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한겨레21, 노풍을 처음 예보하다

등록 2002-12-28 00:00 수정 2020-05-03 04:23

좌절과 역경을 딛고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9회말 역전홈런을 치기까지

2002년 4월21일, 대선후보 선출을 위한 민주당 경기지역 국민경선이 열린 경기도 성남 실내체육관. 의 의뢰를 받은 소설가 은희경씨가 노무현 후보와 막 인터뷰를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자리에 앉은 노 후보는 할말이 있다며 먼저 말을 꺼냈다. “아무도 ‘노풍’을 예견하지 못했는데 딱 한 군데 노무현을 알아주고 노풍이 불 것을 예언한 곳이 있었다. 바로 이다.”

2년 연속 ‘경쟁력 1위’로 꼽히다

이 노풍을 예견했다고 한 노 당선자의 말이 과장만은 아니다. 그가 표지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99년 7월(264호)이었다. 제목은 ‘대중이 선호하는 차세대 리더십 노무현 1위’. 일반 대중들이 정치인 개개인에 대해 어느 정도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며, 정치적 자질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여론조사를 통해 알아본 결과였다. 이회창 총재와 이인제 의원이 2위와 3위를 달렸다. 어쨌든 이후 3년 뒤 민주당 경선이 ‘노무현-이인제’의 양자대결이었고, 본선도 ‘노무현 대 이회창’의 양강구도였으니 당시의 선호도 조사가 빗나가지 않은 셈이었다. 노 당선자는 이듬해인 2000년 9월(325호) 여론조사에서도 경쟁력 1위로 꼽혀 차세대 리더 2연패를 차지했다. 이때는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4위로 밀렸고, 이인제 의원(2위)과 정동영 의원(3위)이 좋은 성적을 냈다.

2002년 3월(398호)엔 ‘노무현은 대안인가’라는 제목의 특집기사가 실렸다. 7명의 민주당 대선 예비후보들이 후보등록을 마치고 본격적인 국민경선 레이스에 돌입하기 직전이었다. 이때만 해도 이른바 ‘이인제 대세론’이 당내 판도를 쥐고 있었고, 노무현쪽에 가담한 금배지는 천정배 의원이 유일했다. 다만 개혁성향의 인사들을 중심으로 ‘노무현 대안론’이 소리 없이 세력을 형성해가고 있었다.

3월16일 민주당 광주 국민경선에서 노 후보가 이인제 후보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노무현 돌풍’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401호)의 제목이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조금 앞서간 게 아니냐는 얘기도 나왔지만 당시는 그 정도로 노풍의 위력이 대단한 시기였다. 이어 402호의 표지는 ‘영남의 선택’. 부산과 대구지역 현지르포를 통해 영남지역 노풍의 실체를 짚어본 기사였다.

그러나 노풍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4월15일 여론조사에서 60.5%로 최고점을 확인한 노 후보의 지지율은 4월27일 후보확정 이후 5월 초순 41.5%로 급전직하했다. 그 사이 최규선과 DJ의 아들들이 표지를 장식하며 국민을 화나게 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세는 없다’(409호)가 표지로 올랐다. ‘노무현 대 이회창’의 지지율 격차가 오차범위 이내로 좁혀져 누구도 대세론을 얘기하기 어려운 정세였다. 이 무렵 민주당에선 ‘원석론’과 ‘가공석론’이 날을 세우고 있었다. 의원 일부에서 “노 후보를 잘 다듬어 가공석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자 노 후보는 “내가 훈육받아야 할 대상으로 비치지 않도록 배려해달라”고 주문했고, 측근들은 “삼손의 머리카락을 자르라는 얘기냐. 원석 잘못 다듬다간 깨진다”며 펄쩍 뛰었다. 단일화가 이뤄질 때까지 줄기차게 이어진 민주당 내 노무현 흔들기는 이렇게 사소한 논란에서 시작됐다.

