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천학살 관련 미 국립문서보관소 문서 최초 입수… 1950년 사리원·신막에서의 학살 기록
1950년 신천학살의 주범은 미군인가, ‘우리’인가. 은 당시 황해도에서 우익 치안대에 의해 저질러진 학살을 기록한 미군 쪽 문서를 미국 국립문서보관소(NARA·National Archives & Records Administration)에서 단독으로 입수했다. 이는 한국전쟁 중 북한에서 이뤄진 우익의 학살을 증언하는 최초의 문서다. “학살은 우리 내부의 문제”라는 주장이 좀더 진실에 가깝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 이번에 발굴한 '사리원과 신막 사건 조사 보고서'라는 제목의 이 문서는 모두 63쪽이며, 조사 보고서, 외신 기사, 관련자 증언록, 민간인 관련 사항에 대한 규정으로 구성돼 있다. 편집자
“이 작품에 그려진 사실들은 ‘우리 내부에서 저질러진 일’이었으므로 북이나 남의 어떤 부류들이 매우 싫어할 내용일지도 모른다.”(황석영, 작가의 말 중)
“조선전쟁을 도발하고 일시적으로 강점하였던 신천땅에서 수많은 애국자들과 무고한 주민들을 야수적으로 살해한 미제침략자들….”(북한 화보 2002년 3월호)
소설 의 근거 뒷받침
1950년 10∼12월, 황해도 신천군을 점령한 것은 남도 북도 아닌 광기였다. 북한 당국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신천군 주민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3만5천여명의 무고한 민간인들이 학살당했다. 총격에 의한 사망자가 전부는 아니다. 북한은 지난해 11월 신천에서 새로 발굴한 59구의 유골들은 머리뼈가 성한 것이 없고 괭이, 대못 등에 의한 상처가 있었다고 밝혔다. 당시 900여명이 신천군당 방공호에 갇혀 산 채로 불태워졌던 현장은 지금도 보존돼 있다. 전쟁의 포연이 가득한 한반도 전체가 지옥의 입구였다면 신천은 그 지옥의 중심부였던 셈이다. 도대체 1950년 신천에서는 무슨 일이, 누구에 의해, 왜 일어났을까.
1958년 학살의 현장에 ‘신천박물관’을 건립하고 당시 자료와 사망자들의 유품 등을 전시하고 있는 북한은 줄곧 신천학살은 미군에 의한 것이라 주장해왔다.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기세를 회복한 미군이 1950년 10월17일 신천을 점령한 뒤, 중국군의 개입으로 후퇴하기 시작한 12월17일까지 52일 동안 공산당에 협력한 혐의로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했다는 것이다. “미제살인귀들은 어머니들이 어린이를 찾다가 애가 타서 죽고 어린이들은 엄마를 찾다가 간이 말라 죽게 하라고 지껄였다… 원쑤들은 배고파 우는 어린이들에게 물과 젖을 준다고 하면서 휘발유를 퍼부었다.”( 2001년 5월호) 이러한 주장을 토대로 북한은 유엔의 진상조사를 요구하는 등 다각도로 미국을 압박해왔다.
한국 학계에서 진지하게 신천학살의 진위를 논의한 적은 거의 없다. 그러나 신천이 원적인 작가 황석영씨가 지난해 5월 출간한 장편소설 에서 북한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을 펴면서 새로운 논의의 물꼬를 텄다. 이 소설은 사건을 북한군에 협력했던 빈민층·머슴들과, 지주계급이 대부분이었던 우익 기독교도들 사이의 충돌로 묘사하고 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퇴각하는 북한군에 의해 대규모 처형이 이뤄지고, 미군 진주 뒤 유족들이 피의 복수극을 벌인다. 또 중국군이 들어오고 미군이 철수하면서 다시 우익 치안대와 공산계열 간에 대량학살이 자행되고…. 황씨는 결국 학살은 “우리 내부에서 저질러진 일”이라고 결론짓는다.
은 당시 황해도의 상황을 보여주며 황씨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미군문서를 단독 입수했다. 유엔군 사령부에 의해 작성되고 미8군 사령관이 수신자로 돼 있는 이 문서는 1950년 12월6일 황해도 사리원, 같은해 12월8일 신막에서 일어난 ‘문제의 사건’에 대한 조사 결과를 담고 있다. 유엔군 사령부는 사건이 유엔군총사령관의 임무수행 평가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을 우려해 조사를 명령했다. 상세한 조사과정으로 보아 이 문제를 꽤 심각하게 여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문제의 사건이란 다름아닌 우익 치안대(civil police·구체적인 한글 명칭이 표기돼 있지 않아 청년단, 치안대, 자치경찰 등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당시 정황을 고려해 좌익계열에 의해 가족을 빼앗긴 지주계급 청년들이 결성한 치안대로 통일함)에 의해 자행된 학살이다.
