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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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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을 가른 ‘명패’의 슬픔

등록 2005-03-09 15:00 수정 2020-05-02 19:24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어릴 때부터 흠모했던 이재오·김문수 의원이 왜 ‘오버’를 거듭하는지 정밀분석해보면…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아마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인 것 같다. 친하게 지내던 중학교 동창이 자기네 학교에 새로 국어 선생님이 오셨는데, 연극도 하시고 사람도 좋으셔서 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최고라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예나 지금이나 숨막히는 입시제도에 <왜 불러> 같은 노래조차 금지곡이 되는 유신시대의 분위기 속에서, 나는 정말 우리 학교에도 그런 선생님이 계셨으면 하는 부러움을 갖고 친구의 자랑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하필이면 매일 아침 등굣길에 내가 탄 버스가 그 학교 앞을 지나갔던지라 한번도 보지 못한 그 선생님을 여러 번 떠올렸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몇달 안 가서 그 친구는 선생님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학교를 떠나게 되셨다고 코가 쑥 빠져 있었다. 그 선생님 이름을 다시 듣게 된 건 2년쯤 지나서 10·26 사건이 나기 얼마 전이었다.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이라는 어마어마한 이름을 가진 ‘반국가단체’가 적발되어 남민전 사건이란 명칭으로 신문지상을 화려하게 장식하게 된 것이다. 수많은 연루자들의 이름 속에서 나는 남민전의 주요 간부가 된 그 선생님을 찾을 수 있었다.

이름만 들어도 설레던 이재오 선생님

그 선생님과 직접 인사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1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1988년이었다. 1987년 대통령 선거가 끝난 뒤, 청년운동 진영에서도 6월항쟁 이후 열려진 공간을 활용해 대중강좌를 열어보자는 의견이 제기되었고, 그 실무를 내가 맡게 되었다. 그래서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의 외곽사업으로 청년학교 준비를 시작했다. 6월항쟁 이전에 군사독재의 험한 탄압에 굴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열린 공개 대중강좌는 서울민중연합의 민족학교밖에 없었다. 당연히 민족학교는 우리 청년학교 준비팀이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본보기가 되었고, 청년학교가 출범하게 되면서 우리는 민족학교로 인사를 갔다. 거기서 그 선생님을 뵙게 된 것이다. 그때 민족학교를 만들어서 이끌어온 분이 바로 그 선생님이었다. 운동 진영 근처에서 왔다갔다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귀동냥한 터에 고등학생 때의 설렘을 그대로 간직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선생님께 직접 인사를 드리게 된다는 것은 아주 긴장되는 일이었다. 그때 그분이 한나라당 이재오 의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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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헌법을 비판하기만 해도 징역을 살리는 긴급조치가 시퍼렇게 살아 있던 1970년대 말, 학생운동 내에는 현장론이란 것이 퍼져가고 있었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이 있기 전인 1960년대부터 극히 일부지만 학생운동 출신의 선구자들은 결국은 기층민중인 노동자들이 조직돼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노동현장으로 들어갔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인한 대량 제적 사태를 겪으면서 일부 제적생들은 학생 신분에 대한 미련을 아낌없이 포기하고 기름밥을 먹기 시작했다. 이들이 이른바 ‘위장취업’의 효시인 셈인데, 학생운동의 계보를 따진다면 ‘과학적 사회주의’ 그룹을 줄여서 ‘과사’라고 불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때도 4·19 때 무엇무엇 했다는 화려한 경력의 선배들이 별의별 꼴을 다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에, 4·19 세대가 기성세대를 우습게 봤던 것처럼, 후배들도 4·19 세대나 6·3 세대를 한때의 겉멋으로 분위기에 휩쓸려 운동하다가 뿔뿔이 제 갈 길을 간 사람들로 치부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런 속에서 ‘과사’에 속한 사람들은 평생을 두고 운동을 하겠다는 결의를 갖고 고통받는 민중 속으로 들어갔다는 점에서 전설처럼 소문으로만 듣는 것이었지만 무언가 있는- 그게 뭔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본받을 만한 선배로 존경을 받았다.

