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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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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돌이표 질문1

등록 2004-06-24 15:00 수정 2020-05-02 19:23

[겸이 만난 세상]

겸/ 탈학교생 queer_kid@hanmail.net

1년 전쯤 난 토론공간 ‘왜냐면’에 탈학교 청소년이자 동성애자였던 고 육우당 추모의 글을 실으며 청소년 동성애자로서 대사회 커밍아웃을 했다. 운이 좋게도 당시 난 집으로부터 독립한 상태였고 커밍아웃을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친구가 있어 커밍아웃을 하기에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그러나 깊은 성찰 없이 “될 대로 되라지!” 하는 마음에 했던 커밍아웃에 대한 의문은 이후 배로 증가한 힘으로 다시 내게 돌아오는 부메랑 같았다.

소속된 집단이 없던 내게 커밍아웃에 대한 부담 중 호모포비아(동성애 혐오)는 고려할 대상이 아니었다. 으레 가장 걱정하는 가족과의 관계도 부모님이 알고도 모른 채 함구하고 있어 아직까진 드러난 문제는 없었다. 혐오적인 발언이래봐야 ‘청소년 동성애 유해한가’라는 다소 황당한 주제로 진행된 TV토론에서 한 아주머니가 그 자리에 참석한 나를 향해 “본명을 쓰지 않고 겸이라는 가명을 쓰는 것이 당당하지 못해 그런 게 아니냐. 이런 주제로 토론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불쾌하다. 내 자식들이 이 방송을 볼까 두렵다”라는 말을 한 정도이다. 당시에는 꽤 상처를 받았지만, 이제는 그런 사람들은 그냥 ‘쿨’하게 멍청하다고 생각하면 그만이기 때문에 더 이상 그런 혐오적인 발언들은 고민거리가 아니다.

문제는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얼마 되지 않은 친구들 중 남성들과 점점 멀어진 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성적 주체로서 자신을 인식할 기회가 없었던 남성들과 대화할 때면 어긋나는 성 감수성이 매우 거슬린다. 커밍아웃 이후 대부분의 남성 친구들은 종종 나를 탈성화된 존재로 대하며 모든 대화에서 성적인 맥락을 제거하거나 어쩌다 성적인 농담을 던질 때도 불쾌해할까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들을 대하는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재미있는 건 이전엔 관심도 없던 이들이 동성애를 호기심 차득 찬 눈으로 바라보고, 나를 앞에 두고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의미를 찾고자 나름대로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이른바 좌파라 불리는 친구들이 동성애 인정이 진보의 척도라도 되는 양 “시민들이 가져야 할 동성애에 대한 올바른 시선은 무엇인가” 따위의 질문을 할 때면 그걸 악의 없는 순수함으로 봐야 할지, 나를 사회에 존재하는 동성애자의 표본으로 착각하는 건지 헷갈린다. 동성애 정체성을 둘러싸고 차별과 인권이라는 판에 박힌 질의응답이 되풀이될 때마다 속으로 난 “그런 질문은 집어치우고 이태원에 가서 춤이나 춰”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들은 나를 동정이라도 베풀어야 할 착한 동성애자 정도로 착각하고 있지 않나 싶다. 그래서 지금 난 커밍아웃을 다시 고민하려 한다. 단순히 자신의 성 취향을 밝히고 다시 이성애 제도 안에 편입되는 커밍아웃이 아니라 이성애 중심 사회에 균열을 가하는 위협적이고 불쾌한 존재가 되기 위한 퀴어로서의 커밍아웃을 말이다. 커밍아웃에 대한 풀리지 않는 도돌이표 질문은 다음주에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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