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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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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미 몸으로 말한다

등록 2002-08-10 00:00 수정 2020-05-03 04:22

정치적 구호에서 대중의 언어로 탈바꿈… 대∼한민국의 외침, ‘부∼시사과’

서울시청 앞은 경계가 뚜렷했다. 덕수궁 앞마당을 가득 메운 사람들과 거리를 가득 메운 차량들 사이를 경찰이 물샐 틈 없이 지키고 서 있었다. 경찰이 그어놓은 경계를 사이에 두고 양쪽은 서로에게 밀리지 않고 팽팽한 힘의 균형을 이루는 듯했다. ‘고 신효순·심미선양 49재 추모제’가 열린 7월31일 오후. 그러나 억울하게 숨져간 넋을 달래려는 애틋한 열기와 도심 퇴근시간대의 분주한 열기는 배타적이지 않았다. 반미 구호가 넘쳐나는 그곳에서, 비일상성과 일상성은 공존하고 있었다.

여중생 추모제에서 드러난 일상적 반미

추모제 행사장 옆에 마련된 서명대 앞으로 사람들은 꼬리를 물고 몰려들었다. 사람들의 특성을 한마디로 요약할 수는 없었다. 나이대, 성별, 직업, 옷차림새까지 어느 것 하나 일치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로지 ‘서명하기 위해’ 몰려들었고, ‘스스로’ 몰려들었다. 그 밖에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배경은 달리 찾아볼 도리가 없었다. 서명을 끝낸 다음 움직임도 그랬다. 서둘러 제 갈 길을 가는 사람, 지갑을 꺼내 성금을 내는 사람, 서명대 옆에 전시된 사진자료를 둘러보는 사람, 행사장으로 발길을 옮기는 사람….

권광윤(32·회사원)씨와 김혜선(32·주부)씨. 경북 구미에서 나들이온 이들 동갑내기 부부는 고속터미널에 가기 위해 이곳을 지나치던 길이었다. 부부는 두 아들 인성(6)이와 윤성(1)이를 붙들거나 안고 ‘미군전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사건 진상 규명, 부시 미 대통령 공식 사과, 미군 책임자 구속 처벌, 미군기지 폐쇄를 위한 범국민 서명 운동’이라는 제목이 인쇄된 종이 위에 나란히 서명했다. 밀레의 ‘저녁기도’를 도심에 옮겨놓은 듯 가족의 모습은 편안했다.

“주한미군 문제에 별 관심이 없었는데…”, “꼭 집어서 얘기하지는 못하겠지만…”. 부부는 머뭇거리다 겨우 입을 열었다. 부인은 “미국이 이것저것 간섭하며 너무 심하게 구는 것 같다”고 말했고, 남편은 “처벌이 너무 미약하다. 한국사람이 개미새끼도 아닌데 그토록 무참히 죽여놓고 진상규명조차 못하게 하느냐. 우리 애들한테는 이런 세상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 서명했다”고 말했다. 부부가 서명한 이유는 조금 달랐으나 요구는 하나였다.

청소년들이 행사장 주변을 무리지어 몰려다니고 있었다. 교복을 입은 그들의 모습은 어른들의 다양한 옷차림 사이에서 눈에 띄었다. 서울 ㅁ여고 방송반 학생들인 2학년 이미영양과 1학년 유진주·이가은양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다고 했다. “학교에서 제대로 알려줬더라면 우리 스스로 미리 고민해봤을 텐데….” ‘배운 미국’과 ‘보고 느낀 미국’의 괴리는 그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있었다. 우방과 안톤 오노, 혈맹과 또래의 무참한 죽음 사이를 그들은 스스로 메워야 할 것이다.

그들에게 추모제는 살아 있는 배움터 같았다. 유양은 “뉴스에서 여중생 2명이 죽었다는 얘기만 들었지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는데 직접 와서 보니 느낌이 다르다”며 “다큐멘터리를 잘 만들어 친구들에게 널리 알려야겠다”고 말했다. 추모의 현장에서도 청소년들의 재기발랄함은 쉽게 감춰지지 않았다. ㅁ여고 방송반 학생들이 미국에 대고 하고 싶은 말은 “사람을 죽여놓고 너무 무책임하다”라는 식의 말투가 아니었다. “지들도 살다보면 똑같은 일을 당할 수 있을 텐데, 그때 가서 뭐라고 할래?”였다.

“보고 느낀 미국을 널리 알리련다”

이날 추모제는 여러모로 6월의 거리응원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6월의 시청 앞은 시민이 온전히 점유하는 공간이었다면 이날은 시민이 가까스로 비집고 들어간 공간이었다. 가족과 함께 추모제에 참가한 주아무개씨는 “버스를 타고 오면서 시청 앞 광장쪽을 바라봤는데 당연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행사장이 보이지 않아 놀랐다. 아이들을 마지막 보내는 자리가 이렇게 국가와 국민이 싸움하는 듯한 모습으로 비쳐서야 되겠느냐”며 안타까워했다.

