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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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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폐된 289억3288만원

2014~2019년 7월 국민건강보험이 적발한 산재은폐 자료 분석

2만1896명 건강보험 청구… 제조업 종사자가 45%로 가장 높아
등록 2020-02-01 08:10 수정 2020-05-02 19:29
 산재은폐 기획
①(통계)은폐된 289억3288만원 
②(사례)막히고 또 막히고…산재 노동자 20명 심층 인터뷰
③(대안)산재는 당연히 산재보험으로
④(인터뷰)국민건강보험공단·고용노동부 인터뷰
⑤(희망)산재보험, 594개 사업장에서 265만개로
산재은폐의 대부분은 외상에 따른 신체 손상이다. 장수경 기자

산재은폐의 대부분은 외상에 따른 신체 손상이다. 장수경 기자

‘산업재해’라고 하면 사람들은 주로 대형 사망사고를 떠올린다. 언론을 통해 각인된 효과다. 그래서 산업재해는 내 피부에 잘 와닿지 않는 단어다. 직장에서 넘어져 발목 인대가 찢어진 경우, 장시간 앉아서 일하다 허리 디스크가 생긴 경우, 기계를 다루다 손이 베인 경우, 우리는 산재로 보상받을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산재보험으로 보상을 신청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할까.
노동자들은 경미한 부상을 대부분 묻고 넘어간다. 개인 돈을 쓰든 건강보험이나 실비보험을 이용하든 스스로 해결한다. 산재보험으로 보상받으려면 상당한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써야 하기 때문이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산재가 은폐되는 환경에선 큰 부상도 은폐되고 만다.
도대체 한국에서 얼마나 많은 산재가 은폐될까. 주로 어떤 집단에서, 왜 산재가 은폐될까. 산재를 당하고도 산재보험으로 보상받지 못한 노동자는 어떤 일을 겪을까. 은 아름다운재단, 노동건강연대, 윤소하 정의당 의원실과 협력해 산재은폐를 처음으로 집중 분석했다. 산재보험이 ‘그림의 떡’이 된 원인과 해결책도 찾아봤다.

변지민 기자 dr@hani.co.kr

한국의 산재 통계는 다소 특이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사망률은 높은데 부상률은 낮은 편이다. 더불어민주당 산하 민주연구원은 2019년 2월 발행한 ‘이슈브리핑’에서 2016년 국가별 산업재해율을 비교했다. 한국은 매년 노동자 1만 명당 부상 48.4명, 사망 1.05명이 발생한다.

다른 나라의 수치는 사뭇 다르다. 똑같이 노동자 1만 명당 비교했을 때 독일은 부상 181.2명, 사망 0.1명, 오스트리아는 부상 195.2, 사망 0.2명, 이탈리아는 부상 131.4명, 사망 0.24명 등이다. 한국보다 부상자 비율이 서너 배 높은데 사망자 비율은 5~10배 낮다. 사망자 비율이 1만 명당 0.82명으로, 한국과 가장 비슷한 멕시코는 부상자 비율이 1만 명당 300.3명이나 된다. 유독 한국 노동자만 덜 다치는데 많이 죽는다? 뭔가 의아하다.

전문가들은 한국 노동자의 부상이 대부분 은폐돼, 실제보다 부상률이 낮게 집계된다고 입을 모은다. 사망사고는 은폐하기 어렵지만 부상은 쉽게 은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기사에서는 ‘산재은폐’라는 말을 고의적·자발적 은폐뿐 아니라 구조적·비자발적 은폐까지 더한 넓은 의미로 썼다.

은 감춰진 산재를 들춰보기 위해 정부 공식 통계를 입수해 분석했다. 윤소하 정의당 의원실을 통해,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산재은폐 사실을 적발해 2014년부터 2019년 7월까지 환수한 내역(이하 ‘건보 산재은폐 환수자료’)을 받았다. 여기에는 5년7개월간 2만1896명이 289억3288만원의 진료비를 산재보험 대신 건강보험으로 청구한 상세내역이 담겼다(개인정보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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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재 승인율 90%의 비밀

국민건강보험은 매년 건강보험 혜택을 받은 노동자 중 일부를 뽑아 산재가 아닌지 조사한다. 원래 산재보험에서 진료비가 나갔어야 하는데, 산재가 은폐되면서 건강보험 재정이 대신 축나고 있기 때문이다. 조사 대상 중 산재로 확인된 경우 사업주와 노동자 등에게 비용을 환수한다. 그 세부 내역이 기사로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동안 정부기관이 산재은폐를 확인한 자료 중 가장 방대한 규모기도 하다.

