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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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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한 이들이 먼저 죽지 않는 사회를”

차별과 감염병에 대해 김승섭 고려대 보건과학대학 교수에게 묻다
등록 2020-03-28 23:37 수정 2020-05-03 04:29
김승섭 고려대 보건과학대학 교수. 류우종 기자

김승섭 고려대 보건과학대학 교수. 류우종 기자

“배송 노동자 사망, 콜센터 집단감염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불편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코로나19와 한국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3월25일 오전 서울 성북구 고려대학교 연구실에서 과 만난 김승섭(사진) 교수(보건과학대학)의 표정에 그늘이 가득했다. 학생들이 찾지 않는 학교는 봄 햇살이 가득했지만 고요했다. 2018년 7월 과 함께 24명의 천안함 침몰 생존자를 심층 분석(제1221호 ‘살아남은 게 죄입니까’ 참조)했던 그는, 지난해 안식년을 맞아 모교인 미국 하버드대에서 연구교수를 지낸 뒤 돌아왔다.

첫 질문으로 구로구 콜센터에서의 집단감염에 대해 묻자 김 교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2014년 다산콜센터 노동자의 건강을 연구했던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일부 언론에서 콜센터를 ‘닭장’에 비유했는데,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불편할 수 있는 표현이었다. 그들에게는 매일같이 생활하는 일터인데….” 그는 사회적 약자 이야기를 하는 중에 사회적 낙인을 강화하는 말을 하지 않을까 조심했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 등 사회에서 배제된 이들의 건강을 들여다봐온 그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연구에 임했는지 엿볼 수 있었다.

우리가 하지 않는 일을 대신하는 사람들

노동자 건강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이번 코로나19 유행 중 콜센터 집단감염과 배달 노동자 ‘쿠팡맨’ 사망사고는 다르게 보였을 것 같다.
새벽배송 노동자들이 코로나19 사태 이후 배달 물량이 늘었는데 보통 300개, 많을 때는 400개씩 배달했다고 한다. 300개를 10시간 동안 배달한다고 하면 2분에 한 개를 배달하는 셈인데 이것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인지 생각했다. 코로나19 이후 쌀이나 물처럼 무게가 많이 나가는 상품 주문도 늘었다. 공동체가 ‘거리 두기’를 강조하면서, 우리 일이지만 우리가 하지 않는 일을 그들이 대신하고 있었고, 그 노동자들이 대신 그 대가를 치렀던 거다.

콜센터는 어떻게 보았나.
2014년 연구하면서 콜센터 노동자들의 근무환경과 월급 등을 폭넓게 들여다봤다. 그분들이 받는 상담전화 건수가 실시간 모니터링되고 있었다. 배달 노동자의 배송 건수가 집계되는 것과 비슷하다. 콜센터 노동자들은 화장실에 가는 것까지 파악됐다. 자리를 오래 비우면 매니저가 ‘잡으러 오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노동자들은 계속 말하는 일을 하면서도 물이나 커피도 잘 마시지 않았다. 한 노동자가 월급내역을 보여주며 ‘근속연수가 5년이 넘었는데도 월급이 200만원이 되지 않는 일’을 계속해야 할지 내게 물었던 게 떠올랐다.

‘물리적(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라는 정부를 보면서 2018년 폭염 당시의 한국이 떠올랐다. 정부는 야외 작업을 하지 말고 집에서 냉방기기를 사용하도록 전기료를 깎아줬다. 하지만 한낮 뙤약볕에도 건설현장에서 일하지 않으면 생계를 위협받는 일용직 노동자, 집에 냉방기기가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언급하지 않았다.
‘재택근무를 하라’는 사회적 권고가 있었지만 재택근무를 할 수 없는 사람들, 물리적 거리 두기를 할 수 없는 노동자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당장 다음주를 살아남는 게 걱정인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 그 거리 두기는 바이러스로부터 안전해지는 길이지만 동시에 빈곤으로 가는 지름길이 된다. 이런 사회 지침은 한국 사회가 누구를 중심으로 돌아가는지 보여준다. 보호받아야 하는 시민 범주에서 누가 배제되는지 보여준다. 같은 맥락에서 ‘거리 두기’는 생물학적으로 바이러스 전파를 막기 위한 합리적인 권고지만, 코로나19 이전부터 고립돼 지냈던 사람들에게는 생존을 뒤흔드는 요구가 될 수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중증 지체장애인이다. 지체장애인이 자가격리 대상이 되면 활동보조인 없이 혼자 생활해야 하는데 스스로 끼니를 해결하기도 어렵다. 감염 예방을 위해선 위생이 중요한데 씻기도 쉽지 않다.

