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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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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꾼 불판에 고기 잘 구울까

선거제 개혁의 주역이자 최대 수혜자 정의당… 비례 명부 작성 놓고 경쟁 과열
등록 2020-01-18 04:57 수정 2020-05-02 22:17
심상정 정의당 대표(가운데 손팻말 든 이)가 1월8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참여자들이 손에 든 것은 고기 불판. 한겨레 김경호 선임기자

심상정 정의당 대표(가운데 손팻말 든 이)가 1월8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참여자들이 손에 든 것은 고기 불판. 한겨레 김경호 선임기자

다시 노회찬이다.

“지금 당장, 판을 갈자.”

1월8일 국회 로텐더홀에 불판이 등장했다. ‘제21대 국회의원선거 정의당 비례대표 후보 선출 시민선거인단 대국민 제안’ 기자회견에서다. 이날 심상정 정의당 대표는 “오늘부터 정치 판갈이 대장정에 나서겠다”며 진보정당 첫 원내 교섭단체에 대한 포부를 밝혔다. 회견장에 함께한 김종민 부대표 등 당직자의 손에는 새 불판이 들려 있었다. ‘불판론’은 2004년 진보정당의 영광을 재현해보겠다는 뜻이 배어 있다. 그 저작권은 고 노회찬 전 의원에게 있다.

“한나라당, 민주당 고생하셨습니다. 50년 동안 썩은 판을 이제 갈아야 합니다.”(2004년 17대 총선 직전 한국방송(KBS) )

노회찬은 당시 민주노동당 사무총장이자 선거대책본부장이었다. 정당 득표율 13%. 민노당의 약진은 충청권 보수정당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의 사실상 해체를 가져왔다. 자민련은 비례의석 획득 기준인 3%를 0.1%포인트 차이로 넘지 못했고, 자민련 비례대표 1번 김종필 전 총재의 10선 도전은 좌절됐다. 김 전 총재가 노린 자리를 가져간 게 민노당 노회찬이었다. 노 의원은 민노당 명부 비례대표 8번, 전체 국회의원 299명 가운데 299번째로 당선을 확정했다.

2004년은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1인2표제)로 치르는 첫 국회의원선거였다. 2020년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로의 진화는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과거의 영광을 재연할 수 있을까. 이번 선거제 개혁의 주역도 정의당이다.

최대 70곳 출마자 낼 계획

“거칠 것이 없다.”

정의당 싱크탱크 정의정책연구소의 문건에 등장한 문구다. 연구소의 월간 정례보고서 1월치를 보면, “8년을 견뎌낸 정의당 내부는 어느 시기보다 안정적”이라며 “지역구 최대 출마, 민생정책, 리더십의 구심력이 한국 정치에 관철된다면 정의당은 한국 진보정당 역사상 최대의 권력 자원과 국회에서의 강력한 권능을 확보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준비 정도는 어떨까. 우선 정의당은 지역구에서 창당 이래 최대인 70곳에 출마자를 낼 계획이다. 리더십의 구심력은 여느 때보다 심상정 대표를 중심으로 온전하다. 심 대표가 주도하는 이자스민 전 의원에 이은 인재 영입도 성공적이라는 평가다.

문제는 민생정책이다. 더불어민주당과의 차별화부터 쉽지 않다. 정의당만의 정책 개발도 더디다. 정의당 한 핵심 관계자는 “지금 미국 민주당에서 논의되는 ‘부유세’는 민노당 시절인 20년 전 이미 당내에서 논의됐다. 부유세뿐 아니라 보편적 복지에 관한 의제 또한 지금껏 현실화하지 못하고 지지부진했던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표심을 흔드는 기획이 하루아침에 나올 리 없다. 2004년 총선에서 민노당의 “부자에게 세금을, 서민에게 복지를”이라는 부유세 슬로건은 2002년 대선부터 지속적으로 주장해 유권자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그나마 한숨 돌린 것은 1월15일 민주당의 첫 공약이 공개된 뒤다. 1호 공약으로 ‘전국 무료 와이파이 시대!’가 등장했다. 민주당 덕분(?)에 같은 날 정의당이 공개한 공약 ‘다주택자투기끝장법’이 도드라졌다. ‘청년’ ‘부동산’ 등 현안에서 의제를 선점하는 모양새를 갖추게 됐다. 박원석 정책위의장은 “(부동산 문제에서) 지옥과 같은 중과세 대책을 내놓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선거에선 다른 세력의 실수로 기회가 찾아오기도 한다.

