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문화가 머무는 ‘도시의 쉼터’

등록 2004-01-15 15:00 수정 2020-05-02 19:23

예술의 향기로 마음 달래는 ‘게릴라 스페이스’들… 상업성 배제한 뒷골목에서 문화적으로 거듭나보렴

연극의 거리, 미술의 거리, 젊음의 거리…. 제아무리 문화의 거리라도 돈이 모여들면 변한다. 지하극장과 작업실이 있던 자리가 고만고만한 술집과 카페로 채워지고 고깃집 불판이 곳곳에서 이글거린다. 키 낮은 건물들이 올망졸망하던 곳에 고층 건물이 쑥쑥 올라가고 자동차와 사람이 뒤엉킨다. 거리가 바뀌니 드나드는 사람들도 달라진다. 이 풍경을 실눈 뜨고 째려본다. 도대체 ‘문화’는 어디에 있지 투덜투덜.

그래도 투덜이들을 달래주는 곳이 있다. 상업화의 파고 속에서도 낮은 자세로 포복하고 이 도시의 진지한 여행자를 기다리는 공간들, 가벼운 몸피로 고군분투하며 가려운 욕구의 지점을 긁어주는 곳, 갤러리나 박물관이라면 왠지 근엄하고 ‘부담스러운’ 곳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풀어주는 ‘게릴라 스페이스’들이 도시 곳곳에 출몰하기 시작했다.

동네 목욕탕이 종합 문화 공간으로

떠들썩하고 화려한 가게들이 즐비한 대학로의 뒷길로 한참 걸어들어가는 주택가와 학교 뒷담이 만나는 곳에 자연스레 서 있는 건물, 어느 동네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흰 타일벽 건물에 큼직하게 붙어 있는 연극 포스터가 신기해서 다가가면 ‘정미소’ 갤러리(02-743-5378)와 소극장(02-3672-3001)을 만날 수 있다. 너무나 편안한 겉모습처럼 5층짜리 이 건물은 1~2층에 동네 목욕탕이 있었다. 배우이자 이곳 대표인 윤석화씨와 건축가 장윤규(운생동 대표)씨는 2002년 가을부터 버려진 공간인 이 건물을 소극장과 갤러리, 문화 전문지 , 디자인카페 등이 모여 사는 종합 문화 공간으로 변신시켰다.

이 건물은 폐허 위에서 ‘자라나는 건물’이다. 장윤규씨는 “목욕탕을 뜯어낸 자리의 폐허를 완전히 없애고 깔끔하고 비싼 재료로 리노베이션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시간의 흔적이 있는 공간으로 이용하고 싶었다. 어차피 목돈도 없으니까 형편이 되는 대로 검소하지만 풍요롭게 조금씩 건물을 변신시켜갈 계획”이라고 설명한다. 갤러리에서는 목욕탕 타일을 뜯어낸 자리인 그대로 드러난 시멘트 벽돌 위에 움직일 수 있는 흰 벽을 만들어 작품을 걸었고, 삐져나온 철근들이나 천장을 이리저리 달리는 설비관들도 고스란히 ‘작품’처럼 보여진다. 아랫층 극장과 윗층은 훤히 들여다보이는 유리바닥(또는 천장)을 통해 소통하고 있다. 연극과 음악, 미술이 서로 소통하는 문화 네트워크를 만들겠다는 이들의 목표를 상징하는 셈인데, 지금 이곳에서는 도심 사무실과 주차장, 대형 할인점의 ‘맨얼굴’을 통해 도시의 뒷모습을 보여주는 김상길씨의 사진들과 영혼의 상처를 간직한 19살 젊은이가 아름다운 할머니를 만나 삶과 사랑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는다는 내용의 박정자씨 주연 연극 (한태숙 연출)을 모두 만날 수 있다.

장윤성 갤러리 정미소 디렉터는 “알곡을 찧어내어 쌀겨를 털어내고 낱알을 만들어내는 정미소, 즉 방앗간처럼 갤러리·소극장 정미소 역시 문화적 열망과 동력을 찧어내어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공간을 만들려 한다. 또 기존 대안공간들이 대중성이 부족했다는 비판의식을 가지고, 젊은 작가들에게 기회를 주되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작품들을 보여주자는 의도로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다”고 말한다. ‘작가의 물리적 나이와는 상관없이 새로운 감각을 보여주는 젊은 작품’이 이 갤러리의 전시 기준인데 지금까지 비비하, 박준범씨 등의 개인전이 열렸다.

