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아줌마들은 장르 놀이 중

등록 2008-03-27 15:00 수정 2020-05-02 19:25

“너무 뻔해”라며 놀리지만 ‘미드’는 건너뛰는 그들을 위한 ‘드라마 스캔들’

▣ 강명석 〈매거진t〉 기획위원

“너무 뻔해, 너무 뻔해!” 네 명의 아줌마가 웃는다. 사랑에 빠진 남녀는 남매 사이였고, 가벼운 병에 걸린 줄 알았던 연인은 시한부 생명이다. 한국방송 의 ‘달려라 울언니’는 과거의 ‘놀았던 언니’들이 아줌마가 되어 드라마의 뻔한 공식들을 비웃는다. 이건 흥미로운 우연, 혹은 정확한 관찰이다. 지금 아줌마들은 드라마를 가지고 장르 놀이 중이다. 그들이 ‘X세대’였던 시절의 요정 최진실이 촌스러운 퍼머를 한 채 자신이 “한때 초콜릿 CF를 찍을 정도로 예뻤”고, “옛날에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라는 말도 있었”다고 증언하는 문화방송 은 이 아줌마 세대의 현재다. 그들은 소싯적에 (혹은 지금도) 인기 가수를 두고 열렬한 ‘팬질’도 했고, 문화방송 로 시작해 SBS 에 열광했으며, SBS 으로 단련됐다. 의 홍선희(최진실)가 톱스타 송재빈(정준호)의 가정부로 일하게 된 뒤 그의 ‘레어 아이템’을 파는 모습은 과장만은 아니다. 누구든 연예인 팬 한 번씩 해본 그들은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상황을 줄줄이 꿴다.

액션, 시트콤, 사랑은 ‘임성한 멜로’

그래서 지금 ‘아줌마 드라마’는 아줌마 드라마이되 아줌마 드라마가 아니다. 문화방송 은 기존 아줌마 드라마들의 공식을 그대로 따르는 듯하지만, 동시에 그것들을 가지고 노는 듯하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자매 박정금(배종옥)과 사공유라(한고은)가 한경수(김민종)를 두고 벌이는 대립은 뻔한 삼각관계다. 하지만 이들의 관계에서 중요한 건 그들의 감정이 아니라 관계로 인해 벌어지는 극단적인 사건들이다. 한경수는 사공유라의 진심을 ‘몰래 엿듣고’ 곧바로 사공유라를 포옹하며 결혼하자고 말하고, 얼마 뒤 다시 박정금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그리고 은 곧바로 사공유라가 박정금에게 물을 뿌리고, “제발 경수씨를 나에게 달라”며 무릎을 꿇는 사건으로 넘어간다. 심지어 박정금이 그의 아버지를 빼앗아간 사공유라의 어머니와 대립할 때는 터무니없이 과장된 카메라의 줌인과 과도한 오케스트라 연주로 감정 과잉의 연출을 보여준다.

이것은 임성한 작가와 문영남 작가처럼 극단적인 설정으로 시청자를 ‘낚는’ 기존 주부 대상 드라마의 장르적 특징을 압축해 보여주는 효과를 가져온다. 이 작가들이 극단적인 사건에 코미디나 부드러운 멜로를 적당히 넣어 숨 돌릴 틈을 주는 것과 달리, 은 그 드라마들의 장르적 특성에 구획을 그어 한꺼번에 몰아붙인다. 박정금이 형사로 활동할 때는 진지한 액션 드라마가 되고, 박정금이 집에서 쉴 때는 바깥에서의 일은 완전히 잊은 듯 원치 않는 동거를 하는 이혼녀와 노총각의 시트콤이 된다. 박정금이 칼에 맞은 트라우마를 극복하겠다며 자신의 상사에게 마치 의 제인처럼 악을 쓰며 “할 수 있습니다”를 외치는 장면을 보며 과연 감동해야 할까, 키득거려야 할까. 임성한의 드라마를 즐겨 본 시청자라면 그의 드라마보다 더 극단적인 전개에 만족할 것이고, ‘아줌마 드라마’의 규칙을 아는 사람은 박장대소할 수 있다.