여론 또한 나쁘지 않다. 각종 여론조사가 이를 방증한다. 은 2019년 12월26~29일 리서치앤리서치에 의뢰해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계산해보니 “정의당이 비례대표 47석 중 28석을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했다(1010명 대상, 표본오차 95% 신뢰수준 ±3.1%포인트). 비례대표만으로 원내교섭단체가 가능한 수준이다. 비례대표 투표에서 정의당을 찍겠다는 응답자가 14.2%에 이르면서 드러난 결과다. 이는 15.7%를 기록한 여론조사에서도 마찬가지다(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누리집 참조).

후보 단일화 없이 선거를 치른다?

장밋빛 전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위험 징후는 곳곳에 있다. 창당이 기정사실로 여겨지는 자유한국당 위성정당은 비례의석 30석을 정의당과 함께 나눠 가질 것으로 보인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유사명칭 사용 금지를 이유로 1월13일 비례자유한국당 창당을 불허했다. 하지만 자유한국당은 명칭을 바꿔 다시 창당을 시도할 것을 공언했다. 안철수의 등장과 보수대통합 논의 또한 달갑지 않다. 특히 그가 신당으로 선거에 참여하면 지역구보다 주로 비례의석을 잠식할 가능성이 높다. 보수대통합 뒤 위성정당 등장도 주요 변수가 될 것이다.

더 큰 고민은 지역구다. 70곳에서 당선이 확실시되는 곳은 사실상 없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로 선거제가 개편된 뒤 진보 진영은 후보 단일화 없이 선거를 치른다는 암묵적 합의가 생겼다. 현실은 정의당에 녹록지 않다. 심상정 대표(경기 고양갑)와 여영국 의원(경남 창원·성산) 정도가 재선을 노리지만 단일화 없는 상태에서는 만만치 않다. 박원석 의장은 “비례대표와 지역구를 나눠서 보고 있다”며 “이번 선거 구도상 (위성정당 등) 악재에도 정의당 비례대표 득표에는 결과적으로 크게 불리할 게 없을 것이다. 다만 지역구는 사실상 거대정당으로 표가 갈리면서 민주당에 표심이 몰리는 기존 투표 관행이 그대로 재현될까 우려된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253석이라는 의원 수, 비례대표 선거에서 정의당을 알리는 지역별 베이스캠프라는 점에서 70석 지역구 어느 곳도 허투루 할 수 없다. 정의당 한 관계자는 “지역구 출마자를 독려하기 위해 당선 가능성이 희박함을 감수하고 출마하는 지역 후보에게 재정·인력 지원부터 차기 총선에 비례 등 후보 선출 과정에서 가점을 주는 방안 등을 고려 중”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는 대증요법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정의당 한 관계자는 “2004년에도 권영길 대표 말고 노회찬, 심상정은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당시 선거에서 집중 투자를 해 둘을 길러낸 것이나 다름없다”며 “이정미 전 대표, 윤소하 원내대표 등 자산이 없지 않다. 지역별로 인물에 따른 좀더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2004년 5월11일 전북 남원에서 권영길 당시 민주노동당 대표와 17대 총선 당선자 전원이 대국민 선언을 하고 있다. 한겨레 윤운식 기자

2004년 5월11일 전북 남원에서 권영길 당시 민주노동당 대표와 17대 총선 당선자 전원이 대국민 선언을 하고 있다. 한겨레 윤운식 기자

‘4+1 체제’ 선거 국면에서도 적용한다면

지역에서 거대 양당이 아닌 제3의 대안을 요구하는 여론이 감지된다는 점에서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이미 지난 총선에서 국민의당 돌풍으로 확인된 바 있다. 전북 익산에 출마하는 권태홍 정의당 사무총장은 “(민주당의) 오랜 독점 정치로 인한 부패와 무능을 유권자가 느끼고 있다.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동시에 전북 지역이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이 높은 곳 중 하나다. 이를 넘어서는 것이 관건이다”라고 말했다.