자물쇠가 예술로 다가오는 쇳대 박물관

‘정미소’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시뻘겋게 녹이 슨 거대한 철판으로 뒤덮인 건물은 겉모습만으로도 호기심을 자아낸다. 건축가 승효상씨가 ‘하룻밤 사이에도 가게와 거리의 겉모습이 변하는 가볍고 어지러운 대학로의 파편적인 도시 풍경 속에 묵중한 쇠 같은 새로운 긴장’을 형상화해 설계했다는 이 건물은 설계도와 모형이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된 ‘명물’인데, 이곳에 지난해 11월 ‘쇳대 박물관’(02-766-6494)이 문을 열었다. 쇳대는 열쇠의 사투리. 이곳은 우리나라와 세계의 옛 열쇠와 자물쇠들을 모아 보여주는 곳이다.

4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서 어둡고 차분한 조명 속으로 들어서면 통일신라 시대의 ㄷ자 모양 자물쇠부터 섬세하고 화려한 고려시대 청동 자물쇠, 조선시대 서민들이 사용한 투박한 무쇠 자물쇠, 은입사 등 화려한 장식이 들어간 양반들의 자물쇠, 현무나 물고기 모양을 한 빗장, 기하학적 모양의 복잡한 구조를 간직한 중세 유럽의 자물쇠, 낙타·사자 모양이 정교한 중동 지방의 자물쇠 등 300여점이 정성스레 정리돼 있다. 함, 반닫이, 뒤주, 장롱, 곳간, 성문 등에 달려 일상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을 이 열쇠들을 보면서 옛날 사람들의 삶을 마음껏 상상해보게 된다. 눈길을 끄는 것은 오늘날의 열쇠고리와 비슷한 열쇠패, 특히 양반가에서 딸이 시집갈 때 어머니가 만들어 혼수상자에 넣어줬다는 열쇠패들은 색색의 실에 수많은 엽전들을 꿰고 부귀를 상징하는 박쥐 모양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돼 있는데, 집안 살림을 지키는 안주인의 권위를 상징했다. 노민경 큐레이터는 “조선후기로 올수록 자물쇠들이 많이 사용됐는데, 상서로운 글귀나 십장생 등을 새겨 복을 가져오거나 집안을 지켜주는 상징으로 크게 유행했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전시실에 전시돼 있는 자물쇠들은 이곳 소장품의 10% 정도, 전시실 뒤 수장고 속에는 나머지 2700점의 자물쇠와 열쇠가 가득 정리돼 있다. 수작업으로 만드는 예술적인 철제 인테리어 용품으로 유명한 ‘최가네 철물점’ 최홍규(47) 대표가 열아홉살 때부터 모아온 것들이다. 최 대표는 70년대 중반 대학 진학에 ‘실패’하고 학원비를 벌어 재수를 하기 위해 을지로 철물점의 임시직으로 일을 시작했다가 따뜻하고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쇠맛에 빠져 ‘예술적인 대장장이’로 살아온 이다. 100~200년이 지난 뒤 쇠의 질감, 수공으로 만들어진 자물쇠의 기법과 디자인 등을 연구하기 위해 그가 모아온 열쇠들이 결국 박물관이 되었다.

삼각지에 가면 당신도 문화인이 된다

서울 용산의 삼각지는 ‘대중적’ 미술품의 거리로 유명한 곳이다. 서울 한복판이면서도 일본군과 미군이 차례로 주둔하며 ‘낙후된 남의 땅’이 되었던 이 지역으로 싼 임대료를 찾아 ‘그림쟁이’들이 모여들어 액잣집과 소규모 미술품 공장, 화랑들이 줄지어 있는 거리를 형성했다. 이곳은 ‘이발소 그림’의 원산지로 꼽히는데, 경륜 있는 사람이 밑그림을 그리면 여러 명이 나누어 색칠하고 화가 지망생들이 후반작업을 하는 대량생산 시스템으로 대중들을 겨냥한 미술품을 값싸게 생산하면서, 주류 미술계의 ‘멸시’를 받아왔다. 이곳 주택가 골목의 작은 집을 개조해 지난해 문을 연 ‘가갤러리’(02-792-8736)는 ‘우리에게 집은 무엇인가’를 묻는 15명 작가들의 ‘집전’, 독신의 자유로움과 외로움, 빛과 그늘을 보여준 ‘싱글싱글전’, 산과 물과 사람을 낯설게 보여주는 흔경(흔적과 풍경)전, 화가 백지희씨와 사진가 유현민씨의 전시회 등 주목받는 전시들을 기획해 새삼 이 거리를 새롭게 보게 했다.

