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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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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에서 찍고 북에서 그리다

등록 2007-10-11 15:00 수정 2020-05-02 19:25

탈북 화가와 운동권 사진가가 함께 만든 ‘우린 행복합니다!’전

▣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왜 평양의 경기장에서 아이들이 집단체조, 카드섹션하거나 춤추는 것을 찍었시요? 생생하긴 한데… 대체 뭘 보여주자는 거디요?”

“북쪽에서 보여주고 싶어하는 걸 내 방식대로 본 것일 뿐이죠. 그랬더니 그네들 의도와 다른 인간의 그늘도 보이더라고요. 동원 연습의 고된 흔적들, 개인적인 표정, 실력의 차이들….”

△사진가 노순택씨가 찍은 새벽녘 평양 도심 풍경(위)과 탈북 화가 선무씨가 그린 100호짜리 평양 풍경화인 (아래). 노씨 사진에서는 어둠 속에서 붉은빛을 발하는 주체사상탑이 부각된다. 반면 선씨의 그림은 모호한 색조의 창공 아래 놓인 주체사상탑, 유경호텔 따위의 평양 기념물들을 불안정한 느낌으로 담고 있다.

탈북자 출신의 화가와 최근 평양을 다녀온 운동권 출신 사진가는 묘한 대거리를 주고받는다. 그들을 잇는 인연은 기실 북한을 직접 체험한 기억을 붓질에 재현하거나 필름에 담았다는 이력밖에는 없다. 그러나 두 사람이 어린 시절 각기 남과 북에서 ‘삐라’를 주운 경험이나 미술 표현에 대한 의견을 털어놓으며 풀어가는 대화는 어색하지 않았다. 아이 같은 눈매의 탈북 화가 선무(36·가명)씨와 평택 대추리 등에서 미군기지 반대투쟁에 동참해왔던 사진가 노순택(37)씨. 둘은 스스로 ‘아트’(미술)를 하는 작가임을 잘 알고 있었다. 남과 북에서 다른 시공간을 좇아왔지만, 전시로 의기투합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남북 정상회담 소식에 술렁거리던 10월6일 오후 서울 자하문 고개 꼭대기의 부암동 전시장 ‘호기심에 대한 책임감’에서 이 기묘한 2인전의 막이 오른 배경이었다.

두 작가의 작품 사이, 묘한 긴장감

전시의 이름은 ‘우린 행복합니다!’. 4평짜리 좁은 전시장 정면과 양옆 벽으로 작가당 10여 점씩의 사진과 유화가 내걸렸다. 눈품을 들인 관객이라면 두 작가의 작품 사이에 놓인 긴장감과 더불어 출품작들이 시종 미술의 맥락에서 뜯어본 북한 모습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인공기 아래 얼굴이 그늘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날선 초상이 걸렸다. 이 작품을 중심으로 광막한 하늘 아래 평양 시가를 그린 선씨의 유화가 있다. 주체사상탑의 꼭대기만 빨갛게 불빛을 발하는 새벽녘 평양 시내의 정적인 모습, 김정일 최고사령관의 상징을 표시한 집체 카드섹션 장면을 찍은 노씨의 사진도 따라 붙었다. 둘의 사진, 유화들은 모두 북한 공간을 직접 겪은 체험의 산물이지만, 제각기 다른 성격의 냉소적 시선으로 부딪힌다. 빨간 배경에 공중으로 손을 치켜든 감청색 교복의 소년단 대원, ‘우리는 행복동이’라고 쓰인 포스터 글자 위에서 노래를 부르는 제복 소녀들의 유화는 선씨의 어릴 적 기억의 산물이다. 김정일 최고사령관의 권위를 보여주는 집체 카드섹션이나 손에 든 담뱃불을 멀리 평양 주체사상탑과 같은 높이처럼 보이게 만든 사진들은 노씨의 평양 취재 기행에서 접한 다각도의 체험을 담았다.

선씨는 북한의 지방 대학을 다니다 생활고와 북한 체제에 염증을 느껴 2000년대 초 가족을 두고 탈북한 뒤 다시 국내 미대 학부를 거쳐 대학원에 재학 중이다. 반면 노씨는 경기도 평택 대추리, 매향리 등 분단 모순에 생채기 난 남한 곳곳의 현장을 쫓아다니며 수년째 현장 투쟁과 다큐 촬영을 같이 해왔다. 이념적 배경, 북한의 삶과 공간을 보는 시선의 속내가 다 다르다. 북한 체제에 신물을 내는 선씨는 주체탑을 김일성, 김정일 그 자체이며 ‘부숴야’ 할 대상으로 단정했다. 노씨는 냉정한 기념물로서의 거리를 유지하려 한다. 물론 노씨 또한 집체 체조와 카드섹션의 획일적 율동 속에서 “북한은 내가 살 터전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말한다. 남한에 분단의 너울로 작용하는 실체로서 북한의 이미지는 그대로 남한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는 게 그만의 생각이다. 그럼에도 소통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고 둘은 입을 모았다. 명분, 이념보다는 북한을 직접 체험한 바탕 위에서 사람 이야기를 표현하려는 욕망을 서로 이해했다고 했다.

