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줘야 하나” “고소득자에게도 줘야 하나” “재원은 어디서 마련하나”
기본소득 논쟁에서 반대쪽 인사가 많이 던지는 ‘단골 질문’이다. ‘누구에게나(보편성), 조건 없이(무조건·무심사 지급), 개인별(가구 아닌 개인에게 지급)로, 정기적으로 현금을 지급한다’는 기본소득의 정의에서 ‘보편성’과 ‘무조건성’에 의문을 표하는 것이다. 기본소득 주장은 4차 산업혁명에 따라 일자리가 줄어들고 복지 수요가 커지며 초래할 ‘디스토피아’(암울한 미래상)를 막자는 문제의식에서 나온 대안이다. 하지만 필연적으로 ‘보편 지급’과 ‘선별 지급’이라는 대립된 쟁점을 두고 사회적 논쟁이 불거진다. 전 국민에게 줄 기본소득의 재원을 어디서 마련할지도 끊이지 않는 논쟁거리다.
‘긴급 생계지원 수당’에 가까워
그런데 코로나19로 사회·경제 활동이 ‘강제 멈춤’되면서 기본소득이 구원투수로 호출됐다. 코로나19로 인한 경기침체와 ‘물리적 거리 두기’에 따라 사회구성원 모두가 타격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일을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이’가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이는 내수 침체와 경제위기로 연결된다. 기본소득 구상의 밑그림이던 디스토피아가 재난 상황에서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재난+기본소득’이 사회적 의제로 떠올랐고, 기본소득이 내포한 ‘보편’ 대 ‘선별’ 논쟁도 같이 따라왔다. 보수 대 진보라는 기존 대치를 넘어 진보 진영 안에서도 서로 다른 시각이 부딪치며 ‘논쟁의 전선’은 여러 갈래로 엇갈리는 상황이다. 2월 말 공론장에 ‘재난기본소득’이란 말이 올라왔을 때만 해도 ‘재난’과 ‘기본소득’이라는 조합은 하나의 ‘아이디어’로만 간주됐다. 2월25일 기본소득당이 “대구·청도 지역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설정하고 일시적인 기본소득을 지급하라”는 논평을 내고, 26일 민간 연구기관인 랩(LAB)2050 윤형중 정책팀장이 <미디어오늘> 칼럼에서 “재난기본소득을 검토해보자”고 주장했다. 2월29일 이재웅 전 쏘카 대표는 “재난기본소득 50만원 지급” 청와대 청원을 올렸다. 하지만 기본소득을 주장하던 진영에선 ‘정기 지급’이란 조건이 빠진 일회성 현금 지급에 ‘기본소득’이란 명칭을 붙이는 게 기본소득 정신을 왜곡할 수 있다는 우려도 조심스레 나왔다.
아이디어에 불과했던 제안이 사회적 의제로 떠오른 건 코로나19로 인한 전세계적인 경제위기 공포가 빠른 속도로 현실화됐기 때문이다. 김경수 경남도지사의 ‘전 국민 100만원 기본소득’ 제안 논의 과정에 참여했던 이관후 경남연구원 연구위원은 <한겨레21>과 한 전화 통화에서 말했다. “2월 중순 추가경정예산(추경) 필요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기획재정부(기재부)는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기재부도 필요성을 인정하고 추경이 통과됐다. 계속 재정을 풀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힘을 받는다. 한 달 사이 상황이 빠르게 바뀌고 있다. 굉장히 예측하기 어렵고 유동적인 상황이다.”
정부와 정치권이 신중한 입장을 취하며 재난기본소득을 1차 추경안에 반영하지 않자, 코로나19 피해를 피부로 느끼는 지방자치단체가 먼저 움직였다. 3월 초 김경수 지사,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국민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지급하는 재난기본소득을 제안한 지 얼마 안 돼 전북 전주시가 처음 실행에 옮겼다. 3월13일 전주시는 중위소득(국민 소득을 크기로 줄세웠을 때 중간값) 80% 이하 주민 5만여 명에게 1인당 52만7천원 지급을 결정했다. 3월25일 현재 17개 광역단체 중 12곳에서 재난긴급생활비(서울), 긴급생활안정지원금(강원), 긴급재난소득(경남) 등의 이름으로 일정 소득 수준 이하 계층에게 현금이나 지역 상품권을 주기로 결정했다.