건보 산재은폐 환수자료를 보면, 감춰진 산재 중 대부분이 ‘가벼운 산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전체 2만1896명 중 요양기간이 7일 이하인 노동자가 27.5%, 28일 이하인 노동자가 81.6%였다. 진료비도 100만원 이내가 55.1%, 200만원 이내가 83.4%였다.

공식 인정된 산재 통계와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확연하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이 올해 1월8일 공개한 ‘2018년 산업재해 현황분석’에 따르면, 산재 승인 건수 중 86%는 요양기간이 29일 이상이었다. 전체 산재 중 요양기간이 한 달 미만인 가벼운 산재는 대부분 신청조차 하지 않고, 그 이상일 때만 신청한다는 뜻이다. 크게 다친 노동자만 산재를 신청하다보니 근로복지공단의 ‘업무상 사고’ 산재 승인율은 90%를 훌쩍 넘는다. 정부의 산재 통계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

까다로운 절차, 부상 약하면 신청 안 해

가벼운 산재가 감춰지는 주요 이유는 산재보험 문턱이 높아서다. 임준 서울시립대 교수는 “노동자 입장에서 산재보험 청구 절차는 굉장히 복잡하고 불편하다. 건강보험은 진료비 청구를 의료기관이 대신해주는데 산재보험은 노동자가 직접 서류를 준비해 청구해야 한다. 업무와 질병 사이에 인과성도 증명해야 하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재해 정도가 커서 산재를 신청하지 않으면 생계에 큰 타격을 입는 경우만 신청하게 된다”고 말했다.

가벼운 산재가 주로 은폐되다보니 업종별 은폐율에도 영향을 미친다. 원래 산재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양대 업종은 제조업과 건설업이다. 가장 많은 노동자가 종사하는 업종이기도 하다. 2018년 산재가 승인된 노동자를 살펴보면 제조업 종사 비율이 26.8%, 건설업 종사 비율이 27.1%다. 그런데 건보 산재은폐 환수자료를 보면 수치가 사뭇 다르다. 산재은폐 건 중 제조업 종사 비율은 45.3%, 건설업 종사 비율은 14.7%다. 상대적으로 제조업에서 산재은폐가 많이 일어나고 건설업에선 적게 일어난다는 뜻이다.

임 교수는 “제조업보다 건설업에서 큰 사고가 많이 발생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했다. 실제 종사자 1만 명당 사망자가 나오는 비율을 보면, 제조업(1.14명)보다 건설업(1.94명)이 월등히 높다(2018년 기준). 건보 산재은폐 환수자료에서 요양기간과 진료비의 평균값도 제조업(19일, 122만7030원)보다 건설업(22일, 163만8228원)이 높다. 건설업에선 큰 사고가 많이 나므로 산재가 덜 은폐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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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재은폐의 85%는 외상에 따른 손상

산재와 산재은폐 모두 고연령에서 많았지만, 승인 대비 은폐 비율은 저연령에서 조금 높게 나타났다. 이 또한 비슷한 맥락이다. 저연령 노동자는 똑같은 사고를 겪더라도 신체가 튼튼해 덜 다치고 회복 속도도 빠르다. 고연령 노동자는 산재를 반복해 겪었을 가능성이 크며 피해 정도도 크다. 산재보험으로 신청할 가능성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다. 실제 건보 산재은폐 환수자료에서 연령별로 요양기간과 진료비의 평균을 비교해보면 18~29살(15일, 105만6695원), 30대(17일, 113만1167원), 40대(19일, 128만3868원), 50대(22일, 150만7761원), 60살 이상(22일, 164만1330원)에서 연령이 높을수록 요양기간이 길고 진료비가 많다.

산재와 산재은폐 모두 ‘작은 직장’에서 많았지만, 승인 대비 은폐 비율은 ‘큰 직장’에서 다소 높게 나타났다. 규모가 큰 직장은 ‘공상’을 실시할 경제적 여력이 커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공상은 노동자가 산재보험을 신청하지 않는 대신 회사가 요양비를 주는 암묵적인 제도를 말한다. 또 회사가 산재보험 청구를 방해할 때, 회사와 다퉈가면서까지 산재보험을 신청할 유인이 적어 공상을 신청하는 경우도 많다. 성별로 구분하면 남성에게 산재가 많이 발생하고, 승인 대비 은폐 비율도 높았다.

