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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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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호남 지역주의에 돌진!

등록 2003-10-08 00:00 수정 2020-05-03 04:23

여론조사로 풀어본 대통령 탈당과 지역주의를 둘러싼 민심 …호남 지지 줄고 영남 지지 늘었지만 표 연결은 미지수

노무현 대통령이 민주당을 탈당하면서 지역주의 논쟁에 다시 불이 붙었다. 국민들은 그의 탈당과 지역주의 타파 논리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은 리서치플러스에 의뢰한 여론조사를 통해 민심의 향배를 밝힌다.

노무현 대통령이 민주당을 탈당하면서 지역주의 논쟁에 다시 불이 붙었다. 노 대통령과 통합신당이 정치개혁과 함께 지역주의 극복을 민주당 탈당의 명분으로 내걸었기 때문이다.

사실 노 대통령은 정기국회 폐회까지 정당 가입을 유보함으로써 현실 정치에 직접 참여하진 않고 있다. 그러나 그는 통합신당에 우호적임을 밝히고 있으며, 대통령이라는 특수한 위치 때문에 신당보다는 그의 행보가 여론에 미치는 파장이 좀더 크다. 이 지역주의 논쟁의 초점을 노 대통령의 행보에 맞추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광주·전라 출신의 대통령 지지도 떨어져

노 대통령은 지역구도 극복에 관한 자신의 ‘새로운 깃발’을 나름의 논리로 설파하고 있다. 그는 10월3일 기자간담회에서 “지역구도가 계속되면 지역감정을 잘 이용하는 정치인은 재미보고 국민은 속으로 골병든다. 지금 국회는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발언으로 가득 찬 구도인데 그 구도를 갖고 재미보자는 것 아니냐”고 민주당의 호남 정치인들을 ‘기득권 세력’으로 비판했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마음속에 호남 사람들을 비난하는 등의 생각은 한번도 가져본 적 없고, 충성이라고 표현할 만큼 모든 정성을 다 바쳤다”며 “하물며 대통령 당선에 호남이 결정적으로 기여했는데 내가 왜 배신하느냐”고 ‘호남 정치인’과 ‘호남 민중’의 분리를 꾀했다.

은 여론조사를 통해 이와 관련한 민심의 향배를 밝히고자 했다(10월4일 리서치플러스에 의뢰해 전국 성인 700명을 상대로 전화조사. 95% 신뢰수준에서 오차한계 ±3.7%). 이번 조사는 노 대통령의 9월29일 민주당 탈당 뒤 언론사가 실시한 첫 조사라는 의미도 지녔다.

조사결과를 요약하면, 노 대통령의 민주당 탈당에 대해선 ‘잘한 일’ 43.9% 대 ‘잘못한 일’ 40.9%로 찬반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다. 이 가운데 대선 때 노 대통령에게 투표한 사람만 보면 ‘잘한 일’ 38.9%, ‘잘못한 일’ 49.2%로 잘못이라는 응답이 우세했다.

응답자를 원적지(거주자와 해당 지역 출신 출향자 포함)별로 보면 광주·전라 출신은 ‘잘한 일’ 42.7%, ‘잘못한 일’ 49.0%로 부정적 의견이 조금 우세한 듯했으며, 부산·경남 출신은 ‘잘한 일’ 54.8% 대 ‘잘못한 일’ 31.2%로 긍정 의견이 우세했다.

노 대통령의 국정평가 지지도는 9월19~20일 가 같은 기관에 의뢰해 조사했을 때의 32.1%에서 이번에 34.0%로 오차범위 이내에서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다(‘지지하지 않는다’는 부정적 평가도 지난번 56.1%에서 이번에 60.7%로 비슷함). 다만 원적별로 보면 광주·전라 출신이 지난번 43.3%에서 이번에 36.3%로 떨어진 반면, 부산·경남 출신은 23.9%에서 33.3%로 상승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즉, 노 대통령이 민주당 탈당을 통해 호남 지지기반이 줄어든 반면, 얼핏 보아 부산·경남에서 지지세를 넓힐 가능성이 엿보인 셈이다. 다만 대구·경북에선 이렇다 할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노 대통령과 통합신당 입장에서 볼 때 ‘호남에서 잃고 영남에서 보충한다’는 단순 도식이 성립하는 것 같진 않다. 정당 선호도로 볼 때 호남에서 민주당 대 신당의 격차와, 영남에서 한나라당 대 신당의 격차가 모두 현격하기 때문이다. 즉, 자칫하면 ‘현찰로 내주고 불확실한 어음을 받아두는’ 결과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 이유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선 호남 정서 읽어내기부터 시도해야 할 것 같다.

