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윤민석] 윤민석, 당신은 철들지 마세요

등록 2004-04-13 15:00 수정 2020-05-02 19:23

80년대에서 응고돼버린 민중가요 작곡가의 순수 영혼… 그를 위해 우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글 오지혜(영화배우) · 사진 박승화 기자

1989년. 당시 대학 3학년이던 나는 비록 운동권 학생은 아니었지만 임수경 학우가 북한엘 가는 걸 보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드랬고 당시 임종석 전대협 의장이 그 소식을 알리자 그 자리에 있던 전대협 학생들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전대협 출정가를 불렀다는 얘길 듣고 소름이 돋았드랬다. 강철 같은 자신들의 대오를 총칼로 짓밟는 군부를 향해 조금 더 밟아달라고 더 쳐달라고 그래야 자신들의 날이 더 설 테니라는 내용의, 그야말로 ‘시뻘건’ 노래가사를 전해듣고 도대체 그런 노래는 누가 만드는지 정말 궁금했더랬다.

첫 유료 CD…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

1997년. 대학로 최고 히트 연극이었던 극단 ‘차이무’의 라는 공연을 할 때 극중에서 내가 개량한복을 입고 나와 를 라이브로 부르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 노랠 모르는 관객을 거의 보지 못했고 다들 너무나 흥겨워하며 그 노랠 따라 불렀던 기억이 있다. 2002년인가? 동계올림픽에서 오노가 금메달을 도둑질해 갔을 때 누군가가 내 홈페이지에 ‘너무나 속시원한 노래’라고 올려준 를 듣고 그 노랠 만든 이름 모를(?) ‘무당’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했드랬다. 부시를 골로 가게 할 뻔했던 ‘기특한 과자’를 찬양(?)한 노랜 또 얼마나 한 많은 우리들을 위로해줬던가? 부시를 쓰러뜨린 기특한 과자라고 치켜세워주며 한을 위로해줘서 고맙긴 한데 ‘배후’가 어디냐면서 이제 그 과자 만든 나라는 부시한테 끝장났다고 걱정해주는 대목에선 다들 뒤로 넘어갔드랬다.
2004년. 수십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면서 이뤄내려는 참 민주주의가 이제 막 눈앞에 보이는데 어처구니없이 ‘빽도’를 해버리려고 하는 탄핵 정국을 맞아 우린 모두 길거리로 뛰쳐나갔고 그 자리를 더욱더 가열차게 결집시키는 노래 하나에 사람들은 심하게 다쳐서 나온 가슴을 응급처치 받을 수 있었다. ‘“…개 같은 세상, 거꾸로 된 이 나라 누군가는 바로잡아야 하겠지만 그래도 너흰 아니야 제발 나라 걱정 좀 하지 마. 너흰 그럴 자격 없어. 너희만 삥 안 뜯어도 우리 경제는 살아날 거야. 제발 나가 있어….” 그래도 너흰 아니야…. 정말 명가사였다. 너무 신나고 너무 좋아서 당장 내 홈페이지에 올렸다.
그런데 그러고 나니 아무리 본인이 맘껏 퍼가라고 허락한 것이지만 이렇게 애써서 만든 다른 딴따라의 ‘작품’을 몰래 훔쳐온 거 같아 맘이 불편했다. 사용료를 빙자한 후원금을 내려고 사이트에 들렀다가 깜짝 놀라고야 말았다. 위에 말한 ‘시대의 명곡’들이 모두 한 사람, 윤민석이라는 사람이 만든 노래였던 거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 노래들 이외에 여기저기서 귀동냥하며 들어온 수많은 민중가요들 중 태반이 그의 손에 의해 나온 것들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의 ‘가슴’에 의해 만들어졌다 해야 할 것이다. 진작에 몰라본 내 무지함이 부끄럽고 왠지 미안하기까지 했다.
어차피 상업음악으로 맞선다 해도 게임이 안 되긴 하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열심히 만든 노래, 많은 사람들을 위로해주는 노래들을 무조건 공짜로 막 퍼가게 하는 이유를 물었다. 유월항쟁 세대들이 정치판으로 나가고 그때의 동료 딴따라들이 상업음악으로 랜딩했던 선례들이 너무 많아서 조심스러웠단다. ‘달라야’ 한다는 강박증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조금 ‘노선’을 바꿨다. 처음으로 유료 CD를 제작했고 많이 팔리면 좋겠다고 말한다. 하나 그것조차도 마누라한테 갖다줄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일을 그만두지 않을 수 있게 진행만 할 수 있었으면 하는 순수한 차원이었다. 그의 역사의식과 곡 만드는 수준은 끝없이 변화하며 발전했겠지만 내 보기에 그의 순수함은 80년 중반에서 응고돼버린 영혼 그대로인 거 같았다. 최소한 십년은 어려 보이는 그의 외모도 그걸 말해준다. 자고로 철이 안 들면 사람은 안 늙게 돼 있기 때문이다.


