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팬이라면 누구라도 일화 하나쯤 간직하고 있을 ‘서울운동장’의 영광과 쇠락, 그리고 퇴장
▣ 신명철 편집위원
1969년 8월15일. 24번째 맞는 광복절인 이날 서울운동장 야구장(동대문야구장)에서는 재일동포 학생야구단과 국내 고교팀의 경기가 벌어졌다. 같은 달 8일 입국한 재일동포팀은 12일 첫 경기에서 중앙고에 3-4로 졌으나, 13일 성동고에는 12-0으로 크게 이겨 1승1패를 기록하고 있었다. 이날 경기는 연속경기였다. 재일동포팀은 27일까지 서울·인천·대전·대구·부산을 돌며 이어진 경기 일정에서 16전 11승2무3패의 전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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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마린’ 돌풍의 주역 김기태
일정이 빠듯해 몇 차례 연속경기를 치러야 했다. 첫 경기에서 장충고를 4-1로 물리친 재일동포팀은 곧이어 벌어진 두 번째 경기에서 그 무렵 국내 고교야구 최강을 자랑하던 선린상고와 맞붙었다. 야간경기 조명시설이 환하게 불을 밝힌 가운데 재일동포팀 기둥 투수 김기태의 역투가 이어졌다. 오른손 언더핸드인 김기태는 오른쪽 타자 등 뒤에서 휘어져 들어오는 듯한 변화구와 빠른 공으로 선린상고 타자들을 꼼짝 못하게 했다. 단 한 개의 안타도 치지 못하고 0-1로 끌려가던 선린상고는 9회말 마지막 공격에서 안타 없이 4구와 도루,상대 실책 등을 묶어 1점을 뽑아 간신히 1-1로 비겼다. 김기태는 그해 서울에서 열린 전국고교대회 3관왕이자 강타선을 자랑하던 선린상고를 상대로 ‘노히트 경기’를 벌였다.
서울운동장 야구장을 가득 메운 관중들은 국내에서는 보기 힘든 정통 언더핸드 투수 김기태의 뛰어난 투구 내용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러나 이날 경기는 맛보기에 지나지 않았다. 김기태는 16일 성남고전에서 산발 5안타로 5-1 완투승을 거뒀다. 이어 연속경기로 벌어진 17일 두 번째 경기에서는 선린상고와 성남고의 연합팀을 4안타 1실점으로 막아 또다시 5-1 완투승을 거뒀다. 사흘 연속 마운드에 올라 거둔 27이닝 3실점(2자책점)의 놀라운 결과였다. 김기태는 20일 벌어진 서울시리즈 마지막 경기인 선린상고와의 재대결에 다시 마운드에 올라 3안타만을 내주며 3-1 완투승을 거뒀다. 지방시리즈에서도 김기태의 역투는 이어졌지만 서울에서 치른 경기로 그는 이미 ‘서브마린’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국내 야구팬들에게 뚜렷한 인상을 남겼다. 김기태는 이후 요미우리 자이언츠 등 일본 프로야구에서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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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팀 청보 핀토스는 1986년 재일동포 투수 김기태를 영입했다. 야구팬들은 처음에는 김기태가 누구인지 얼른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했다. 그보다 앞서 국내 무대를 밟은 장명부나 김일융에 견줘 이름이 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1960년대 말 서울운동장 야구장에 ‘서브마린’ 돌풍을 일으켰던 주인공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17년 전의 김기태는 아니었다. 마운드를 스치듯 하던 팔은 많이 올라와 사이드 암 투구로 바뀌어 있었고 변화구의 위력도 팬들이 기억하던 것과는 달랐다. 그래도 야구팬들은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본 그를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1982년 3월27일. 80여 년 한국 야구사에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프로야구 개막전이 벌어졌다. MBC 청룡-삼성 라이온즈의 경기는 모든 야구팬의 기억에 남아 있다. 10회 연장경기를 치르느라 야간경기 조명을 밝혀놓은 서울운동장 야구장의 모습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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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중반 재미동포 홍윤희씨가 공탁금 20만달러까지 마련하며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프로야구 출범 계획이 야구계의 ‘시기상조론’에 밀린 지 7년 뒤의 일이다. 