이렇게 현장에 들어간 선배들 중에서 후배들 사이에서 제일 많이 이름이 거론되던 사람은 ‘과사’ 그룹의 창시자 격인 김정강이었다. 15년간 현장 노동자로 활동하면서 멀리 대학가에까지 풍문으로 전해지던 김정강은 그러나 1980년대 초반, 전두환의 민주정의당 전문위원이 되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전설처럼 전해지던 대선배가 광주학살의 주범이 만든 정당에 가담하다니…. 충격은 컸지만, 꼭 선배를 보고 운동을 했던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리고 노동현장에는 더 좋은 선배와 동료들이 많이 들어가 있었다. 현장에서 투쟁을 이끄는 선배들의 소식도 종종 들을 수 있었다. 노조 하나 만들기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려웠던 시절, ‘학출’(학생 출신의 줄임말- 그때 이런 줄임말, 엄청 많이 썼다)이 노조위원장까지 되어 신화를 남긴 이가 있었다. 경찰이 그를 빨갱이라며 잡으러 왔을 때 노동자들이 “우리 위원장님”이 왜 빨갱이냐며 감싸고 나섰다는, 대중사업이란 모름지기 저렇게 해야 한다는 모범으로 그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그 뒤 그는 전태일 기념사업회의 사무국장으로서, 서노련의 지도부로서, 그리고 유명한 인천 5·3 사태의 지도자로서 명성을 이어나갔다. 복잡한 운동판에서 그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노동운동의 대부’라는 칭호를 들으며 그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진보에서 수혈받은 보수 기득권층의 비극

나는 그 전설적인 선배와 정식으로 인사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1985년쯤 한번 우리 집에 와서 자고 간 적은 있다. 나와 아주 친한 선배가 밤 12시가 다 되어 전화를 하더니 “너희 집에 지금 손님 없지?” 하고 물었다. 여기서 ‘손님’이란 다른 수배자 혹시 와 있지 않느냐는 뜻이다. 없다는 말에 그럼 집 좀 쓰자 하더니 내가 제대로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20분쯤 지나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었더니 사람들이 꾸역꾸역 한 열명쯤 들어왔다. 선배에게는 안 물어보았지만 아마도 서노련 지도부쯤 되지 않았나 싶다. 밤샘회의를 하기로 했던 장소가 문제가 생겨 갑자기 들이닥친 것이다. 그 중 안경을 낀 한 사람은 유달리 내 책장에 꽂힌 책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일제 시기 간행된 <동아일보>의 축쇄판을 꺼내 유심히 보는 자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그가 바로 유명한 그 노동운동가 선배구나 하고 직감했지만, 그 당시의 예의상 누구인지 물어보지 않았다. 그가 바로 지금의 한나라당 김문수 의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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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너무 바쁜 탓에 텔레비전 뉴스도 제대로 못 보고 지날 때가 많다. 그런데 며칠 전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돌발영상’을 보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탄핵 사태 때의 영상을 재방송해주는 게 아닌가 착각할 정도였다. 울부짖으며 서류를 집어던지고, 명패를 날리고, 비장하게 애국가를 부르고…. 70년대, 80년대 노동자들이 일당 100원을 올려달라고 하다가 빨갱이로 몰려 전투경찰에 번쩍 들려갈 때 저렇게 처절하게 몸부림쳤을까. 그런데 하나도 슬프지 않고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주위 사람들도 다 그런 듯싶었다. 누군가 저렇게 처절하게 몸부림치며 울부짖는데, 공감은커녕 웃음이 나오다니…. 언젠가 이 난에서 사람들에게 “맛이 갔다”는 말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라고 점잔을 뺀 적이 있지만, 그런 나도 ‘학실’하게 말할 수 있다. 저 양반들 정말 맛이 갔다고. 아니, 그들이 맛이 간 거야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 것이니 새삼 문제될 것은 없다. 어디까지 더 맛이 갈지, 그게 문제일 뿐이다. 울퉁불퉁하기 짝이 없는 우리 현대사를 공부하다 보니, 망가진 사람들, 갈 데까지 맛이 간 사람들 참 많이 보았지만, 이렇게 날로 새롭게 ‘오버’하는 사람들은 나도 처음 본다. 개인적으로 잘 아는 분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스무살 되기 전부터 이름을 들으며 나름대로 흠모한 적이 있던 분들이기에 저 사람들이 왜 저렇게 망가져가는지에 대해 조금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역전의 용사 김문수나 박계동이 독재 시대로 돌아갔다며 울부짖는 모습이나 문을 걸어잠그고 농성하는 것을 보며 나는 생뚱맞은 광경을 떠올렸다. 그 울부짖음은 마치 산전수전 다 겪은 백발의 노장군들이 모여 손자들하고 노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끼리 진지하게 편을 가르고 병정놀이하는 모습과도 같았다. 나름대로 신화를 가지고 유명했던 김문수, 이재오, 박계동, 배일도 등에게 지금 보여줄 것이 저런 쇼, 쇼, 쇼밖에 없다는 것은 그들만의 비극이 아니라, 그들을 영입한 기득권층의 비극이요, 그런 기득권층밖에 갖지 못한 대한민국의 비극이다.