스페인 문학을 공부하다 연극을 만나 배우가 됐고, 그곳에서 만난 미술인들과 친해져 다시 회화의 맛에 흠뻑 빠졌다는 안광조 ‘가갤러리’ 관장은 이곳을 젊고 개성 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대중과 만나게 하는 전시공간이면서 동시에 합리적인 가격으로 미술품을 거래하는 공간으로 키우고 싶어한다. “우리 갤러리는 비영리 대안공간이 아닌 상업적인 화랑이다. 다만 인사동이나 강남의 고급 갤러리처럼 일반인과 거리가 먼 부유층만의 미술이 아니라, 미술을 좋아하는 보통 사람들도 작품을 살 수 있는 합리적인 상업 시스템을 정착시키는 장소로 만들려고 한다.”

안 관장은 또 최근 삼각지 미술판의 변화에도 관심이 많다. “최근 용산기지 이전, 도시개발 계획과 맞물려 땅값, 임대료가 뛰면서 수십년 동안 터를 다져온 이곳 화랑과 액잣집들이 사라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삼각지 미술을 ‘저급한 상업미술’로 폄하하지만 실제로 일반 대중들이 자주 만나는 미술은 카페나 식당 벽에 걸리는 이곳 미술이다. 동남아에도 많이 수출되는데 그곳에서는 삼각지 작품이 명실상부한 ‘한국 현대미술’이다. 어쨌든 이곳은 우리 미술의 독특한 한 풍경인데 사라지기 전에 제대로 기록됐으면 좋겠다.”

홍대앞 놀이터 거리 한쪽 6평 남짓한 주택가 차고를 개조해 만든 희망갤러리(02-337-8837)는 찾아갔다가도 자칫하면 지나칠 작은 갤러리다. 그렇지만 지난해 8월 문을 연 뒤부터 지금까지 이곳에서 열린 전시회들은 도저히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이게 뭐지’ 하며 한번 들어가 구경이라도 하고 싶은 것들이다. 60살의 주부 건축가 박은정씨가 화가로 변신해 야생화들을 그려넣은 모자들을 모은 ‘내가 그린 모자-다시 찾은 희망전’부터 모기향과 빨래판 모양의 냄비받침, 알약 캡슐 모양의 필통 등 재미있는 은빛 작품들을 모은 금속공예가 이학선씨의 ‘이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날개를 매개로 한 갖가지 작품들을 관객과 함께 만들어내는 임소희씨의 ‘라라는 공장장’ 등 이곳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재미있는 기획들 말이다. 이 갤러리를 만든 이들은 2002년부터 매주 일요일마다 홍대앞 거리에서 자신이 만든 상품을 가지고 나와 팔면서 ‘데뷔’를 했던 희망시장의 신인 미술가들, ‘예술 벼룩시장’을 정착시켰던 이들이 이번에는 작가로서의 둥지를 마련한 셈이다.

도심에서 쉼표 찍으며 삶의 여유를…

이초영 희망갤러리 큐레이터는 “잘 알려지지 않은 신인 작가들의 작품을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작은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작가들이 힘을 모아 마련한 공간”이라며 “대중들에게 친근한 ‘물건’이면서도 작가의 가치관이 담긴 참신한 작품들을 재미있게 보여주겠다”고 한다. 올해도 벌써 9개의 개인전이 기획돼 있는데, 2월에는 미농이 속마음을 표현해 만든 인형들을 모은 ‘상처와 치유의 인형전’(가제), 신문지로 만든 장기판, 현수막으로 만든 가방 등 ‘죽은’ 물건들을 되살린 작품을 만들어온 환생(김동환)씨의 전시 등이 기대된다.

유쾌한 아이디어와 도전이 숨어 있는 이런 공간들은 도시의 유쾌한 쉼표다. 꽉 짜여 돌아가는 도시가 때로는 두렵더라도 도시의 쉼표가 곳곳에 늘어난다면 삶의 쉼표도 많이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글 박민희 · 이주현 기자 minggu@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