바이러스는 인종이나 성별, 국적을 가리지 않고 전파된다는 점에서 ‘무차별’적이고 ‘평등’하다고 하지만 감염되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사회 취약계층이 많았다.
국제적인 감염병 대유행과 같이 거대한 재난이 닥치면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피해를 볼 거라고 생각하지만, 역사를 살펴보면 그런 경우는 없었다. 1918년 시작돼 2천만 명 넘게 사망했던 ‘스페인 독감’도, 2005년 미국 남부를 덮쳤던 ‘허리케인 카트리나’에서도 피해는 ‘무차별’적이지 않았다. 사망 위험이 높았던 집단은 흑인 노인이었다. 682명이 사망한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에선 18살 이상 모든 연령대에서 흑인이 백인보다 1.7~4배 사망률이 높았다. 중세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죽음에 이르게 했던 ‘흑사병’에도 여성이 남성보다 더 많이 죽었고, 열악한 영양상태로 인해 뼈 발육이 부진했던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이 죽었다는 논문이 최근까지 계속 나왔다. 그런데 사회 취약계층과 가난한 사람의 목소리는 재난 상황에서 그들이 받는 피해에 비해 덜 드러난다. 요즘처럼 엄혹한 시기에는 아프고 힘들다고 소리치는 것조차 권력을 필요로 하는데, 그 권력을 갖지 못한 이들의 신음은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들여다보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다.

비과학적이라는 것이 확인된 낙인

의료계에선 코로나19 같은 감염병 확산 상황에서 ‘정치’는 배제하자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총선을 앞두고 자신의 정당에 유리하게 이 상황을 이용하려는 정치는 배제해야 한다. 하지만 정치의 의미는 그게 다가 아니다. 정치는 공동체가 지켜야할 가치가 무엇인지를 결정하고 한정된 사회적 자원을 배분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감염병에 대해 의사들이 모르는 영역도 있다. 바이러스 자체와 감염 진단, 치료에 관한 것은 감염내과 의사와 바이러스 전문가들이 가장 잘 알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게 차단된 실험실에서 바이러스를 일대일로 만나 감염되지 않는다. 수많은 사회적·환경적 요인이 계속 작동하는 ‘오염된’ 환경에서 인간은 살아가고, 그곳에서 바이러스를 만난다. 전문가인 의사도 코로나19로 가장 많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매일 직면하는 구체적인 삶의 조건을 알지 못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치가 필요하다. 물리적 거리 두기를 포함한 모든 사회적 지침은 이 시간을 함께 견뎌내고 살아내기 위한 것인데, 그 과정에서 누군가 생존 자체를 위협받는다면 국가가 정치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최근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한 ‘공중보건의 역사’ 수업에서 코로나19와 사회적 소수자에 대해 강의하며, 코로나19 이후 한국 사회에서 불평등이 더 커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고 들었다. 어떤 이유인가.
가진 사회적 자원이 모두 다른 개개인에게 이 재난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외신 보도에서 코로나19 감염 위협 때문에 관광산업이 위축된 이면에 부자들을 위한 제트기 관광상품이 활성화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월세를 낼 길이 없어 막막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한쪽에선 한 장에 8만원이 넘는 디자인 마스크가 매진돼 4월까지 구할 수 없을 거라 한다. 병원에 가면 감염될까봐 아파도 병원에 가지 않고 참아서 증상이 나빠지는 사람이 있는데, 부유한 개인을 따로 진료하는 VIP 응급실 서비스가 늘어나고 있다. 모두가 힘들다고 한다. 하지만 힘든 시간의 의미는 개인에 따라 다르다.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저 사람이 건강해야 나도 안전할 수 있다는, 우리는 모두 연결돼 있다’는 깨우침을 사회가 배운다고 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일 수 있다. 사회 구성원들이 ‘결국 각자도생이고 언제 닥칠지 모르는 재난에서 스스로 지키기 위해 더 많은 자원을 챙겨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면 소득 불평등과 건강 불평등이 더욱 커질 수 있다.

각자도생 분위기에선 감염환자 낙인이 강화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코로나19에서 낙인에 관해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감염병에 대한 낙인이 얼마나 비과학적이었는지 그 문제점이 잘 드러났다는 사실이다. 낙인은 개인의 구체적인 삶에 대해 묻지 않고 그가 속한 집단이 가진 어떤 부정적인 특성 하나로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매도하는 일이다. 그런 낙인 속에서 한 인간의 삶은 지워지고 바이러스 자체가 된다. 중국에서 바이러스가 처음 발견됐을 때 낙인의 대상은 중국인이었다. 이후 한국에서 지역사회 감염이 광범위하게 발생하자 대구에 거주하는 분들에게 낙인이 찍혔다. 비슷한 시기에 유럽과 미국에서는 아시아인들이 바이러스 전파자로 취급받으며 폭행당하는 사건이 이어졌다. 바이러스가 중국 우한에서 처음 발견된 뒤 불과 4개월이 지난 지금, 코로나19를 전파할 수 있는 확진자는 아시아가 아닌 이탈리아, 미국, 스위스에서 가장 많은 상황이다.