3000명이 넘는 추모 인파를 1500명의 진압 경찰이 에워싼 덕수궁 앞마당은 너무 옹색했다. 하지만 그 비좁은 공간 안에서도 ‘6월의 끼’는 발산되고 있었다. 여름방학에 운영되는 한 대학 열린학교에서 만났다는 이참솔(ㄱ고 2), 박지영(ㅅ여고 1), 이새미(ㅊ고 1)양과 추일범(ㄷ고 1)군. 그들은 어깨에 태극기 망토를 두르고 손에도 태극기를 들고 있었다. 기미독립선언문을 적은 종이 피켓도 직접 만들어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롯데리아 4인방’이라고 불러주길 요구했다.

“롯데리아에 모여 추모제 참가 계획을 짰거든요. ‘기왕 갈 거라면 특별하게 하고 가자’고 했지요.” 추모제 현장에서도 튀어보이고 싶은 청소년들에게 거리응원과 추모제의 의미는 얼핏 경계가 모호해 보였다. 목소리도 들떠 있었다. 그러나 그 차이를 식별하지 못하는 건 어른의 눈뿐이었다. 이참솔양은 “우리는 당당한 주권국가의 학생이 되고 싶다는 의지를 보여주려고 했다”며 “이런 집회에는 처음 나와보지만 가슴속에서 뭔가 솟구쳐 오르는 걸 느낀다”고 말했다.

6월의 거리응원과 닮은 것 가운데 ‘동원되지 않았다’는 사실보다 확실한 건 없어 보였다. 서울시청 부근 해운항공사에 다니는 황재윤(33)씨는 퇴근길에 맘먹고 추모제에 들렀다. 학사장교 출신인 그는 “한·미 군사동맹 체제 아래서 우리가 당장 자주국방을 이룰 수 있을 것으로는 기대하지 않지만 군사동맹과 직접 관련이 없는 주둔군지위협정을 불합리하게 놔둔다는 건 있을 수 없다”며 “다치지 않을 만큼 조심하겠지만 추모제가 끝나고 거리행진까지 함께 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남녀노소 어우러지고 계층적 연대까지

시민들의 자발성은 미군 관련 운동단체 관계자들에게 더욱 크게 다가온다. “올해 같은 경우는 처음이다.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여중생 압사 사건의 발생지인 경기도 의정부 일대에서 지난 96년부터 주한미군 관련 운동을 벌여온 의정부 참여연대의 임성수 사무국장은 “나이 많은 노인들부터 아이들 손잡고 나오는 여성들까지 다양한 계층의 시민들이 집회에 스스로 나서고 자신들의 주장을 자연스럽게 반미 구호로 만들고 있다”며 “이젠 집회 참가자 가운데 모르는 얼굴이 더 많다”고 말했다.

이런 현상이 특정지역에서만 두드러지는 건 아니다.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살인사건 범국민대책위원회’(범대위)에서 활동하는 한국청년단체협의회 김동욱 연대사업국장은 “반미 집회를 하다 보면 늘 노인들한테서 ‘빨갱이’라는 욕을 들었는데 요즘 들어 그런 분들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며 “택시기사가 검은색 추모 리본을 단 우리 모습을 보고 택시비를 받지 않거나 시민들이 먹을 걸 싸다주는 경우도 많다”고 귀띔했다. 김씨는 최근의 이런 현상을 “‘운동권의 반미’에서 ‘시민의 반미’로 전환된 것 같다”고 풀이했다.

범대위가 인터넷(www.antimigun.org)에서 모집한 ‘시민특별수사대’에는 개인적으로 참여한 ‘특별수사대원’이 60여명에 이른다. 홍보활동과 수배전단 붙이기, 서명받기 활동을 하는 이들의 나이대는 신효순·심미선양 또래의 중학생부터 이들 또래를 딸로 둔 40대까지 세대별로 빠짐이 없다. 특별수사대원 강아무개(27·대학생)씨는 “불평등조약인 주둔군지위협정의 내용을 보고 나서 그동안 내가 얼마나 무지했는지 알게 되었다”며 “한국인으로서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가입했다”고 밝혔다.

‘반미의 대중화’ 현상이 나타난 배경은 무엇일까. 의정부 참여연대 임성수 사무국장은 “의정부는 주한미군이 오래 전부터 주둔해왔기 때문에 주민들이 개인 재산권이나 생활권 문제로 미군과 부딪혀왔다”며 “지난해 미군의 기지 이전 계획인 ‘연합토지관리계획’이 수립돼 직접 피해를 보는 시민들이 많아지면서 반미 감정이 꾸준히 확산돼왔다”고 말했다. 임 국장은 특히 “이번 여중생 압사 사건으로 민족 감정까지 자극받아 그동안 쌓여온 분노가 한꺼번에 폭발한 것 같다”고 해석했다.