그의 가족이 고생을 하건 말건 그가 영원히, 아니 이런 노래들이 더 이상 필요치 않은 세상이 올 때까지 그가 철이 들지 말았으면 좋겠다. 안 그래도 있던 동지들마저 하나둘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민중가요라는 판을 떠나고 있는 판에 그마저 돌아서버리면 만약에 저들이 또다시 미친 짓을 할 땐, 그땐 광장에 모인 우리들은 무슨 노래를 부르며 힘을 얻겠는가. 사람들에게 희망과 위로는 주면서 대가는 바라지 않는 그를 바보라고 책망하는 사람에게 그는 그래도 목숨을 내어준 친구보다는 낫지 않느냐고 대답할 것 같았다.
경북 영주. 말만 들어도 골치 아픈 동네가 그의 고향이다. 게다가 동네 유지의 아들이었으니 부모님의 실망은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항상 1, 2등을 다투던 고향친구 하나는 지금 검사가 되어 있는데, 지금도 고향에선 그 친구는 자식농사성공 케이스이고 자신은 실패 케이스의 샘플로 거론된다고 한다. 부잣집 공부 잘하는 도련님이었던 그는 당연스레 서울에 있는 대학을 다니게 되고 ‘우연히’ 광주 사진을 보게 되고 ‘하필이면’ 음악하는 재주를 갖고 태어나 오늘날에 이른다.

'부자아빠' 카피가 섬뜩했지만…

함께 노래운동 하다 만난 아내는 지금은 늦게 가진 아이를 돌보면서 영어과외로 모자란 생활비를 보충하고 있지만 조만간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다. 남편으로서가 아니라 작곡자로서 그녀의 노래실력을 썩히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고집스레 이 판을 떠나지 못한 죄로 아내에게 늘 미안했지만 요즘 갑자기 ‘뜨’는 덕택에 유료회원이 늘어서 그나마 체면이 좀 선다. 그에게 가 효자둥이인 셈이다. 회원의 연령층이 초등학생에서부터 70 노인까지라는 게 의외다. 한 초등학생은 여자친구가 자기 맘을 몰라준다면서 그 친구를 욕하는 노랠 만들어달라는 ‘의뢰’를 하기도 한단다. 더 이상의 무당이 어디 있으랴.
그는 요즘 행복하다. 돈은 여전히 없지만 세상을 변화시키는 노래를 하는 게 꿈이었는데 과정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매스컴에 노출된 현실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었다. “이젠 만방에 알린 상태니 빼도 박도 못하게 됐죠. 근데 오히려 딴 짓을 못하게 된 ‘장치’가 스스로에게 생긴 거 같아 다행이고 속 편해요”라면서 속없이 씩 웃는다. ‘부자아빠’라는 잔인한 광고카피가 이 땅의 많은 가난한 아빠들의 기를 죽였던 적이 있다. 그도 그 중 하나였다고 홈페이지에 고백했다. 섬뜩하더란다. 나중에 딸아이가 자라서 자신이 하고 싶었던 걸 제대로 해주지 못한 부모를 원망할까봐 두렵지만 좋은 일 하느라 그랬다고 설명해줄 것이고 그런 부모를 자랑스러워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애국하는 일과 좋은 부모 됨이 상충되지 않고 애국하는 일과 효도하는 일이 상충되지 않는 세상이 빨리 오면 좋겠다고 한다.
살면서 옷깃을 여미게 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옷깃만 여미고 말 일이 아니다. 위로받았다면 충분히 ‘즐감’했다면 양심껏 ‘지불’을 해야 하겠다. 무당도 밥은 먹어야 할 게 아닌가.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