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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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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관용은 내일에 빛나리

등록 2002-04-10 15:00 수정 2020-05-02 19:22

한국정부의 탈북자 수용하는 자세, 통일 뒤 도덕적 리더십 확보 위한 좋은 기회

과거를 더듬으며 도착한 중국. 나는 변화된 현실에 놀랐다. 탈북자 신분으로 떠돌던 94년 중국은 한창 부흥을 위한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이제 곳곳에 고층빌딩이 즐비하고, 거리는 활기에 넘쳤다. 8년 동안 이토록 큰 변화가 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러나 탈북자의 현실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선양과 옌지 등 중국 곳곳에서 만난 탈북자들은 여전히 마음을 졸이며 온갖 불이익을 감수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500위안씩 돈을 쥐어주고 돌아섰지만 마음 한구석에 남은 응어리는 풀리지 않는다.

말뿐인 탈북자 전원 수용

현재 중국에는 5만∼8만명 정도의 탈북자가 있을 것으로 추산된다. 한국 입국을 희망하는 이들도 상당수다. 그러나 한국·중국·북한 등 당국자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이들은 계속 인권의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다. 스페인 대사관 사건을 계기로 탈북자 문제가 이슈로 떠올랐지만, 모두들 여론을 잠재우는 데만 급급하다.

통일부는 탈북자들이 한국행을 희망할 경우 전원 수용하겠다는 방침을 천명했다. 그러나 이것은 국민을 기만한 것일 뿐이다. 현재 중국주재 한국대사관에는 해마다 수백명의 탈북자가 한국으로의 망명을 신청한다. 그러나 대부분 거절당하고 있다. 중국과 외교적 마찰을 피한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우리 정부에게 의지만 있다면 길은 얼마든지 열려 있다. 스페인 대사관 사건에서 보듯 중국정부도 더 이상 국제적 규범을 무작정 거부할 수는 없다. 난민지위 인정 문제도 정부가 그들을 수용할 의지와 그에 따른 책임을 다하겠다는 태도만 분명히 밝히면 쉽게 풀릴 수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국주재 중국 외교관은 “한국정부가 중국 내 탈북자들을 난민으로 인정해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지도 않았다”면서 “한국의 일부 시민단체들도 난민으로 인정할 경우 그에 대한 책임을 누가 지겠느냐는 문제에 대해서는 명확한 언급이 없다”고 말했다. 중국정부는 난민으로 인정할 경우 발생할 비용이나 책임을 떠안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다. 한국정부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이 문제에 대해 입을 닫고 있다.

물론 북한과의 외교관계나 탈북러시를 우려한 중국정부가 최종적으로 어떤 선택을 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그러나 탈북자 문제를 해결할 일차적 책임은 한국정부와 국민에게 있다. 한반도 통일의 주체는 남한이고 남북한 통합은 우리가 원치 않아도 이루어질 것이다. 통일 이전까지 발생할 탈북자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것은 통일 뒤 남한이 북한 주민들을 어떻게 대하고 통합의 가치로 내세우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리고, 도덕적 리더십을 확보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서독은 자본주의적 가치로 볼 때 별 이득이 없는 정책을 반복했다. 동독의 정치범과 일반 주민들을 선별없이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 정착시킨 것이다. 그러한 도덕적 우위가 있었기에 통일 뒤 많은 후유증이 있었지만 동독주민들에게 도덕적 리더십을 행사할 수 있었다.

시민단체에 대한 당부

한국은 어떤가. 마지못해 수용하는 듯한 인식만 심어줄 뿐이다. 이런 태도로 남북통일 뒤 북한주민들에게 리더쉽을 행사할 수 있을까? 이런 안일한 자세는 남북통합 뒤 더 커다란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자각할 때가 됐다. 예멘은 통일 후 내전이 재발하지 않았던가. 자본주의적 효율성이라는 잣대로 접근하는 한 탈북자 문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다.

정부는 일단 더 많은 탈북자들이 한국에 올 수 있도록 해외에서 유랑하는 탈북자들의 입국사업을 적극 지원해야 한다. 물론 조용하고 신속하게 해야 한다. 또 이들의 자립을 유도하는 쪽으로 탈북자 정착사업을 전환해야 한다. 지금처럼 국내입국 뒤 일시적·획일적 금전지원을 하기보다는 탈북자의 노력과 태도에 따라 인센티브도 주는 쪽으로 가야만 한다.

시민단체에게도 당부하고 싶다. 공개적이고 공세적인 탈북자 국내입국 지원사업보다는 내실을 기해야 한다. 미입국 탈북자를 보호하는 아량 있는 운동을 계속해 많은 탈북자가 지속적으로 입국할 수 있도록 조용히 힘써달라.

김형덕/탈북자 hd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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