최초의 국내 프로야구 추진 계획은 매우 구체적이었다. 그리고 현재의 프로야구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1976년에는 당시 실업야구를 하고 있던 10개 팀을 5개 팀씩 동해 리그와 서해 리그로 나눠 전국 시도에 고루 배치하고 팀당 130경기를 가져 리그 1위끼리 코리안시리즈를 치르고, 1977년에는 첫해 성적을 토대로 서울·부산·대구·광주·대전·인천에 본거지를 둔 6개 프로구단을 만들어 페넌트레이스를 벌인다는 것이다. 1978년에는 서울과 전주에 1개 팀씩을 만들어 8개 구단으로 리그의 뼈대를 완성한 뒤, 1979년에는 한국과 미국, 멕시코, 일본이 참여하는 월드시리즈를 추진하며, 프로야구 추진 5개년 계획의 마지막 해인 1980년에는 한국의 8개 팀과 일본의 12개 팀이 모두 참가하는 동북아시아리그를 창설하려고 했다.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과 코나미컵 아시아시리즈 그리고 프로축구 AFC(아시아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의 요소들이 뒤섞여 있는 듯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을 마무리하기로 돼 있던 1980년 이 땅에는 스포츠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프로스포츠가 자리잡지 못했다. 개막전을 즈음해 홍윤희씨는 한국야구위원회(KBO)에 한 줄짜리 짧은 축전을 보냈다. “한국 프로야구 출범을 축하합니다.” 1980년 5월의 비극이 있은 지 2년이 채 안 된 때였다.
2007년 4월16일. 단국대와 동국대의 전국대학야구 춘계리그 결승전이 열렸다. 명승부였다. 단국대가 흔히 케네디 스코어로 불리는 8-7로 동국대를 누르고 2년 만에 대회 정상에 올랐다. 재미있는 경기였지만 이날 동대문야구장을 찾은 관중은 696명이었다. 화요일 오후이긴 했지만 응원 온 두 학교 학생이 아니었다면 100명도 안 되는 관중이 대학야구 결승전을 볼 뻔했다. 40여 년 사이에 동대문운동장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관중 수도 그렇고 경기장 이름도 서울운동장에서 동대문운동장으로 바뀌었다. 1980년대 잠실 지역에 서울종합운동장이 생기면서 ‘원조’ 서울운동장은 동대문운동장으로 이름에서 벌써 한 단계 주저앉았다.
고교야구 전성기 땐 하루 네 탕 뛰기도
4월25일 제41회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가 동대문야구장에서 막을 올렸다. 올해 첫 전국 규모 고교야구대회다. 곧이어 벌어질 청룡기, 봉황기, 황금사자기 등 고교야구대회를 비롯해 여러 대회는 이제 동대문야구장과 이별해야 한다. 한국 야구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동대문야구장이 올해 말 헐리기 때문이다. 스포츠 팬치고 동대문야구장과 관련된 일화를 하나라도 간직하지 않은 이는 없을 것이다. 1970년대 고교야구가 최고의 인기를 누릴 때 동대문야구장은 하루 ‘네 탕’을 뛰기도 했다. 어느 신문사가 주최하는 대회는 지역 예선 없이 전국의 고교야구팀이 여름방학을 이용해 모두 출전해 대회 일정이 빡빡했다. 그래서 오전 9시 첫 경기부터 야간경기까지 하루 네 경기를 치르기도 했다. 출전 학교 응원단과 동문이 경기마다 자리를 물려주며 운동장을 채웠으니 2만5천여 명 수용 규모의 동대문야구장의 하루 입장 인원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어림짐작할 만하다. 하루 총인원으로 하면 서울 월드컵경기장의 5만 관중에 뒤지지 않았을 것이다. ‘동대문야구장의 전성시대’였다. 고교야구대회는 그 시절 몇몇 신문사의 노른자위 사업이었다. 올 시즌이 끝나면 이제 동대문야구장은 야구팬들의 곁에 없다. 이미 오래전에 잠실야구장에 모든 영광을 넘겨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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