선거 구도에서 미세한 균열도 보인다. 보수대통합으로 구심력이 작동하면서다. 1 대 다 구도로 선거를 치를 수 없는 상황에서 진보 진영도 선거전략을 새롭게 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1월16일 박지원 대안신당 의원이 교통방송 라디오 에 출연해 호남 지역에서의 선거연대 가능성을 언급했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 등 패스트트랙을 이끈 4+1(더불어민주당·바른미래당·민주평화당·정의당+대안신당) 체제를 향후 선거 국면에서도 전략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는 논리다. 만약 보수 통합과 맞물려 이 논의가 가시권으로 들어오면 정의당은 호남, 인천, 경기 등에서 당선을 노려볼 수 있다.

근본적인 위기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당의 정체성과 관련해서다. 이는 비례대표 정당 명부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를 둘러싼 논의에 집중돼 있다. 현재 당 지도부는 총선기획단을 꾸려 비례대표 명부를 20석 이상 구성하고 전략명부 50%, 일반경쟁명부 50%를 도입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특히 개방형으로 인원을 배정하는 전략명부 50% 안에는 청년 20% 할당, 장애인 10% 할당, 그리고 남은 20%를 개방할당으로 하자는 내용이다. 정의당은 비례대표 명부를 결정하기 위해 당원 70%, 당원 외 시민선거인단 30% 비율로 득표수를 반영해 순번을 정하는 방식의 개방형 경선제로 가닥을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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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적 성격과 다양한 조류, 양면의 노력”

문제가 불거진 건 최근 비례명부 개방과 관련해 한국노총 금융노조가 정의당 핵심 관계자에게 접촉해 비례대표 의석 배분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지면서다. 금융노조는 이전 선거에서는 주로 민주당과 공조해왔지만 민주당에서 비례대표 배출이 어려워지자 정의당과 협의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정의당 일부에서는 피선거권을 갖는 당원 자격을 수정해서라도 의석을 할당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이번 기회를 당의 조직력 확대 계기로 삼자는 현실론에 기댄 것이다. 당내에서는 강한 반발이 인다. 당대표의 일방적인 외부 인사 영입이 당내 민주주의로 선거를 준비한 진보정당의 전통에도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새로운 선거제도하에서 한국노총 금융노조에 전략적인 할당을 하는 것이 비정규 노동 등 소수자, 약자 보호를 기치로 내건 당의 정체성에 반한다는 비판이 중심에 있다.

전략명부가 아닌 일반명부 구성에서도 구설이 인다. 지난해 하반기 조국 논란이 한창일 무렵 경기도 한 지역에서 호남향우회장이 회원 3800여 명을 정의당에 입당하도록 한 사실이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한 정의당 핵심 당직자는 “2천 표 정도면 당선권이라고 보는데, 향우회가 조직적으로 비례대표가 되겠다고 들어오면 당이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돼버릴 것 같아 씁쓸하다”고 했다. 이어 “심상정 대표가 최근 한 간담회에서 ‘비례 시장이 열렸다’고 할 정도로 과열 양상이다. 미리 수습하지 않으면 2012년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경선처럼 탈이 날까 걱정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고 노회찬 전 의원이 20년 전에 쓴 글을 권했다.

“비례대표의 실시가 모든 것을 자동으로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비례대표제의 전면적 실시는 계급투표 성향이 일반화될 때에만 성과를 낳을 수 있다. 따라서 당의 계급적 성격을 강화해가는 것과 환경, 여성, 장애인 등 다양한 조류를 당으로 통합해내는 양면의 노력이 병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2001년 민노당 기관지 )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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