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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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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느냐, 후퇴하느냐…

등록 2003-05-08 15:00 수정 2020-05-02 19:23

개혁세력 단일정당의 기치 든 유시민 의원…정치적 사고의 중심에는 언제나 민주당이 있었다

유시민 의원을 처음 만난 것은 지난해 8월 에어컨도 없이 푹푹 찌는 개혁당 사무실이었다. 당시 개혁당의 공보담당 기획위원을 맡고 있던 유 의원은 와 인터뷰를 통해 처음으로 개혁신당 구상을 선보인 뒤, 그 반응을 점검하고 있었다. “기사가 뜬 지 12시간도 안 됐는데 독자의견 달기가 2천개를 넘어섰다”며 들떠 있었다. 창당 자금은 뜻이 맞는 사람 40여명이 500만원씩을 내놓았다고 했다.

‘민주당 주도의 신당’ 주장

‘인터넷에 댓글 몇개 올라온 것 가지고 흥분하다니, 2억원은 누구 코에 갖다 붙이나.’

더위에 쫓겨 자리를 옮긴 근처 다방에서 냉커피 값을 대신 낸 것은 순전히 이런 곤궁함에 대한 동정이었다. 데스크에 보고를 하니 “그게 무슨 정당이냐”는 냉소적 반응만 돌아왔다. 기사는 1단 단신으로 처리되고 말았다.

그 뒤, 유 의원은 500만원 내고 만든 당으로 노무현 대통령을 탄생시켜 ‘인생의 가장 찬란한 밤’을 맞았고, 자신도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로또복권 당첨도 이런 ‘대박’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5월1일 개혁당 경기 고양 덕양갑 지구당사무실에서 만난 유 의원은 또다시 신발끈을 동여매고 있었다.

“지난 대선은 전반전에서 겨우 1대 0으로 이긴 것에 불과하다. 후반전에서는 두골을 먹을지 세골을 먹을지 모른다. 내년 총선에서 낡은 정당문화와 지역주의 정치지형을 허물지 못할 경우 한국 정치는 대선 이전 상황으로 복귀할 것이다. 앞으로 10년, 20년 한국 정치의 운명을 좌우할 중대한 분수령이다.”

그는 여전히 열혈청년이었다. ‘화염병을 들고 바리케이드로 뛰어들던 절박한 심정’ 그대로다. 아니 오히려 개혁세력 단일정당 건설을 통해 바리케이드를 훨씬 공고히 다질 생각이다.

그는 재보궐선거 당선 다음날 기자회견과 2일 국회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신당 창당을 거듭거듭 역설했다. 신당 창당의 주역으로 떠오른 그가 뜻밖에도 민주당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했다.

“신당 주체세력의 가장 중요한 흐름은 그 수로 보나 정치적 역량으로 보나 민주당 안의 개혁세력이다. 이들이 결단하지 않으면 신당은 출현할 수 없다. 개혁당 8개월 해봤지만 여전히 미니당 아닌가.”

또 민주당 주도의 신당에 참여하는 조건도 파격적이다. “법률적으로 신당이 민주당의 법통을 이어받느냐 여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당원이 주인이고 유권자들의 뜻을 반영하는 참여형 정당이면 된다. 내년 총선에 나설 후보자 결정과정에서 당원경선이든 국민경선이든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조건만 갖추어지면 모든 문제가 일거에 해결된다.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되고의 기준도 필요없다. 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아니, 유시민의 입에서 이렇게 온건한 소리가 나오다니. 대선 때 “민주당이 왜 안 쪼개지는지 초조했다” 등의 독설을 퍼부어 민주당 내에 광범위한 혐오증을 불러일으켰던 유시민이 아니던가. 신주류로 분류되는 한 의원조차도 “(재보선에서) 당선돼도 걱정이고 떨어져도 걱정”이라고 말할 정도였는데….

강성발언은 민주당 ‘협박’하기 위한 것

유 의원은 대선 당시 민주당에 대한 자신의 강성발언을 ‘상황론’과 ‘전략론’으로 설명했다.

“당시 상황에서는 반노 그룹이 민주당에서 나가는 것이 대선 승리에 유리했다. 내부에서 지속적으로 노 후보를 흔들어대니, 그럴 바에는 나가서 공격하라는 뜻이었다.”

