파들의 잔치판이 되고 말았다.

일본도, 우리도 과거를 청산하지 않았다. 일본은 그래도 군과 경찰의 고위직에 있던 자들을 정부와 정계에서 배제하는 시늉이라도 했지만 우리는 그나마도 하지 않았다. 한-일협정 체결과정에서 극명하게 들어나는 것처럼 한-일관계는 미국이 내세운 반공의 깃발 아래 이렇게 살아남은 군국주의자들과 친일파들의 야합의 역사였다. 친일파 박정희의 기념관을 짓지 못해 안달하는 나라, 제국주의의 베트남 침략전쟁에 동원되어 민간인 학살의 과오를 범하고서도 사과하지 않는 나라, 친일파의 행위를 비롯하여 우리의 부끄러운 역사를 하나도 가르치지 않는 나라, 과연 우리가 일본의 교과서 왜곡과 우경화에 제대로 대응할 준비를 갖추고 있는 것일까? 일본의 우익들이 비웃을 일이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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