이와 관련해 이낙연 의원(민주당·전남 함평영광)은 ‘호남 고립화’ 가능성에 대한 호남인들의 두려움과 당혹감을 꼽고 있다. 그는 “‘왜 민주당을 깨느냐. 거기에 보태서 다른 지역의 지지도 받으면 될 터인데. 깬다고 대안도 없으면서…’라는 게 호남인들의 여론”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의 대변인을, 대선 뒤 당선자 대변인을 지냈으며, 노 후보의 지지율이 떨어졌다고 후보를 교체하려는 ‘막가파 행태’에 가담한 적도 없는 사람이다.

호남 여론, 기대와 실망의 정치학

호남인들은 민주당의 분당으로 호남 대 비호남 구도가 재연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고 한다. 1990년 3당 합당을 ‘호남 고립화 기도’로 보고 극렬하게 저항했던 정서가 되살아나는 셈이다. 이낙연 의원은 “김대중 대통령의 집권으로 ‘한을 풀었고’, 김대중 정권 말기의 부패사건 때문에 풀이 죽으면서 이완돼가던 호남의 ‘방어적 지역주의’가 노 대통령의 탈당을 계기로 다시 뭉치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 노 대통령이 민주당을 ‘깼다’는 민주당쪽 주장은 근거가 약한 편이다. 노 대통령이 신당 의원들에게 지령을 내렸다거나 의원들이 지령대로 움직였다고 볼 정황이 드물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 대통령이 마음먹고 “분당은 안 된다”고 선언했다면 통합신당이 출범하긴 어려웠을 것 같다. 실제로 청와대 참모 중에선 문희상 비서실장이 강력하게 분당불가론을 편 반면, 유인태 정무수석과 일부 386 비서관들은 “‘도로 민주당’은 의미가 없다”는 입장에 섰다. 이런 가운데 노 대통령은 ‘민주당 사태 불관여’ 입장을 견지하다가 분당 직후부터 신당을 옹호하고 나섬으로써 ‘미필적 고의’ 의심을 받게 된 것이다.

호남의 불안정한 여론을 ‘기대와 실망의 정치학’으로 푸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김태홍 의원(통합신당·광주 북을)은 “호남권에서 노 대통령에게 93.1%의 표를 몰아줬으면 그만큼을 요구하게 돼 있는데, 70~80%도 아니고 50% 정도만 충족된다면 사랑이 미움으로 변하게 마련”이라고 설명했다.

사실 노 대통령은 지난해 ‘광주 경선’1위를 바탕으로 바람을 일으키면서 민주당 대선후보 자리를 거머쥐는 데 성공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국민통합과 동서화해의 최적임자임을 내세웠다. 그는 또한 당내 경쟁자들이 동교동 내지 DJ와의 차별화 가능성을 앞다퉈 시사할 때도, “누구보다 신뢰할 수 있는 인물임”을 견결하게 주장했다. 영남 출신이어서 다른 지역의 표는 끌어오면서도 호남의 정치·사회적 이익을 누구보다 굳게 지켜줄 인물로 부각시키는 선거전략을 구사했던 셈이다.

자신의 최근 발언대로 노 대통령은 지역주의와 맞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투쟁했다. 민주당 후보로 부산시장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에 연거푸 뛰어들어 분연히 깨짐으로써 그것을 몸으로 실증했다.

그러나 당시 그의 투쟁대상은 어디까지나 ‘영남 지역주의’였다. 그러던 그가 최근 들어 갑자기 ‘호남 지역주의’ 쪽으로 과녁을 옮긴 데 대해 호남인들은 당혹감을 느끼는 것 같다. 노무현 후보의 공보특보 출신인 유종필 민주당 대변인은 “노 대통령이 여느 영남인들과 달리 호남의 차별과 소외 문제에 대한 깊은 이해를 지닌 것은 분명하다”며 “그러나 그의 주변 인물들이 반호남 정서가 강한 편”이라고 주장했다.