이 기존 아줌마 드라마의 여제였던 김수현 작가의 한국방송 와 맞붙어 나름대로 선전하는 것은 이 새로운 아줌마 세대가 유의미한 시청자층으로 떠올랐다는 방증이다. 그것은 과거의 트렌디 드라마와 현재의 아줌마 드라마를 비웃는 새로운 장르의 출현이기도 하다.

새로운 아줌마 세대를 직접적으로 겨냥하지는 않았지만, SBS 의 서영은(송윤아)은 더 이상 ‘삼각관계, 재벌 2세, 불치병’이 있는 드라마를 하지 않겠다면서도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드라마를 하고 싶다”고 말한다. 2000년대 트렌디 드라마의 대표 격인 ‘연인 시리즈’로 스타덤에 오른 김은숙 작가와 신우철 프로듀서가 그들의 과거를 비웃는 드라마 를 즐길 시청자는 “‘미드’만 보는” 오승아(김하늘) 같은 ‘어린 것’이 아니라 ‘연인 시리즈’에 울고 웃으며 트렌디 드라마의 구조를 속속들이 학습한 시청자다. 그들은 과거 자신들이 즐겨 보던 드라마를 “너무 뻔해”라며 놀리지만, 여전히 밤 10시에 ‘미드’보다 한국 드라마를 더 많이 본다.

드라마도 나이를 먹으면 변한다

등은 아줌마가 된 과거의 X세대들처럼 드라마들도 나이를 먹으며 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드라마들은 그렇기 때문에 딜레마를 안는다. 이 드라마들은 뻔한 드라마를 놀리는 동시에 아줌마의 판타지를 자극한다. 은 40대를 목전에 둔 홍선희가 톱스타가 된 고교 동창 송재빈과 로맨스를 만들면서 지금 아줌마 시청자의 현실과 판타지를 동시에 노린다. 15년 전 데뷔한 장동건은 여전히 최고의 톱스타지만 30대 후반의 여성은 홍선희처럼 과거를 한탄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라면, 그들이 사랑에 빠지는 것은 판타지다. 이 보여주는 건 아줌마의 현실이 아니라 ‘아줌마’ 여주인공과 ‘중년’ 톱스타의 트렌디 드라마적인 사랑이다.

이 현실과 판타지를 접합하는 것은 지금 ‘X세대 출신’ 아줌마들의 현실적인 위기에 대한 묘사다. 박정금과 홍선희가 모두 남편의 부재로 생활고에 빠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불황의 시대에 남편의 부재로 인한 경제적 몰락은 아줌마가 겪을 수 있는 큰 공포 중 하나다. 그래서 지금 새로운 아줌마들에게 어필하는 이 드라마들은 결과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과거의 판타지를 비웃고 현실에 몸담은 캐릭터를 등장시키면서도 주인공이 톱스타나 잘생긴 변호사와 사랑에 빠지는 이 드라마들의 선택은 아줌마 세대의 현실일까 아니면 과거의 드라마들 같은 판타지일까.

현실과 판타지의 중간에서

그 점에서 한국방송 가 그들 세대 아줌마의 모습을 풀어내는 방법은 주목할 만하다. 에서 김수현 작가는 애 딸린 이혼남과 결혼하는 첫째딸과 경제력 차이 때문에 결혼에 부딪치는 둘째딸, 그리고 아들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가 집에 들이닥쳐 평온한 가부장제 가족을 유지하고 싶은 꿈이 깨지는 엄마(김혜자)의 모습을 통해 가부장제와 가족 해체 시대 사이에서 흔들리는 아줌마의 욕망과 현실을 놀라울 정도로 간단하게 풀어낸다.

김수현 작가 시대의 아줌마들보다 더 많은 문화적 혜택을 받으며 자랐고, 스스로 자기 세대의 드라마를 비웃을 정도가 된 ‘새로운’ 아줌마들과 그 세대의 작가들은 과연 이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그들은 과연 어떤 방식으로 전 세대와 다른 ‘아줌마 장르물’을 만들고, 어떻게 그들 세대의 욕망과 현실을 보여줄까. 아줌마들이 보던 드라마들에 새로운 스캔들이 일어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너무 뻔해, 너무 뻔해”를 외치면서도 여전히 드라마를 보는 아줌마들과 함께.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