“대선 당시 표는 세 부류가 있었다. 첫째 ‘민주당이든 아니든 노무현이 좋다’. 둘째 ‘민주당 후보이기 때문에 찍겠다’. 셋째 ‘노무현은 괜찮은데, 민주당이라 찜찜하다’. 첫 번째는 무조건 찍을 것이고, 두 번째는 노 후보가 탈당하지 않는 한, 찍어줄 것이다. 문제는 영남의 개혁성향이 대표하는 세 번째 부류다. 이들을 결속시키고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노무현이 당선되면 민주당을 바꿀 것이다. 그러니 믿고 찍어달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유 의원은 대선 이후에도 민주당을 자극했다. 그는 “개혁당의 목표는 2004년 총선 때 전국 모든 선거구에서 후보를 내는 것이다. 적어도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에서 개혁당 후보들이 일정한 득표를 한다면 구태의연한 민주당 후보들에게 위협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개혁당 후보들이 당선은 안 되더라도 최소한 민주당 의원은 떨어뜨릴 수 있다는 ‘협박’이다. 유 의원은 ‘협박’이었음을 인정했다. 그리고 이를 ‘치킨게임’에 비유했다. 마주 보고 달리는 기관차처럼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돌진해오다 먼저 피하는 사람이 지는 경기 말이다.

“치킨게임은 잃는 것이 적은 쪽이 이기는 게임이다. 민주당과 개혁당이 서로 부닥칠 경우 개혁당은 잃을 것이 별로 없는 반면, 민주당은 손실이 너무 크다. 그러니 ‘민주당이여, 기득권에 안주하지 말고 어서 환골탈태를 서두르라’는 촉구성 발언이다.” ‘문학청년’(유 의원은 를 통해 정식 등단한 소설가이기도 하다)의 정치적 수사에 이런 전략적 고려가 숨어 있다니….

그래도 민주당 내 일각에서는 그에게 ‘반호남주의, 반김대중주의’라는 딱지를 붙이고 있다. 그 불신의 뿌리에는 그가 쓴 이 놓여 있다. 정권교체를 위해 김대중 후보의 직접 출마가 아니라 조순 당시 서울시장을 내세워 대리전을 치르게 하자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 유 의원은 “당시 정치상황을 아는 사람들이 지금도 그런 말을 한다면, 이는 무지하거나 의도적 왜곡 둘 중의 하나”라고 분개했다. 하긴 당시는 이회창씨 아들 병역문제가 나오기 전이라 이회창씨의 지지율이 김대중 전 대통령을 더블스코어로 앞서고 있던 시점이었다. 유 의원의 논리를 비판했던 강준만 교수조차도 “유시민씨는 호남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아 마땅하다. 유씨의 누이인 작가 유시춘씨를 포함해 유씨 가족은 모두 민주화투쟁에 앞장선 분들이고 호남을 옹호하는 발언을 해온 분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고향에서 배척받는 고통을 당하고 있다. 유씨의 대안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건 차분하게 논의할 성질의 것이지 무작정 비판해댈 성질의 것이 아님을 알아주기 바란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는 청남대에서 낚시를 할 수 있을까

확실히 그의 정치적 사고 중심에는 평민당 시절부터 시작되는 민주당이 놓여 있다. 1987년 대선때 그는 ‘비판적 지지론’을 떠맡아왔다. 민주당의 반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런 행보 때문에 진중권씨 등은 유 의원을 ‘보수주의자’라고 비판했는지도 모른다. 어찌 보면 그는 민주당이라는 굼뜬 소에 붙어 있는 ‘등에’에 가까울지 모른다.

그는 인터뷰가 끝나갈 즈음에 노무현 대통령과 한 약속 얘기를 꺼냈다.

“후보시절 노 대통령을 돕는 조건이 하나 있었다. ‘대통령이 되면 청남대를 시민에게 개방하라’는 것이었다. 대신 ‘개방 직전에 그곳에서 낚시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도 했다. 그런데 노 대통령이 청남대를 시민에게 돌려주면서 나와 한 약속을 잊어버렸나 보다”라며 웃었다.

유 의원은 “정치가 취향에 맞지 않으니, 인생이 불행해지고 있다”고 했고 “칼럼니스트 유시민과 국회의원 유시민을 비교하면 칼럼니스트가 더 좋다”고도 했다. 또 그는 지난해 8월 개혁당을 만들고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쉬지 못했고, 하루 3~4시간씩 자며 버티고 있다고 했다.

혹시 청남대에서 한가롭게 낚시를 즐기는 유 의원을 볼 수 있다면, 그의 ‘정치실험’이 성공했다고 짐작해도 좋을 것 같다.

김의겸 기자 kyu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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