‘개문발차’한 논의, 중앙정부로 넘어간 공
대부분 광역·기초 단체들의 결정은 일정 소득수준 이하 계층에게 선별 지급하는 데 방점을 찍기 때문에 기본소득이라기보다는 ‘긴급 생계지원 수당’에 가깝다. 하지만 재난이 장기화 조짐을 보이며 지자체가 ‘개문발차’한 재난기본소득 논의는 다시 중앙정부로 향한다. 지자체별 재정 상태에 따라 긴급 수당 지원을 결정하지 못한 곳도 있고, 지원하더라도 방식이나 금액에서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전국 시장·군수·구청장협의회는 3월25일 “재난수당이냐 기본소득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중앙정부 차원의 긴급 재정과 국비 지원 정책이 하루빨리 마련돼야 한다”고 호소했다. 앞서 경기도에서 ‘청년 기본소득’(청년배당)을 실험한 이재명 지사는 3월24일 “경기도민 1364만 명에게 1명당 10만원씩 보편적 재난기본소득을 3개월 내 해당 시·군에서 쓸 수 있는 지역화폐로 지급하겠다”고 전격 발표했다.
아래로부터의 요구에 정부가 압박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청와대는 3월 마지막 주에 결론을 내릴 방침이다. 청와대 역시 보편 지급과 선별 지급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지 고심한다. “기본소득은 총선용 현금 살포이자 포퓰리즘”이라고 제동을 건 미래통합당이나, 현금 지원보다 감세와 규제 완화 등을 요구하는 경영계처럼 보수 진영은 재난기본소득에 부정적이다. 균형재정과 재정건전성에 목매는 기재부도 현금 지원에 거부감을 보인다. 하지만 청와대가 고심하는 이유는 이들의 반대뿐만 아니라 보편 지급의 정책적 실효성을 쉽게 가늠하지 못하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진보 진영 안에서도 모든 국민에게 일정액을 보편 지급하는 것을 두고 의견이 엇갈린다. 모두 취약계층을 지원해야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지만 유례없는 재난 상황에서 모두에게 주는 게 효과적인지, 더 지원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주는 게 효과적인지를 두고 시각차가 있다.
그동안 기본소득 논의를 주도해온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는 “기본소득이란 이름으로 결이 다른 주장이 봇물 터지듯 나오는 것을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는 기대와 우려의 시선으로 보았다”면서도 “현금 지원을 무조건적일 뿐만 아니라 보편적으로 해야 하는 더 큰 이유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가 고통을 겪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고통이 직간접적으로 모두를 이어주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보편적 재난기본소득 실시를 촉구했다.
안효상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상임이사는 <한겨레21>과 한 전화 통화에서 말했다. “재난기본소득은 국민이 일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생활을 유지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으로 기본소득 아이디어를 빌려온 것이다. 평소 복지제도가 정상적으로 돌아갈 때 선별 기준이 있다고 하지만, 현재는 경제 상황이 바뀌었다. 소득과 재산을 기준으로 어려움을 선별하는 게 쉽지도 않고 (행정력) 낭비가 될 수 있다.”