민간인 학살이 휩쓸고 지나간 한국 사회에서 진보는 씨가 말랐다. 함석헌, 장준하, 문익환, 계훈제, 이영희 등의 젊은 시절의 경력이 보여주는 것처럼 한국 사회에서 반독재 세력, 나아가 진보의 싹은 보수 진영 내에서 나왔다(<한겨레21> 371호, ‘참된 보수를 아십니까’). 그런데 진보만 보수로부터 인적 자원을 충원받은 게 아니었다. 보수가 자기 혁신을 하지 못하면서, 보수 기득권층은 계속 반독재 진영, 또는 진보 진영으로부터 인적 자원을 충원받으면서 기득권을 지켜왔다. 선거 때만 되면 마치 흡혈귀마냥 “새 피, 새 피” 또는 “젊은 피, 젊은 피” 하면서 새 사람 찾는 데 혈안이 되었고 그렇게 공급된 새 피가 순식간에 오염되는 것이 바로 한국의 선거사요, 정당사였다.

중부지역당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빠지지 않는 남민전의 핵심 간부 출신인 이재오가 한나라당의 원내총무와 사무총장을 지냈고, 1946년 ‘10·1 대구폭동’ 이후 최악의 폭동이었다는 ‘인천 5·3 사태’의 주역이자 ‘좌경용공 과격단체’ 서노련의 핵심이었던 김문수가 한나라당의 공천심사위원장이 되었다. 어디 이재오, 김문수 등 민중당 출신뿐이겠는가? 1990년의 3당 합당과 민자당의 출현은 불임증에 빠진 기득권 세력이 반독재 세력으로부터 힘을 얻어 생명을 지탱해간 대표적 사례다. 지금 기득권층의 러브콜을 받고 있는 뉴라이트는 극렬 주사파 출신이 대부분이고, 뉴라이트에 대한 러브콜을 쏘아대고 있는 <조선일보>의 류근일 전 주필은 1950년대 말부터 무산계급이 주인되는 사회를 주장해왔으며, 1974년의 민청학련 사건 때도 배후로 구속된 바 있다. 이들만큼 극적이진 않았어도 4·19, 6·3 사태, 민족주의비교연구회 등의 주역들은 그 상품성을 인정받아 비싼 값에 영입된 바 있다.

뉴라이트하고는 분명히 다른데…

지금 한나라당은 여전히 친일세력부터 이어져오는 기득권층을 대변하고 있지만, 인적 구성은 박정희의 공화당, 전두환의 민정당은 물론이고, 노태우, 김영삼 등의 야합으로 출현한 민자당과도 전혀 다르다. 끊임없이 새 피가 충원되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이재오는 “우리가 한나라당에 없었다면 한나라당이 지금 야당으로서 모습을 갖췄겠는가”라고 자신 있게 주장한 적이 있다. 그러나 기득권층의 불행은 어렵게 들여온 양자마다 족족 불임이 되고 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힘과 돈이면 무엇이든 되던 시대에 그 동네 밭의 토양 자체가 너무나 오염된 탓일 것이다.