이 전시에는 부산비엔날레 바다예술제 전시감독을 지낸 독립기획자 류병학씨를 비롯해 신보슬, 김동일, 이은화씨 등의 젊은 기획자들도 따라붙었다. 작가 2명의 긴장 어린 시선, 관점의 차이를 함께 이야기하고, 작품들이 빚어내는 독특한 공명을 담론으로 정리한 것이 이들의 몫이었다. 지난 6월부터 오는 11월까지 진행되는 이 연속 기획전 프로젝트는 전시 때마다 인터뷰, 작품 비평, 작가론 등을 작품들과 같이 전시하면서 도록을 낸다. 선무-노순택씨의 전시는 여섯 번째. 특히 이번 전시에 대해 공동기획자 김동일(서강대 강사)씨는 전시 서문에서 “이념이나 언론 정보가 아닌, 선과 색, 빛과 형태의 문법에 따른 미술적 맥락에서 북한 이미지들을 투시하려는 시도”라고 평가했다. ‘탈북과 북한 체험이 미술 차원에서 어떤 의미를 낳을까’를 찾아보려는 이 시도는 소장작가들을 2명씩 묶어 소개해온 이 연속 기획 프로젝트의 색다른 성과로 남을 것임에 분명해 보인다.

옆 ‘주체사상탑’ 대비

선씨는 탈북자 가운데 화단에 전시로 본격 데뷔한 첫 작가라 할 수 있다. 수년간의 탈북 유랑 체험이 작품의 주된 소재지만, 강렬한 색감이나 예민한 선의 표현 등에서 자신의 체험과 심경을 좀더 미학적으로 여과하려는 의지를 드러낸다. 100호짜리 대작 은 표현주의 그림을 떠올리게 하는 야성적인 색감이 전체 화면의 3분의 2를 덮은 하늘에 드러난다. 감옥 같은 철창 쪽에서 대동강 너머 주체사상탑, 유경호텔, 인민대학습당, 개선문, 고려호텔 같은 기념비적 대건조물이 아래쪽에 낮게 깔려 보인다. 정작 중심은 아가리를 벌린 듯한 어두운 색깔의 먹구름, 황톳빛, 주홍빛, 검남빛 등으로 채워졌다. 땅을 갈아엎은 듯 불안하고 처연한 정서를 안긴다. 그림의 핵심은 불안한 하늘과 아래쪽의 확고한 중심인 주체사상탑이다. 선무씨는 말한다. “주체탑은 북한 이념의 푯대이자 핵심이다. 하지만 그 위의 하늘은 인간이 보는 평범하고 편안한 하늘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김일성 사상 같은 국가 이념의 무게감에 눌려 사는 인민들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이 그림에 대응해 노순택씨가 찍은 주체사상탑의 새벽 풍경 사진은 전력 사정으로 다른 곳의 불은 거의 모두 꺼진 가운데 유독 붉게 꼭지의 불빛이 빛나는 주체사상탑의 낯선 자태다. 선무씨의 그림이 탈북 체험의 곡절을 색조의 진폭으로 환원시켜 표현한다면, 노씨는 냉정한 다큐 사진의 시선을 유지한다. 미묘하게 엇갈리는 두 작가의 사실적인 북한 공간 표현들이 역으로 강한 상징성, 고발성을 띠게 된다. 선씨의 50호짜리 유화 는 붉은 넥타이 맨 10대 초반 소녀들이 ‘우리는 모두 행복해요’ ‘세상에 부럼 없어라’ 등의 노래와 구호를 부르는 장면을 북한 포스터풍 그대로 옮겼다. 유년시절 학교의 어린이 예술공연 소조에 들어가 명절이나 농번기에 농촌이나 군에 가서 노래를 불러주면서 행복감과 자부심에 젖었던 ‘그때 마냥 좋았던’ 기억을 재현했다. 하지만, 복제되듯 화폭에 옮겨진 그림은 선전도구화한 아이들의 처지에 대한 동정심을 드러낸다. 인공기 옷을 벗어던지고 젖가슴을 드러낸 여인의 상체 누드그림은 더 나아가 이념 구도를 관능미로 전복시키는 파격으로 읽힌다.

지도 강사 추천으로 만남 성사돼

선무씨와 노순택씨의 예사롭지 않은 만남은 지난 6월 성사됐다. 중견 비디오작가 이용백씨가 큐레이터 신씨에게 “미대 학부에서 가르쳤던 제자 중에 북한 친구가 있다”며 그를 추천한 것. 그것이 계기가 되어 2인전 프로젝트의 다른 큐레이터들도 만장일치로 사진가 노씨와의 만남을 주선했다고 한다. 서로 다른 색깔을 지닌채로 그들만이 겪은 독특한 북한 체험이 ‘우린 행복합니다!’전을 만든 밑바탕이 된 셈이다.

현재 탈북자들 가운데 전업작가로 화단에서 활동하는 이는 없다. 학부생과 한국화과 대학원생 등의 재학자만 서너 명 있는 형편이라고 선씨는 전했다. 서울 대학로 한 건물의 실기실에서 작업 중인 그는 실기실 구석에 쌓은 30여 점의 근작들로 개인전을 여는 것이 가장 절실한 소망이다. 앞서 4일 밤 서울 인사동에서 선씨를 만난 노씨는 “당신 삶의 역사가 너무 기구한 건 이해하지만, 탈북자 아닌 작가로서 천천히 체험을 삭여 표현해달라”는 당부를 건넸다. 전시는 10월28일까지. 전시장 내부에는 작가 비평문과 인터뷰, 대담 녹취록과 도록도 준비되어 있다. 010-3007-4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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