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시작하며- 상충하는 이해관계가 얽히고 설킨 골치아픈 ‘역사의 실타래’를 함께 풀어봅시다
에서 막상 ‘역사이야기’ 연재를 시작하려 하니 걱정이 앞섭니다. 이 자리가 거창한 사론을 논하는 자리도 아닐 것이고, 근현대 시대사를 통째로 정리하는 무모한 시도를 해보는 자리도 아닐 것입니다.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라 하지만 쾌도난담식으로 이야기를 풀 수도 없을 것이고, 그렇다고 야담과 진실식으로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폭로하는 데 지면을 낭비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시사주간지에 걸맞게 그때그때 벌어지는 일들을 역사적 맥락에서 다루어 보라 하지만 역사를 공부한 사람들은 정치학자나 시사평론가들처럼 발빠르게 움직이는 재주를 갖고 있지도 않습니다. 연재의 변을 쓰자니 왜 맡았나 후회막급입니다.
네 말도 옳고, 내 말도 옳고
오늘은 역사를 보는 관점 문제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객관적으로 인식한다는 말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역사의 ‘객관적 서술’이란 대다수의 역사가들이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을 ‘고상한 꿈’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이 꿈이 과연 채워질 수 있을까요? 모든 사람까지는 아니더라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객관적 관점이란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역사상의 사건들에는 숱한 이해당사자들의 상충하는 이해가 얽히고 설켜 있으며 어느 것 하나 단순한 사건은 없습니다.
황희 정승의 옛 이야기 하나를 들어보겠습니다. 황희 정승이 어느 날 길을 가다가 두 사내가 다투고 있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황 정승은 다가가 연유를 물었고, 한명이 먼저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난 황 정승은 “네 말이 옳구나”(汝言이 是也라)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상대방이 펄쩍 뛰며 억울한 것은 자기라며 자신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황 정승은 이번에도 “네 말이 옳구나”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황 정승의 하인이 나섰습니다. “아니 대감마님, 두 사람이 싸우는데 어찌 양쪽이 다 옳을 수 있습니까? 필경 어느 한쪽의 주장은 거짓이 아니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황 정승은 “네 말이 또 옳구나”(汝言이 亦是也라)라고 답했습니다.
조선왕조 500년 최고의 명재상이라는 황희의 판단력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일까요? 그런 해석도 가능하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황희의 고사에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서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인간이 살아온, 그리고 살고 있는 세계는 상충하는 이해의 충돌과정이었고, 그것을 기록한 역사서술이나 사료는 대개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이해관계에서 어느 한쪽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서술이나 기록이었습니다. 만약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려는 어느 한쪽의 주장이 말도 안 되게 엉성하거나, 역사가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사건을 둘러싼 상반된 주장에 대한 충분한 증거를 갖고 있다면 사태의 핵심을 파악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대개의 경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처녀가 애를 배도 할말이 있고, 핑계없는 무덤은 없는 처지에 당사자들의 주장만 들을 경우 그들의 주장은 다 그럴듯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모두 자기의 입장을 정당화할 뿐
똑같은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말하는 사람의 입장과 이해관계에 따라 너무나 다른 이야기가 되어버린다는 점을 예리하게 보여주는 영화가 한편 있습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일본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羅生門)이 바로 그 작품입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소설을 극화한 이 영화는 부부가 길을 가다가 도적을 만나 남편은 살해당하고 아내는 겁탈당한, 어찌보면 사실관계가 아주 단순한 강도살인ㆍ강간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도적의 입장에서, 아내의 입장에서, 무당의 입을 통해서 죽은 남편의 입장에서, 그리고 숨어서 사건을 지켜본 나무꾼의 입장에서 사건을 재구성하여 서로 너무나 다른 네편의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그 어느 누구도 진실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영화 속에서 교토 지방에서 가장 악명높은 도둑이라는 다조마루는 그가 여자를 겁탈하고 남편을 죽였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사실 그는 칼싸움도 제대로 못하는 겁쟁이로 또다른 겁쟁이인 여인의 남편과의 싸움에서 죽을 뻔하다가 살아났으니까요. 다조마루는 도적으로서의 자신의 허명만이라도 지키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다조마루의 이야기는 여인의 강인함을 강조했지만, 여인은 자기의 약함을 눈물로 호소합니다. 자신을 보호해주지 못한 남편은 자기가 몸을 버렸다고 냉랭한 눈으로 쳐다보았고, 여인은 남편에게 자기를 죽여줄 것을 호소합니다. 그 여인은 결국 남편을 죽이고 자살하려 했으나 자살에 실패했다고 울면서 말합니다. 무당의 입을 통해서 죽은 남편은 아내를 비난합니다. 아내가 도적 다조마루에게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했다는 것이지요. 다조마루와 달아나다가 멈춰선 아내는 도적에게 남편을 죽이고 가자고 말했고 도적조차 그 말에 놀랍니다. 다조마루는 여인을 쓰러뜨리고 발로 밟고는 남편에게 이 여자를 죽일까 살릴까 물었습니다. 마침 여자가 달아나자 다조마루는 여자를 쫓아갔다가 몇 시간 뒤 돌아와 남편을 풀어주었습니다. 다조마루가 떠난 뒤 남편은 배신감 때문에 자살했다고 말합니다. 법정에서 진실을 말하지 않은 것은 사건의 당사자가 아니어서 객관적 입장이라 할 수 있는 나무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역시 사건의 현장에서 값비싼 단검을 훔쳐갔으니까요.