김문수나 박계동은, 어쩌면 이재오도 받아쓰기만 잘하던 뉴라이트하고는 경험의 폭과 깊이가 다른 사람이다. 그런데 왜 그들이 뉴라이트와 난형난제할 정도로 망가졌을까? 1987년 6월항쟁 이후 형성된 이른바 ‘87년 체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87년 체제가 만들어질 당시에, 그리고 아주 오랜 동안 한국의 정치 지형에서 주된 대치선은 6월항쟁과 같은 민주 대 반민주의 대립을 따라 그어진 것이 아니다. 점잖게 얘기하면 그 대치선은 지역주의에 따라 그어진 것이고, 톡 까놓고 얘기하면 DJ 대 반DJ의 대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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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군사정권에게 얻어맞아가며 한 식구가 되었던 재야 민주화운동 세력은 ‘비지’(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와 ‘후단’(후보 단일화로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친김영삼 경향이 강했다)으로 갈라졌고, 일부는 독자 후보를 주장했다. 지역감정의 골은 민주화운동 진영 내에도 너무나 깊게 파여버렸다. 역사에 만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지만, 김대중과 김영삼이 1987년에 서로 손을 잡았다면 그 선거에서 노태우가 당선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둘 중의 한 사람은 대통령이 되고 다른 한 사람은 여당 총재로 차기 대통령이 되는 것이 보장되었다. 그러나 서로 먼저 대통령을 하겠다고 나서서 6월항쟁의 성과는 죽 쒀서 개 주고, 각각 제1야당과 제2야당의 총재가 되었다. 비지쪽에서는 김영삼쪽에 “거 봐라, 3등밖에 못할 거, 알아서 양보하지”라고 탓했고, 김영삼쪽은 “4자 필승론을 들고 나와 분열을 부추긴 게 누군데”라며 책임을 물었다. 그 골은 상상 이상으로 깊었다. 선거 결과에 대해 누구도 군사독재에게 패배했다는 점을 뼈아프게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저놈 때문에 졌다”고 눈을 부라렸다. 이재오는 문익환 목사 등 노인들을 상대로 한 언행이 문제가 되어 징계를 받게 되자 추종자들을 이끌고 민통련을 이탈했다.

김대중에 대한 미움은 광주학살의 원흉에 대한 미움보다 컸다. 김영삼이 먼저 노태우, 김종필과 손을 잡았고, 지면이 부족하니 그냥 짧게 얘기해서 가출정치 등 특유의 뚝심으로 민자당 후보가 되고 결국 대통령이 되었다. 김영삼은 군부의 하나회 숙청 등으로 한때 90%가 넘는 지지를 구가하며 개혁을 제대로 해나갈 듯싶었다. 잠시 온 국민을 들뜨게 한 김영삼의 개혁이라는 환상, 김대중이 미워 홧김에 서방질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비단금침을 펴준 격이었다.

호랑이 잡으려면 길목을 지켜야 한다

사실 김문수 같은 사람이 노동운동에 남아 있지 못하고 왜 정치를 하고자 했을까? 그가 소리 높이 부르짖던 노동운동의 정치세력화를 구현하기 위해 ‘구국의 결단’ 차원에서 이 한 몸 내던진 것이었을까? 아무튼 결단 한번 크게 했다가 사람 완전히 결딴났다. 김문수도, 이재오도 당시 운동 진영 내에서 스스로 생각하기에 할 일이 없었다. 노동해방이 이루어졌나, 아니면 조국통일이 실현되었나, 왜 할 일이 없었겠는가? 자신들이 대장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좀더 원대한 일을 하려면 역시 정치를 해야 하고 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들이 주도한 민중당은 선거에서 ‘조직의 쓴 맛’을 톡톡히 보면서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여기에 ‘이선실 간첩사건’이 터지면서 민중당에 간첩의 공작금이 유입되었다는 의혹까지 겹치게 되었다. 민중당 간판 갖고는 죽었다 깨어나도 선거에서 당선될 수 없었다. 한나라당에 입당한 뒤 이재오가 이야기한 것처럼 “내가 그토록 민중을 위해 정치한다고 했지만 민중들은 나에게 표를 안 찍어주고 우리를 외면”한 것이 아마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았던 것 같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민중당 상층부의 상당수, 특히 김문수, 이재오 같은 영남 출신들은 김영삼의 개혁에 힘을 실어준다는 미명 아래 학살의 후예들이 여전히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도 성큼 발을 들여놓았다.

