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제국주의의 치어걸’로 폄하되면서 ‘절대악’이 되버린 영화 <청연>
관람 거부 운동하시는 분들, 제발 영화는 보고 얘기합시다</font>
▣ 권김현영/ <언니네> 편집장
“착한 여자는 하늘나라로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로든 간다.” -우테 에어하르트
한국 최초의 민간인 출신 여성 비행사 박경원의 일대기를 그린 <청연>을 보고,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이 문구였다. 현재 한국의 민항기 여성조종사는 5~6명가량 되지만 아직 여성기장은 없고, 공군사관학교는 1997년에야 여성들에게 문호를 개방했다. 어디 조종사뿐이랴. 여성에게 이동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곳도 아직 많다. 집 밖을 나서 길 위에 선 여성들은 정숙하지 못한 여자, 곧 “나쁜 여자”로 취급된다. 어디로든 갈 수 있고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삶은 여성들에게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꿈인 것이다.
친일보다 나쁜 일이 정말 없는가?
그렇기 때문에 어디로든 날아가고 싶어했던 박경원의 꿈은 아직도 많은 여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청연>은 그런 마음으로 기다려왔던 영화다. 그리고 영화는 기대에 충분히 부응하는 훌륭한 만듦새를 보이고 있었다. 한 인물의 탄생부터 죽음까지를 연대기순으로 서술하는 이야기 구조를 띠고 있으면서도 일방적으로 미화하거나 영웅화하지 않는 시선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도, 영상시대에 영화에서만 느낄 수 있는 영상미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여성 인물이 중심이 되어 블록버스터가 만들어졌다는 점에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영화였다. 하지만 곧 <청연>은 같은 날 개봉한 <왕의 남자>에 밀리고, 친일 논란에 휩싸이면서 관객 동원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심지어 박경원은 졸지에 제국주의의 치어걸로 전락하며, <청연> 관람 거부 인터넷 카페까지 개설되는 등 정말 “나쁜 여자”가 되었다. 남자와 민족주의에 걸려 넘어지다니! 박경원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시대와 권력의 무게를 증명하는 인물이 될 운명이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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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묻자. 애국심은 정말 그렇게 모든 가치를 우선할 정도로 정의로운 것인가. 백제의 장군 계백은 자신의 애국심을 위해 가족의 목을 자른다. 나는 영화 <황산벌>에서 계백의 아내로 분한 김선아가 “군바리 마누라 30년에 악밖에 안 남은 년이여! 니가 해준 게 뭐 있다고” 악다구니를 할 때 완전히 뒤로 넘어가게 웃었다. 영화에서 더 이상 계백의 아내는 애국심과 영웅주의의 숭고한 희생양이 아니라 가부장적 남편이자 살인자로 계백을 다시 보게 만든다(코미디는 그런 면에서 대단히 전복적인 생각을 부드럽게 받아들이게 하는 대단한 힘을 가진 장르다). 그러나 남성 중심의 할리우드형 블록버스터 영화들은 대부분 이 애국심과 영웅주의에 편승한다. 애국심은 비판을 허용치 않는 맹목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 주변의 모든 세세한 것들을 날려버리는 엄청난 화력을 자랑하는 폭탄(블록버스터)인 것이다.
하지만 <청연>은 블록버스터 형식으로 만들어졌으면서도 블록버스터의 내용을 배반하는 영화였다. 적대적 경쟁 의식과 배타적 민족주의와 맹목적 애국심은 블록버스터의 긴장관계를 만드는 가장 핵심적인 서사이지만, <청연>에 등장하는 것은 공정한 경쟁과 국가를 뛰어넘는 우정, 그리고 개인이다. 이것만으로도 <청연>의 성취는 우리에게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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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성역할을 훌쩍 뛰어넘다
어떤 ‘진보’ 매체에서 박경원을 ‘제국주의의 치어걸’이라고 폄하하는 기사를 올렸다. 이는 기존의 여성 억압을 재생산하는 언어를 그대로 답습하기 때문에 선정적이고 선동적인 만큼 다분히 문제적이다. 치어걸이 지닌 성애화된 이미지를 비판의 주요 코드로 삼으면서 정숙한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 사이의 이분법을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방식의 비판이 친일만큼이나 나쁘다고 생각한다. 친일만큼이나 나쁘다는 말에 누군가 발끈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자. 친일보다 나쁜 일이 정말 없는가? 친일을 들먹이면 쉽게 공감과 공분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말하자면 친일은 ‘절대악’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이런 방식의 말하기가 힘을 얻을 뿐, 억압은 단일하지도 않고 어떤 억압이 모든 상황에 우선되어 적용되지도 않으며 누구나 동일한 방식으로 억압을 경험하지도 않는다. 예를 들어 1900년대 조선에서는 봉건제도의 악습이 일본 제국주의보다 더 사람들을 착취했던 모순이기도 했다. 갑오개혁에 동참했던 인사들이 ‘친일’적이었다고 하여 ‘반민중적’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다. 또한 일본군 종군위안부들의 증언에는 가끔 한국 남자들이 더 지독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며, 위안부들이 수십 년간 입을 다물며 침묵한 것은 한국의 가부장제가 저지른 2차 가해이다. 그러므로 과거 청산은 반일 민족주의자를 영웅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을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다. 현실은 이분법으로 재단할 수 없는 복잡한 권력과 욕망들이 경합하는 과정들의 총체이므로, 절대악으로서 친일을 상정하고 여론재판을 벌이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어쩌면 하늘을 나는 것과 같은 건강한 욕망들에 대한 경배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에서 박경원은 기존의 성역할을 훌쩍 뛰어넘는다. 얼굴에 검은 기름을 묻히며 자동차를 정비하고, 중성적인 복장을 입으며, 술과 담배를 즐기고, 남성과 그리고 일본인과 동등하게 경쟁한다. 그가 남성 앞에서 신체를 드러내는 장면은 오직 일본 권력층과의 만찬 장면뿐이다. 또 고문 장면에서 성적인 신체 훼손을 암시하는 장면이 전혀 없고, 한지혁과의 정사 장면도 없다. 오히려 가장 박경원의 신체가 드러나는 장면은 이정희와의 목욕 장면에서였다. 여성의 삶 구석구석에 존재하는 신체 훼손과 성적 착취의 위험을 제거한 이같은 장치들은 남성들의 대상으로서 여성의 신체가 전시되는 것을 막으면서 동시에 남자 같은 여자가 아니라 여성으로서의 박경원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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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아쉬운 것은 역시 마지막 비행 장면이었다. 한 영화평론가는 <청연>을 두고 친일보다 더 나쁜 건 ‘죽음=정치적 판단 중지’라는 평을 썼지만, 이 영화가 봉합한 것이 있다면 그의 마지막을 그리는 과정에서 그가 그토록 열망한 장거리 비행을 연인이었던 한지혁(김주혁)의 죽음을 기리는 의식처럼 표현한 부분이다. 영화의 가장 마지막에 “하늘이 제일 좋아. 거기엔 남자도 여자도 일본인도 조선인도 없잖아”라는 말로 끝났다면, 나는 아마 감동해서 눈물을 철철 흘렸을 것이다. 물론 친일 논란에 좌초된다면 살리기 운동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로 <청연>은 충분히 훌륭한 영화이다. 그러니 관람 거부 운동하시는 분들, 제발 영화는 보고 얘기하자. 참고로, 이 영화의 투자 자본이 대부분 일본의 것이라는 말은 헛소문이라니 안심하셔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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