6월엔 월드컵 열기가 온 나라를 휩쓸었지만 노 후보에겐 시련의 연속이었다. ‘붉은악마 신드롬’이 표지를 장식할 무렵 6·13 지방선거가 치러졌고, 결과는 민주당의 참패였다. 416호의 표지는 ‘GAME OVER INSERT COIN’이었다. 뭔가 획기적인 근본대책이 마련되지 않으면 ‘게임 끝’인 상황이었다. 친이인제 성향의 의원들이 ‘후보교체론’이라는 것을 들고 나오면서 “노무현이 민주당이라는 말을 타고 계속 질주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말로 갈아탈 것인가. 거꾸로 민주당이라는 말이 노무현이라는 기수를 계속 태우고 달릴 것인가, 아니면 버리고 새로운 기수를 물색할 것인가”라는 물음이 민주당 안팎의 화두였던 시기다. 이때 노 후보는 ‘필요할 경우 8·8 재보선’이라는 승부수를 띄웠다. 그러나 반노성향 의원들은 이 말을 빌미삼아 두고두고 노 후보를 흔들어댔다.

월드컵 열기가 수그러든 7월 중순(418호) 영남지역만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했다. 전국단위의 여론조사를 통해선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 영남민심의 실체를 들여다보자는 취지였다. 결과는 58 대 23. 더불스코어 이상이었다. 선거 결과 노 후보는 영남지역에서 평균 26.5%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8·8 재보선을 통해 5개의 의석을 추가한 한나라당은 헌정사상 처음으로 원내 단독과반(137석)을 넘어서며 무한질주했다. 422호는 이회창 총재의 이런 위세를 “아무도 나를 말릴 수 없다”고 빗댔다. 월드컵 4강 진출 이후 정몽준 의원의 지지율 상승에 탄력이 붙기 시작하더니 8월(423호)에는 드디어 표지를 장식한다. 대권구도는 양자대결에서 3자대결로 바뀌는 듯했다. 9월엔 후보사퇴론·통합신당론 등 이름을 달리한 후보교체론의 변종들이 판을 쳤다. 10월에(428호) 들어서자 드디어 ‘후보단일화론’이 전면에 대두했고, 노무현 흔들기는 절정에 이른다.

굽이굽이 고갯길을 넘어…

11월3일(433호) 노 후보는 ‘국민경선을 통한 후보단일화’를 전격적으로 제안한다. 지지부진 말만 무성했지 진척이 없던 단일화 논의는 활활 타올랐고, 상황은 시시각각 숨가쁘게 변화했다. 11월15일 우여곡절 끝에 국회 귀빈식당에서 ‘노무현-정몽준 회동’이 이뤄진다. 두 사람은 이날 예상을 뒤엎고 단박에 여론조사를 통한 후보단일화를 합의했다. 이를 다룬 표지(435호)의 제목이 ‘대역전 프로젝트, 9회말 드라마는 오는가’였다.

이후로도 굽이굽이 고갯길이었다. 민주당과 국민통합21의 단일화협상단은 구체적인 여론조사 방법을 놓고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를 벌인다. 사상 초유의 여론조사를 통한 후보선택(436호)은 후보등록 이틀 전인 11월25일 새벽에야 극적으로 이뤄졌다. 이후 ‘단풍’은 폭풍이 되었고, 그 기세는 12월19일 운명의 그날까지 오래 지속된다.

선거운동의 와중에 만든 438호의 표지제목은 ‘피가 마른다, 좁히느냐 벌리느냐…’. 후보등록 이후 언론사 등이 실시한 수백여 차례의 미발표 여론조사에서 노 후보는 근소한 차이로 추격당하기는 했지만 단 한 차례도 이 후보에게 밀리지 않았다. 정몽준 대표가 투표 개시 7시간40분을 남기고 지지철회를 발표해 빛이 확 바랬지만 어쨌든 단일화는 ‘9회말 투아웃 이후 터진 역전홈런’이었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