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노인’ 등쳐먹는 ‘가난한 젊은이’들의 범죄… 일본 경제의 한 단면 드러내줘
‘오레오레 사기사건’이란 게 있다. ‘오레’는 일본어로 ‘나’를 뜻한다. 노인들에게 전화를 걸어 ‘오레다요, 오래(저예요, 저)’라며, 자식인 것처럼 속인 뒤 “급한 일로 돈이 필요하니 보내달라”고 해서 빼돌리는 범죄를 말한다. 옛 신문에서나 등장할 법한 이런 사기사건이 일본에서는 올 들어 10월까지 무려 3800건이나 발생했다. 사기 건수는 1월에 9건에서 점차 늘어나 5월에 100건을 돌파하더니, 10월에는 1천건을 넘어섰다. 사기 피해액은 20억엔(220억원)에 이른다. 금융자산이 많은 노인 세대의 자식들에 대한 염려를 악용한 범죄다.
‘부자 노인과 가난한 젊은이’는 요즘 일본 사회의 한 단면이다. 장기불황과 구조조정을 거치며 일본의 노동자들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일본의 실업률은 현재 5.1%로 지난해의 5.4%보다는 낮지만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나라처럼 기업이 고령자를 강제 추방하는 일은 일반적이지 않다. 일본 경제단체연합회(게이단렌) 관계자는 “기업들은 고임금의 고령 노동자들을 먼저 내보내고 싶은 마음이 있겠지만, 퇴직 신청을 받았을 때 반드시 그런 노동자들이 나가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연공서열 시스템도 그 뼈대가 유지되고 있다. 일부 기업들이 연공서열제를 고치고 있지만, 이는 인건비 삭감만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승진 적체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젊은 노동자들에게 인센티브를 주기 위한 측면도 있다. 일본식 경영으로 성공하고 있는 오쿠다 도요타자동차 회장(게이단렌 회장)은 “언젠가는 연봉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당장은 고칠 뜻이 없음을 내비쳤다. 일본의 느린 변화는 비록 불황을 길게 했지만, 노동자 전체의 복지 수준도 급격히 떨어뜨리지는 않았다. 일본의 노동소득분배율(총부가가치에서 인건비가 차지하는 몫)은 1990년대 초 57%에서 1998년 70%까지 높아졌다가 지금은 최고치보다 약간 낮은 68% 수준에서 등락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신규 일자리 창출이다. 특히 7%에 육박하는 청년실업은 일본에서도 고민거리다. 해외로 생산거점을 옮겨가는 제조업은 더 이상 일자리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 지난 1997년 노동자들의 취업 업종을 보면 제조업·건설업·광업이 36.5%를 차지했으나, 2003년 8월 현재 그 비중은 30.6%로 낮아졌다. 서비스업·도소매판매 업종은 제조업에서 줄어든 일자리를 다 메우지 못하는 형편이다. 경제단체들은 고령화 사회의 진척에 따라 정부가 노동자들의 정년을 65살로 늘리자고 요구하는 데 대해 “인건비 증가뿐 아니라 청년취업을 더욱 어렵게 한다”며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인구 고령화로 노동 가능 인구는 갈수록 줄고, 그들을 부양해야 할 청년들은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일본의 고민은 결코 남의 나라 일이 아니다. 그것은 경기회복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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