미군이 민간인 학살 제지
1950년 12월은 중국군에 밀려 미군이 서둘러 퇴각하던 시점이다. 그러니까 학살의 마지막 단계, 미군의 퇴각과 더불어 피난을 떠날 수밖에 없는 우익들이 ‘빨갱이의 씨’를 말리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던 때라 볼 수 있다. 1950년 12월6일 낮 12시경, 사리원 철로변 근처에서 난 총성을 조사하던 미군 622헌병대 소속 헌병 4명은 치안대원들이 도랑가에 민간인들을 몰아넣고 발포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헌병들은 총격을 중지시키고 치안대원들을 무장해제시킨 다음 중대장에게 사건을 보고했다. 당시 총격을 가하는 사람들의 대표인 이명구는 통역자를 통해 자신이 치안대원이며 민간인들은 공산주의자들이라고 밝혔다. 상황은 신속하게 전개됐다. 미 헌병대는 사망자를 근처에 매장하고 총격을 받은 59명 중 살아남은 17명에게 군의관의 간단한 치료를 받게 한 뒤 사리원역으로 이송했다. 사리원역에 도착할 즈음, 부상자 중 사망한 1명은 철로변에 버려졌고 나머지 인원은 피난 열차에 실렸다. 문서는 “총격을 가한 이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복수심에서 자신들의 권한을 넘어선 것이 명백하다”고 증언한다.
그날의 끔찍한 상황은 로이터-AAP 통신의 종군기자였던 존 콜레스(John Colless)의 기사를 통해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 콜레스는 그날 이전에도 치안대가 민간인들을 총살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던 터라,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사리원역으로 뛰어갔다. 그는 열차 안에서 참혹한 광경을 목격했다. “어떤 사람은 기관총에 팔목을 맞아서 손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 총으로 입을 맞은 사람도 있었고, 가슴과 위장 부분을 맞은 사람도 있었다… 나는 철도수송 지휘관에게 부상자들을 치료와 음식도 없이 아이와 여자들이 가득한 열차에 밀어넣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항의했다.” 나중에 그는 부상자들에게 지급된 군용 식량을 치안대원들이 먹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로부터 이틀 뒤인 1950년 12월8일 사리원에서 멀지 않은 신막 부근에서 치안대원들이 21명의 민간인들을 향해 총알을 발사하려는 순간을 영국군 장교 한명이 목격했다. 장교는 황급히 처형을 지연시킨 뒤 상부에 보고했다. 보고를 받고 급파된 두명의 영국군 통신장교는 처형을 중지시키고 민간인들을 신막 교도소로 이송시켰다. 조사에 따르면 이날 처형은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었다. 다음날 교도소를 방문한 영국군 통신장교는 그 민간인들이 서울로 이송되기 위해 출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날의 정황을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역시 문서에 참고용으로 첨부된 콜레스 기자의 기사를 읽어야 한다. “나는 처형이 있을 뻔했던 장소 근처의 마른 강바닥에서 민간인 복장의 주검들을 보았다. 그 중 한 구는 양손이 결박당해 있었는데 양손을 묶은 철사줄이 살 속으로 파고들어가 뼈까지 닿아 있었다. 그들은 총살당했다. 주검들에는 구멍이 나 있었고 일부는 나무와 돌로 덮여 있었다. 들춰보기 전에는 사체의 수를 알 수 없지만 적어도 5구가 부분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날씨가 매우 추웠기 때문에 그들이 언제 죽었는지 알아내기 어려웠지만 적어도 이틀은 된 것 같았다.” 영국군이 발견하기 이전에 이미 처형이 진행 중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기사에 따르면 영국군 정보장교인 버틀러 윌리엄스 대위가 신막 치안대장에게 가서 “처형을 중지시키지 않으면 당신을 쏘겠다”고 말한 뒤에야 처형이 중지됐다고 한다.
미 방첩대의 지시였다?