그들은 호랑이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늙어죽은 호랑이 가죽 벗겨오는 거면 또 모를까, 홈그라운드에서 잡혀죽는 호랑이가 어디 있으랴? 진짜 호랑이 사냥하는 포수들은 길목을 노리지,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바보짓은 하지 않는다. 노동자의 아픔을 대변한다는 김문수가 1997년 노동법 날치기에 앞장섰을 때도 일부에서는 당이 당이니만큼 어쩔 수 없겠지 하고 봐주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갈수록 그게 아니었다. 우리말에 ‘적당히 해’나 ‘정도껏 해’ 같은 말이 있는데, 이런 말을 충고라고 하기에는 그들은 너무 많이 나가버렸다. 1997년과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문수, 이재오는 이회창이 진보는 아닐지라도 부패하지는 않았지 않느냐고 스스로를 달래며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섰다. 그러나 두 차례의 선거에서 연이어 패배했다. 특히 자기들이 열심히 운동하던 유신 시절에 고시공부해서 판사가 되고 변호사 개업해서 돈 벌다가 뒤늦게 지방에서 운동을 한 노무현에게 졌다는 것은 운동권 핵심을 자부하는 그들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런 증세는 노무현과 같이 꼬마 민주당을 했던 박계동이 오히려 가장 심한 것 같다.)

노무현의 명패와 김문수의 명패

자신이 양자로 들어간 대갓집을 본때나게 일으켜세우고 싶건만, 일은 계속 꼬이기만 하고, 엄청난 좌절감 속에 전망은 보이지 않고, 한나라당을 이끄는 유신 공주 치마폭에 안주하는 것은 스스로 지워버리지 못한 운동권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못하고, 운동 같지 않은 운동했던 경력 갖고 꺼떡거리는 뉴라이트들에게 도와달라는 것 역시 차마 할 짓이 아니고, 그리고 뭔가 보여달라는 기득권층의 요구는 멈추지 않고… 그러니 뒷발질하며 명패라도 던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 날아가는 명패를 보며 나는 1989년 1월1일 국회 본회의장의 허공을 가로지른 또 다른 명패가 생각났다. 초선 의원 노무현이 던진 것이었다. 3당 야합으로 가는 길목에서 5공청산은 유야무야되었고 백담사에서 하산한 전두환은 여유 있게 발언을 마치고 의사당을 빠져나갔다. 그 빈자리에 말없이 앉아 있던 노무현이 명패를 던진 것이다. 지금의 노무현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지만, 나는 솔직히 그때 노무현에게 반했다. 그가 명패라도 집어던지지 않았더라면, 내가 텔레비전을 집어던졌을지도 모를 그런 기분이었다. 그런데 왜 김문수가 던진 명패를 보면서는 쓴웃음만 날까?

우리 모두는 젊은 날의 이런저런 꿈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그런데 지나놓고 보면 그때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싶을 때가 있다. 어렸을 때 기자가 되고 싶었는데, 하필이면 <조선일보> 기자가 되고 싶었던 것. 그리고 후배들에게 인생 저렇게 살지 말아라라고 말해줘야 할 반면교사가 되어버린 이재오를 배우고 싶은 선생님으로, 김문수를 닮고 싶은 선배로 생각했던 것. 그런 꿈이 이루어졌으면 어떡할 뻔했나 생각하면 머리가 곤두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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