질병별로 살펴보면 외상에 따른 손상이 85.2%로 산재은폐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중에서도 손·손목, 머리, 발·발목 순으로 은폐 건수가 많았다. 외상에 따른 합병증·중독·화상·부식·동상 등을 더하면 넓게 봐서 94.2%가량이 손상에 해당했다. 심장질환·당뇨병·정신질환 등 손상이 아닌 질병은 모두 4.6%에 불과했다.

이번 자료를 함께 살펴본 김명희 시민건강연구소 건강형평성연구센터장은 “상병 내역을 봤을 때 손이 찢어지거나 발이 부러지는 등 제조업·건설업의 전형적 사고 형태를 보여준다”며 “은폐된 산재가 가벼운 사고라고만 볼 수 없다”고 했다. 앞서 주로 은폐된다고 했던 ‘가벼운 산재’는 상대적 의미일 뿐 실제 가볍지 않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은폐 추정액 연간 최대 3218억원

건보 산재은폐 환수자료는 ‘감춰진 산재’를 모두 보여주지는 않는다. 국민건강보험에서 용역 발주해 서울대 산학협력단이 수행한 ‘산재은폐로 인한 건강보험 재정누수 방지 방안 연구’(2018) 보고서를 보면, 산재은폐의 전체 규모가 연간 최소 277억원에서 최대 3218억원 규모로 추정된다. 보고서는 산재은폐율이 추정 방식에 따라 21%에서 42.4%에 이른다고 봤다.

이번 자료가 은폐된 산재 전체의 특성을 대표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서울대 산학협력단 연구에 참여한 박일수 위덕대 교수는 “국민건강보험공단은 환수내역을 찾을 때 주로 손상 상병에 집중해서 조사하기 때문에, 다른 상병은 적게 환수됐을 가능성이 있다(앞의 은폐 규모 연구에선 전체 상병 고려). 또 건강보험을 아예 이용하지 않고 자동차보험 등 다른 보험을 이용한 경우도 조사 대상에서 빠졌다는 한계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국민건강보험은 환자의 자발적인 답변에 상당 부분 의존해 조사하므로, 환자가 거짓말할 경우 산재은폐를 밝혀내기 어렵다는 한계도 있다.

분석 대상과 방식에 따라서도 은폐율이 다르게 계산될 수 있다. 산재은폐 결정액(환수액과 다름) 내역을 기준으로 분석한 서울대 산학협력단 연구에선 의 분석과 정반대로 사업장 규모가 작을수록 산재은폐율이 높았고, 건설업이 제조업보다 산재은폐율이 높았다.

산재은폐를 줄이려면 근본적으로 제도를 바꿔 산재 진입 문턱을 낮춰야 한다. 서울대 산학협력단 연구보고서를 보면 “현재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의료기관이 의료서비스 제공 후 환자의 가입보험 주체에 상관없이 국민건강보험(NHI) 또는 국민건강서비스(NHS)로 진료비를 청구하고 지급”받으며 “산재보험이나 기타 다른 보험자와 해당 환자의 진료비를 정산하거나 사전 계약을 통해 일정한 보험료를 지급받는 형태”라고 밝혔다. 쉽게 말해 환자는 건강보험이든 산재보험이든 일단 아프면 진료를 받고, 나중에 보험회사끼리 비용을 정산한다는 이야기다.

산재 사고를 당한 노동자가 처음 도착하는 병원 응급실에서부터 산재를 기록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김대희 가톨릭대 인천성모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의료진은 응급실에 온 환자를 진료한 뒤 국가응급진료정보망(NEDIS)에 손상 기전을 기록하도록 돼 있다. 현재는 교통·폭력·자해 등을 기록하는데, 일하다가 다친 경우 산재를 기록하도록 하고 이들이 건강보험을 청구할 때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면밀히 심사하면 산재은폐를 상당수 줄일 수 있을 것이다”라고 조언했다.

실제 노동현장에서 산재은폐는 어떤 방식으로 이뤄질까. 산재를 당하고도 제대로 보상받지 못한 노동자는 어떤 일을 겪을까. 다음 기사에서 자세히 다룬다.


변지민 기자 d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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