미군기지가 없는 지역에서는 올해 초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 이후 반미 분위기가 높아지기 시작했다는 게 대체적인 의견이다. 거리집회에 나선 중·고등학생들도 예외없이 “김동성이 금메달을 빼앗기면서 미국을 달리 보기 시작했다”고 입을 모은다. 월드컵 미국전에서 안정환이 동점골을 터뜨리고 골 세리머니로 ‘오노 액션’을 흉내낸 데서 보듯, 김동성 사건은 한국민들에게 미국을 새롭게 이해하는 강력한 코드로 자리잡았다는 얘기다.

정치적·생존권적 반미에서 문화적 반미로

스포츠의 판정 시비가 ‘50년 혈맹’의 이데올로기 성채에 금을 가게 했다는 논리는 언뜻 비약처럼 들린다. 지금의 반미 감정이란 스포츠나 문화현상에 대해 감정적인 반응으로 나타난 일시적 유행일 뿐이라고 해석하는 견해도 없지 않다. 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으로 시작한 한국 반미 운동사에서 이처럼 ‘비장감’이 떨어지는 시기도 일찍이 없었던 게 사실이다. 미국의 정세분석도 이런 판단에 근거했을까. 주한미군은 최근 한국에서 불고 있는 반미 바람을 “언론의 왜곡된 선동” 탓으로 돌리기도 했다.

운동권의 반미와 시민의 반미는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여중생 압사 사건을 계기로 가장 먼저 거리로 나섰던 의정부여고 학생들이 겪은 심리적 갈등은 운동권과 청소년의 반미가 다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처음 거리집회에 참가했던 의정부여고 학생들 가운데 일부는 집회에서 등장하는 반미 구호 때문에 ‘동생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순수한 마음’을 운동단체들이 이용했다는 피해의식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여기에는 “일부 단체가 학생들을 선동했다”는 학교쪽의 ‘선동’이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대중들의 반미 감정을 일시적 현상으로 해석하는 건 다분히 ‘희망섞인’ 견해일 가능성이 높다. 의정부의 한 여고 교사는 “동계올림픽 때는 학생들이 ‘미국 나쁜 놈들’이라는 감정적인 욕을 하는 수준이었다면 지금은 수업시간에 교사에게 여중생 압사 사건의 배경을 물어오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의정부 ㅅ고 3학년 김아무개(18)군은 “고3이라 거리집회에 나가는 친구는 많지 않지만 대부분 친구들은 미군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고 전했다.

80년대가 정치적 반미주의였다면 90년대는 미군기지 주변을 중심으로 한 생존권적 반미가 강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흐름이 2000년대 들어 문화적 반미로 변천하고 있다고 본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정치적 반미는 위험부담이 컸지만 지금은 스포츠 등 탈정치적으로 반미 감정을 드러내면서 위험부담이 줄었다”며 “그만큼 반미의 대중화 가능성이 커진 셈”이라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탈정치적 반미가 사회적으로 큰 힘을 발휘하지는 못하겠지만 친미주의의 이데올로기를 깨는 데는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홍성태 상지대 교수는 문화적 반미의 가능성을 훨씬 크게 본다. 그에 따르면 동계올림픽 사건은 민족감정의 과잉반응이 아니라 미국의 문화적 패권주의를 깨닫게 한 중대한 사건이었다. 홍 교수는 “지금의 분위기는 기지운동 등 실생활로 다가간 20년 반미 운동이 누적된 결과에 정치적 민주화가 진전되고 인터넷 같은 기술환경이 발달하면서 나타난 것”이라며 “이는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구조적 변화”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지난 월드컵에서 거리를 점유하며 느낀 자신감이 반미 집회의 자발적 참여로 나타나고 있다”고 강조했다.

반미 물결은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

미국에 대한 한국 국민의 태도가 구조적 변화를 보이는 것이라면, 최근의 반미 분위기를 ‘언론의 왜곡된 선동에 따른 일시적 현상’으로 보는 판단은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 오류는 한국 안에서 미군의 위상을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몰고 갈지도 모른다. 이제 한국의 반미 구호는 80년대의 “양키 고 홈” 같은 추상적 정치 구호가 아니다. 일상에서의 구체적이고도 간절한 요구가 다양한 문화적 감수성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조∼지 부시 사∼과하라”, “재∼판권을 이∼양하라”, “소∼파를 개∼정하라”…. ‘고 신효순·심미선양 49재 추모제’가 열린 7월31일 한여름 늦은 저녁 어스름이 내리면서, 국민의 힘으로 월드컵 4강 신화를 만들어냈던 서울시청 앞 광장 한쪽에서 귀에 익은 리듬이 구호를 달리하며 끊이지 않고 메아리쳤다.

글 안영춘 기자 jona@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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