어느 누구도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임을 보고 영화에 등장하는 승려는 이런 인간사의 모습이 전쟁이나 지진, 화재나 역병보다 훨씬 더 무섭다고 탄식합니다. 반쯤 부서진 건물에 랴쇼몽이란 현판이 걸린 큰 문 아래에서 비를 피하면서요.
보다는 격이 한참 떨어지지만, 요즘 쉽게 구해 볼 수 있는 영화 중에서는 (Courage Under Fire)가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할리우드식 미국의 양심의 승리로 모든 진실이 밝혀지는 너무나 손쉬운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주장들이 실상은 잘 포장된 거짓일 수 있다는 점을 나름대로 잘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안중근은 테러리스트, 신채호는 사기꾼?
아마 우리 사회의 구성원 대다수는 테러리즘에 반대할 것입니다. 저 멀리 유럽이나 중동에서 이름도 생소한 아랍의 무장세력에 의한 테러행위가 발생할 경우면 예외없이 신문이나 방송에서 테러리즘을 비난해 왔으니까요. 그러나 안중근 ‘의사’는 어떻습니까? 기차에서 내리는 비무장 정치인을 권총으로 암살한 행위, 바로 전형적인 개인테러행위 아닐까요? 그런데 테러리즘 일반이 나쁜 것이라면 유독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훌륭한 행위일 수 있을까요? 안중근 의사의 행위가 옳은 일이었다면, 어떤 테러행위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명제가 잘못된 것이고, 테러리즘 일반이 나쁜 것이라면 안중근 의사의 행위는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어떻습니까? 변절의 기미가 보이는 이광수를 꾸짖기 위해 세수할 때조차 고개를 숙이지 않으셨다는 그분을 많은 역사학자들은 우리 독립운동의 고고한 지사로 주저없이 꼽습니다. 그러나 이분도 일제관헌의 관점을 적용한다면 고고한 지사이기는커녕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질서를 교란한, 요즘으로 치면 유가증권 위조의 파렴치범입니다.
문제는 관점과 기준입니다. 일어난 일은 분명 하나입니다. 안중근 의사는 분명 이토 히로부미를 쏴죽였습니다. 신채호 선생은 분명 유가증권을 위조했습니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떤 입장에 서느냐에 따라 그 행동의 의미는 달라집니다. 안중근 의사는 대한국의 의병장으로서 우리를 침략하는 일본국의 수괴 이토를 사살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입장에 서느냐,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보느냐, 아니면 일제의 입장과 일부 겹치기도 하지만 모든 개인테러행위를 비난하는 입장에 서느냐에 따라 그 행동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래서 역사는 골치아픕니다.
세상 일도 골치아프고, 역사 역시 골치아픕니다. 역사를 공부한 죄로 어쩔 수 없이 골치아픈 이야기들을 풀어나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문과 방송에서, 그리고 교과서에서 말하는 것을 다 믿을 수 있는 세상이 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그런 꿈같은 세상이 앞으로 올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분명 그런 세상이 아닙니다.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세상의 이런저런 이야기들에 대해 합리적인 의문을 품는 자세, 세상일을 판단하는 자신의 관점을 확고히 하는 입장, 그리고 자신의 관점에 대해서도 엄격함을 유지하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자기 눈으로 세상과 역사를 보고, 또 자신의 판단까지도 의심해보는 그런 자세말입니다.
이중잣대란 말이 있습니다. 자신에겐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한 그런 자세를 말하는 것이지요. 쉽게 얘기해서 남이 하면 불륜이고 자기가 하면 로맨스랄까요? 앞으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기회주의자 박정희를 찬양하고 기념하면서 자식들에게 올바르게 살아라라고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일제의 학살만행과 정신대 만행에 분노하고, 노근리 학살에 참담해 하면서 베트남에서의 민간인 학살 의혹을 방치해둘 수는 없습니다. 역사는 이래서 골치아픕니다.
역사를 산다는 것
세상이 참 많이 변한 것 같으면서도 별로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도 듭니다. 혼돈된 현실 속에서 저희같이 직업으로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아니더라도 역사를 돌이켜보게 될 때가 많습니다. 분단과 통일, 주한미군 문제를 비롯한 미국과의 관계, 독재잔재의 청산, 경제개혁 등등 우리가 직면한 모든 문제는 다 얽히고 설킨 역사적 뿌리를 갖고 있습니다. 어느 때보다도 역사를 이야기하게 되는 때인가 봅니다.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 문익환 목사님의 시가 생각납니다. 역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산다는 것이라는 말씀이 말입니다. 역사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지면으로나마 만나고 싶고 찾아나서겠습니다.
얼마 전 수업시간에 6월항쟁에 관한 비디오를 틀어주다가 속으로 울었습니다. 그리웠습니다. 그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나? 한열이의 장례식 날, 시청 앞 광장이 꽉 찼는데 아직도 대열의 후미는 연세대를 벗어나지 못했던 그 인파. 오늘의 혼돈된 현실 속에서 그 사람들도 그 어딘가 굽이에서 서로를 그리워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사를 살아갔던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같이 나눠 보도록 하겠습니다.
필자 약력 서울대 국사학과 문학사 서울대 대학원 국사학과 석사 미국 워싱턴대 사학과 박사 서울대·연세대 강사 청년학교 교무처장 현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현 한국전쟁 후 민간인학살 범국민대책위원회 위원 현 베트남전 진실위원회 집행위원 |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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