코로나19 극복을 위해서는 당분간 경제·사회 활동을 줄여야 하는데 이를 위해 소득이 보장돼야 하고, 신속하게 지원하려면 선별보다는 모두에게 일괄적으로 주는 게 효율적이라고 주장한다. 재원 마련에 대한 우려에, 기본소득론자들은 ‘비상한 상황’에서 ‘담대한 사고’가 있어야 한다고 반박한다. 안효상 상임이사는 “(재난기본소득은) 돈을 돌게 하기 위한 출발점에 관한 문제다. 제한적 재원 지원으로만 볼 게 아니라 새로운 예산을 마련하기 위한 지출이라고 사고를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부실한 사회안전망 드러나
재난기본소득을 초기에 제안했던 윤형중 정책팀장도 “재난기본소득 논의가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재정건전성 신화를 깨는 데 일조한 것 같다. 그래서 전주시도 빠른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이라고 본다. 논쟁이 벌어진 김에 제대로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헬리콥터 드롭’(헬리콥터에서 돈을 뿌리는 것처럼 국민에게 현금을 지급한다는 뜻)이라는 말이 화제가 될 정도로 미국을 비롯해 국외 여러 나라가 현금 지급 중심의 대책을 내놓는 상황도 이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재정의 효과 측면에서 ‘보편’과 ‘선별’을 따져봐야 한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위원장은 <한겨레21>과 한 전화 통화에서 사회구성원의 ‘대응력’을 강조했다. “경제적 타격이 전체 국민에게 다 있다. 하지만 하루 이틀, 한 달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몇 달을 견딜 수 있는 사람도 있다. 대응력이 계층별로 차이가 있다면 좀더 절박한 대상에게 재원을 집중하는 게 효과적이라고 본다.” 오건호 위원장은 경기도의 1인당 10만원 지급 결정에 대해서도 “취약계층에는 실질적인 생계 도움이 되지 않고 상위계층에는 의미 없는 금액일 수 있다”고 비판적인 시각을 보였다. 그는 ‘중위소득 (100%) 이하’ 같은 ‘느슨한 선별 기준’을 적용하면 필요한 지원에서 소외되는 사람이 적고, 설사 ‘사각지대’가 발생하더라도 기존 복지 서비스로 보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재원을 필요한 사람에게 집중해서 쓰자는 이야기다.
재난기본소득의 보편 지급과 별개로 기존 사회복지 서비스 문턱을 한시적으로라도 낮춰서 위기에 빠진 이들을 끌어안아야 한다는 주장도 계속 나온다. 오건호 위원장은 “현재 생업이 꺾이는 사람들에게 실업급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등 부실한 사회안전망이 이번에 드러났다”고 했다. 퇴직 전 3개월 평균 임금의 60%를 최대 9개월까지 받을 수 있는 현행 실업급여 제도는 구직을 전제로 하는데다, 고용보험 밖 노동자가 혜택을 받을 수 없어 코로나19 상황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났다. 한계상황에 몰린 소상공인과 자영업자에 대한 정부 지원 대책도 아직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가운데 추가 대책 요구도 커지고 있다.
찬반 논란을 넘어
김윤영 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은 “지금 논의가 경기부양 관점에서 다뤄지는데 당장 현금이 없는 사람들, 최소한의 지출도 못하는 이들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 주택 월세, 대출 이자, 공과금 등을 낼 수 없는 이들에게 지역화폐나 상품권, 쿠폰 등은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고 꼬집는다. 그는 “일시적으로라도 긴급복지지원제도의 생계급여 지급 재산 기준을 없애야 한다. 또 해고 금지, 월세 면제 등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기간만큼 지원하는 혁신적인 대책이 필요한 때 아니냐”고 되묻는다.
재난이 쏘아 올린 기본소득 논의가 코로나19 사태를 거치며 계속 사회 의제로 남아 있을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기본소득이 내다봤던 디스토피아가 눈앞에 벌어진데다 지금 상황이 장기화할 경우 기본소득 논의는 다시 힘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윤형중 정책팀장은 “재난기본소득을 찬반 논란으로 갈 게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단으로 유효한지에 대한 맥락에서 접근하자”고 제안했다. 안효상 상임이사는 “무상급식, 아동수당 등의 복지를 경험한 사회구성원에게 재난기본소득도 또 하나의 경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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