이번에는 영남 정서 읽어내기로 들어가보자.

노 대통령의 비서 출신으로 부산에서 신당을 준비 중인 정윤재씨(전 민주당 사상지구당위원장)는 “노 대통령의 민주당 탈당은 신당 여건을 좋게 하는 쪽”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 지역 사람들은 노 대통령의 탈당을 ‘진작에 했어야 할 당연한 행동’이라고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의 탈당이 부산·경남에서 그런 대로 호평을 받는 것은 영남인들의 전통적 지역주의 의식의 잔영 탓으로 분석된다. 지난해 대선 당시 “노무현은 좋은데 당이 나빠서…”라며 DJ와 호남 문제를 거론하던 정서의 연장이라는 이야기다. 이는 호남 지역주의와 결별함으로써 영남의 한나라당 지배구도에도 균열을 촉발하리라는 노 대통령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측면도 있다(민주당 일각에선 이를 ‘PK 신지역주의’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부산, 한나라 대 신당 격차는 여전

그러나 노 대통령 지지도의 미세한 상승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에서 한나라당 대 통합신당의 격차는 여전히 현격하다. 이번 조사에서 부산·경남 지역 정당 선호도는 한나라당 51.3%, 민주당 15.4%, 통합신당 9.4%로 나타났다.

정윤재씨는 “노 대통령의 탈당이 호재라고 해서 그것만으로 큰 파괴력을 기대하진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는 “영남권에서 노 대통령을 공격할 때 ‘민주당 소속이라는 지역 문제’는 사실 핑계였으며 영남인들의 강한 보수성이 본질이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정용화 교수(부산대·정치학)도 “과거엔 노 대통령에 대한 싫은 감정을 지역주의적 이유로 표출하다가 근래에는 보수적 눈으로 비난하는 변화가 오히려 두드러지고 있다”고 말했다.

영남 정가와 학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노무현 정부 출범 뒤 영남권의 반호남 정서는 눈에 띄게 약화되고 있다고 한다. 김대중 대통령의 퇴임과 함께 호남 출신 인사들이 대거 공직에서 물러나면서 적대시할 ‘이야깃거리’ 자체가 사라진 탓이다. 대신에 영남권에선 노 대통령을 두고 ‘친노동’이라거나 ‘반미’라거나 하는 등의 이념적·보수적 차원의 공세가 좀더 강한 편이다.

실제로 의 이번 조사에서는 ‘노무현 정부가 어느 지역을 우대하고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특별히 우대하는 지역이 없다고 본다’는 응답이 69.3%로 나왔다. 다음으로는 11.7%가 부산·경남을, 4.4%가 광주·전라를 꼽았으나 미미한 수치에 그쳤다. 즉, 김영삼 정권 때까지 ‘영남 정권’, 김대중 정권 때는 ‘호남 정권’ 따위의 시비가 있었으나, 특정 정권을 특정 지역과 결부시키는 논란이 이제는 사라져가고 있다고 볼 만한 근거인 셈이다.

이런 까닭에 노 대통령의 지역구도 타파론은 그 자체만으로 영남의 지역구도를 무너뜨리기에도 한계가 있다는 견해들이 나오고 있다. 3김시대가 사실상 종식되고 지역주의가 일정 부분 약화하면서 대신에 개혁 대 보수의 새로운 대립구도(노 대통령은 그것을 종종 ‘정책구도’라고 부름)가 차츰 뚜렷해지는 정치지형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김헌태 소장(한국사회여론연구소)은 “대중적으로 보수와 진보의 대립구도가 형성된다는 것은 폭발력 있는 지각변동의 등장”이라고 지적하고 있다(그의 본격적인 논지는 www.ksoi.org 참조).

이에 따라 정용화 교수는 지역구도 문제보다는 “‘노무현을 통해 한국사회를 바꾸자’고 했던 대선 때의 개혁 깃발이 다시 선명해지느냐 여부”를 내년 총선의 관찰 포인트로 꼽았다. 정윤재씨도 “내년 총선은 노 대통령의 중간평가 성격이 될 것”이라며 “노 대통령이 본래의 개혁적 색깔을 확고하게 밀고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여론조사전문

박창식 기자 cspcs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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