배달대행업체 노동자가 배달할 음식을 받아들고 대구시 한 식당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배달대행업체 노동자가 배달할 음식을 받아들고 대구시 한 식당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낙인은 방역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감염병과 관련해 사회적 낙인이 방역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과학적으로도 뒷받침되는 주장인가.
그렇다. 감염병 낙인은 윤리적으로 그릇된 것일 뿐 아니라, 공중보건 관점에서 과학적 방역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고위험군 사람들이 낙인이 두려워 자신의 정보를 투명하게 의료진과 공유하지 않는 상황에서, 검진이나 격리, 치료는 무용지물이 된다. 관련해 연구가 가장 많이 된 감염병은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감염이다. 코로나19와 전파 경로나 치명률은 다르지만, 바이러스 감염을 어떻게 적절히 치료하고 전파를 막을 수 있는지 보여준다. 전세계적으로 에이즈(AIDS) 낙인이 가장 심한 나라인 한국에서 감염환자에 대한 낙인은 고위험군인 사람들이 검진을 꺼리게 하고, 감염 이후 치료도 망설이게 만든다. 이런 사회 환경에서 지난 30년간의 의학 발전은 무용지물이 된다. 바이러스는 과학의 손이 닿지 않는 음지에서 더 빨리 퍼진다. 코로나19도 비슷하다. 서울 백병원을 방문했던 대구 출신 환자가 낙인이 두려워 출신 지역을 밝히지 못해 결과적으로 추가 감염이 일어났다. 이탈리아에서 왜 코로나19가 이렇게 빠르게, 많이 퍼졌는지에 대한 설명 중 하나는 중국에서 다른 나라를 거쳐 이탈리아로 온 사람들이 사회적 낙인을 두려워해 중국 방문 사실을 숨겼다는 것이다. 모두가 예민한 상황에서 부득이하게 ‘감염원’이 된 환자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불안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방역에 도움이 되는지는 다른 문제다.

사회적 낙인이 강했던 집단이 건강 취약계층이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새롭게 조명되기도 했다. 경북 청도대남병원에서 집단감염이 됐던 정신장애인들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한국 사회에서 ‘탈시설’과 ‘커뮤니티 케어’에 대한 논의가 진전될 거라고 보는가.
한국 사회의 가장 약한 사람들이 코로나19를 거치며 무너지는 모습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청도대남병원 정신장애인 폐쇄병동의 확진자 비율이 98%라는 사실에 모두가 충격받았다. 이 사건으로 탈시설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는 듯 했지만, 지금은 사회적 관심이 다른 문제로 넘어갔다. 자신의 존엄성을 지킬 수 없는 열악한 시설에 수용돼 수십 년을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논의는 ‘한국 사회에서 존엄한 인간일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묻는 말과 닿아 있다. 정신장애인들이 시설 밖으로 나온다고 해도 이들과 함께 살아갈 준비가 되지 않아 낙인이 횡행하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더 크고 열악한 또 다른 시설이 될 것이다. 탈시설 운동은 시설이라는 물리적 공간을 없애는 것을 넘어 특정 사람을 가두고 사회로부터 격리했던 역사를 되돌아봐야 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존엄을 위해 어떤 정치를 해야 하는지 물어야 한다.

코로나19와 함께 사는 법장애와 관련한 책을 번역하고 있다는데 어떤 내용인지 간략하게 설명해줄 수 있을까. 독자들은 언제 책을 만날 수 있나.

라는 책을 작업하고 있다. 개인의 노력에 따른 찬란한 성공 신화가 즐비하고, 독립을 지상의 가치로 여기는 미국의 역사를 장애인 시선에서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책이다. ‘민주주의의 역사는 개인의 성공이 아니라 상호의존으로 이뤄졌다’고 말하며 능력주의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초벌 번역을 마쳤고 올해 안에 내놓을 수 있을 것 같다.

보건학자로서 ‘장애’에 집중한 이유가 있다면.
지난 몇 년간 비정규직 노동자, 성소수자, 결혼 이주여성의 건강을 연구하면서 한국 사회가 ‘온전한 시민’이라고 여기는 대상은 누구인지 의문을 가졌다.

장애의 역사는 그 사회를 운영할 수 있는 ‘능력 있는 몸’(able-bodiness)을 가진 사람을 누가, 어떻게 규정했는지 묻는 과정이기도 하다. 여성이 고등교육을 받지 않아야 하고 투표할 수 없다고 주장했던 것도, 흑인은 자유를 감당할 능력이 없으니 노예로 살아야 한다고 했던 것도 실은 모두 그들의 몸이 ‘온전한 시민’이 되기에 충분치 않다는 이유였다. 장애라는 렌즈를 통해 현재 한국 사회에 상식처럼 스며들어 누구도 그 합리성을 의심하지 않는 ‘능력주의’에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다. 능력 차이라는 ‘신화’ 속에서 수많은 불평등이 합리화되고, 그 불평등이 인간에게 질병과 상처를 계속 남기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코로나19와 관련해 어떻게 전망하는지.
데이터 과학자로서 지금은 무엇도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새로운 변수가 언제 어떻게 등장할지 알 수 없다. 다만 백신이 상용화될 때까지는 계속 감염환자가 나올 가능성이 있고 코로나19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어쩔 수 없이 배워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백신을 개발해 상용화가 되기까지는 아무리 일러도 1년 이상 걸릴 텐데, 그사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한다. 가장 약한 이들이 가장 먼저 죽는 일은 함께 막았으면 한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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