1951년 1월8일 유엔군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사건조사를 진행한 코네키(Konecki) 대령은 대구에서 관계자들을 심문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이 기록에서도 몇 가지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당시 다른 외신기자들과 함께 사리원 현장을 취재한 저널리스트 조지 길버트 갈린(George Gillbert Gallean)은 그날의 상황에 대해 묻자 12월6일 민간인들이 치안대에 의해 끌려가는 것을 발견하고 이들이 어디로 가는지를 묻기 위해 한국 헌병대를 찾아간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갈린이 통역관을 통해 헌병대 장교에게 “이곳 행정기관의 대표가 누구냐”고 묻자 그 장교는 “모두 (남쪽으로) 가버렸고 그나마 남은 사람들은 치안대”라고 대답했다. 이 말은 당시 권력의 공백상태가 심각했음을 보여준다. 시장, 경찰서장 등 주요 행정기관의 대표가 모두 도망쳐버린 상황에서(있었다고 해도 별로 도움은 안 됐겠지만) 복수심에 불타는 치안대의 학살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코네키 대령은 “관련 당국이 아닌 어떤 개인과도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라”고 요청했고 갈린은 이를 수락했다.
한편, 신막 사건 당시 처형을 중지시켰던 레너드 중위는 “치안대 대표가 처형이 미국 방첩대(CIC)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그와 함께 있었던 캄펠 중위도 비슷한 발언을 했다. “그 죄수들은 공산주의자 혐의가 있어 서울로 이송할 계획이었고, 처형은 미국 방첩대의 명령에 의한 것이지만 그 사실을 입증하긴 어렵다고 했다.” 문서를 살펴보면 조사과정에서 발언은 거의 무시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서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1. “사리원역에서 치안대가 재판 없이 56명의 정치범을 총으로 쏘았다”는 주장은 사실이다. 2. “적절한 의료조처 없이 부상당한 죄수들을 여자와 아이들이 잔뜩 타고 있는 열차에 밀어넣었다”는 주장은 인정되지 않는다. 3. “차량으로 사리원역으로 이송시켰으나 죽은 죄수는 철로변에 버려졌다”는 것은 사실이다. 4. “사리원엔 정부, 경찰책임자, 민간기관도 없었다”는 주장은 인정되지 않는다. 5. “영국 장교들이 치안대가 민간인 죄수를 처형하는 것을 막았다”는 기사는 사실이다. 6. 두 사건 관련 부대는 당시 규정 조항 내에서 행동을 취했으며, 상황을 파악한 뒤 적절한 조처를 취했다.
외신기자들의 지적에도 사리원에서 부상당한 민간인들에 대한 ‘부적절한 조처’를 인정하지 않고, 미군에 책임이 전가될 것을 우려해 사리원의 권력공백 상태를 부인하는 대목 등을 보면 ‘면피’하기 위한 미군의 의도가 감지된다. 그러나 문서에도 드러나 있듯, 당시 미군부대의 지휘관은 해당 지역에서 자치대를 관리·통제할 책임이 있고, 행정명령에 따라 관이 이용하는 민간치안대는 사령관의 재량 아래서 정해준 만큼의 무기를 소지할 수 있었다. 결국 미군의 관할 아래서 미군에 의해 무장된 치안대가 함부로 총을 휘두르는데도, 미군은 적절한 통제를 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손에 피를 묻힌 건 우리
동국대 강정구 교수는 이 문서가 보여주는 황해도 일대의 학살이 미군에 ‘면죄부’를 주지 않는다고 말한다. 미군에 의해 직접 자행된 사건이 아닐지라도, 작전지휘권이 미군에 귀속돼 있었기 때문에 궁극적인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또한 그는 “미국 방첩대의 지시”라는 발언에 주목한다. 학살은 주로 정보기관에서 교묘하게 주도하기 때문에 일반군인들은 모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궁극적인 책임은 미군이고 미군과 무관하게 적대가 표출되어 특히 서북청년단에 의한 자의적인 학살 또한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신천학살에 대한 그의 결론이다.
그러나 미군의 책임을 고려하더라도, 이 문서에 다뤄진 사건들은 ‘손에 피를 묻힌 건 바로 우리’라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콜레스 등 당시 기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사리원 사건 이전에도 끊임없이 치안대가 좌익계열을 대규모로 처형한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사리원과 신막의 상황이 이렇다면 기독교계의 세력이 강한 신천은 더 참혹했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에 드러나듯, 미군은 북진 중 평양 입성에 총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신천군을 완전히 장악하고 조직적으로 학살을 저지를 시간이 없었다. 남한으로의 퇴각은 더욱 황급하게 이뤄졌다.
“우리끼리는 상처도 아물게 됩네다. 모두 외세의 탓이라고 해 둡세다.” 에서 주인공을 안내하는 북한 지도원은 이렇게 말한다. ‘외세의 탓’이라고 해두면, 우리끼리의 상처는 저절로 아물게 될까. 신천학살의 진실을 찾아가는 작업은 이 작은 의문에서 시작한다. 진정한 화해는 문제를 덮어두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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