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들의 신명난 작당

비혼 청년 여성농부, 화천 임달래·진안 배이슬·합천 김예슬·홍성 박푸른들의 수다

박푸른들씨(맨 오른쪽)의 허브 농장에 모인 임달래씨, 배이슬씨, 김예슬씨(왼쪽부터).

홍성의 박푸른들씨, 진안의 배이슬씨, 화천의 임달래씨, 합천의 김예슬씨, 순천의 신건희씨, 전주의 임주아씨, 강릉의 김지우씨, 남해의 최창혁씨….
지역에 청년이 있습니다. ‘지역 소멸’을 말하는 시대에도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청년들입니다. 삭막한 자본주의에서 탈출해 지역으로 간 이들, 나고 자란 지역을 지키는 청년들. 농사를 짓고 문화공간을 만들고 마을을 기록하고 창업을 합니다. 서울에서도 지역 변화를 모색하는 청년이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 성장의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때론 흔들리기도 하고 주저앉기도 합니다. 힘들 때마다 흙냄새와 바람과 햇볕을 기억합니다. 자연과 사람의 연결을 귀하게 여기며 ‘같이’의 가치를 만듭니다. 신년호에서 그 지역의 청년 한명 한명의 목소리를 전합니다. 온전히 지역 중심의 이야기입니다. 2020년 ‘지역에서 변화를 꿈꾸는 청년들’ 연중기획은 이어집니다.
허윤희 기자 [e-mail], 장수경 기자 [e-mail], 조윤영 기자 [e-mail]

마녀들의 겨울 파티가 열렸다.

2019년 12월19일 오전 충남 홍성군 홍동면. 서리가 앉은 황량한 논밭과 띄엄띄엄 떨어진 집들. 적막한 겨울 풍경을 깨는 마녀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시골마을에 웬 마녀? 마녀는 농사짓는 청년 여성 네 명이 자신들을 부르는 이름이다. 이날 전국에 뿔뿔이 흩어져 있는, 강원도 화천의 임달래(35)씨, 전북 진안의 배이슬(31)씨, 경남 합천의 김예슬(26)씨, 충남 홍성의 박푸른들(31)씨가 모였다. 이들의 모임 장소는 박씨의 집이자 일터이다. 네 마녀가 만날 수 있는 중간 지점인 이곳에서 한 해 동안 농사짓느라 고생한 자신들을 응원하고 2020년 새해 계획을 짜기 위해 만났다.

청년 여성농민들과 연결고리

그들은 2019년 여름 홍성에서 열린 농촌청년여성캠프에서 인연을 맺었다. 농촌에서 소수자 중의 소수자인 청년 여성농부로 살아가는 공통점을 발견하고 ‘농사지어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고민을 나눴다. 그들이 처음 뜻을 모아 만든 게 2019년 3월 자신들이 재배한 농작물을 소비자와 직거래하는 ‘마녀의 계절’이다. ‘어떻게 내가 재배한 농산물을 잘 팔 수 있을까?’ 혼자 끙끙대며 고민하던 그들이 모여 소농의 판로를 개척한 거다. 함께해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왜 자신들을 ‘마녀’라고 부를까. 배씨가 답했다. “농사짓는 게 마법을 부리는 것과 같아요. 씨를 뿌리면 거기에서 생명이 자라잖아요.” 김씨가 덧붙였다. “마법을 부리는 남자를 의미하는 마법사는 좋은 이미지이지만 여성을 부르는 마녀는 나쁘고 부정적 이미지잖아요. 마법을 부리는 건 똑같은데 왜 그렇게 다를까. 마녀에게 씌운 음울한 이미지를 깨고 싶었어요. 마녀도 그냥 마법을 부리는 여성 마법사일 뿐이잖아요.”

마녀 뒤에 ‘계절’이란 말을 붙인 건, 계절을 잃어버린 현대인의 밥상에 제철 농산물로 계절을 찾아주고 싶어서다. ‘봄 마녀’ 임씨가 산나물을, ‘여름 마녀’ 배씨가 블루베리와 여름 채소를, ‘가을 마녀’ 김씨가 콩과 고구마를 판매한다. 박씨는 농산물 직거래 사이트 ‘논밭상점’에서 ‘마녀의 계절’을 홍보하고 판매하는 일을 맡았다.

그들은 농부의 자세와 앞으로 걸어갈 방향을 적은 ‘마녀 지침서’를 만들었다. 내용은 이렇다. “자연에 기대어 농사를 짓고, 먹는 사람이 편안하고 행복할 수 있는 농산물을 생산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농부가 먼저 행복해야 합니다. 지구를 위해 과한 포장을 하지 않고, 농부와 소비자가 평등한 관계를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하고 ‘마녀’(여성·소농·청년)들이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을 위한 작은 작당을 함께 모의하고 일으킵니다. 재미나고 신명나게!”

박푸른들씨(맨 오른쪽)의 허브 농장에 모인 임달래씨, 배이슬씨, 김예슬씨(왼쪽부터).

‘설 지난 무수’라 부르고 ‘시집 언제 가냐’ 묻고

그들은 마녀의 계절이라는 이름 아래 청년 여성농민들과 연결고리를 만들었다. 배씨는 2019년 마녀의 계절을 하며 소득이 크게 늘지는 않았지만 “정서적 마진이 많이 남았다”고 자부한다. “청년 여성농부들은 정서적 마진이 너무나 필요해요. 농촌 청년 중에서도 가장 미미한 존재잖아요. 가부장적이고 성평등하지 않은 농촌사회에서 같이 이야기하고 소통할 동료가 필요했거든요.”

임씨에게 마녀들은 든든한 동료이자 조언자다. “동네에 저보다 오래 농사를 지은 어르신이 많지만 다들 바쁘고 말 꺼내기 조심스러워요. 그런데 마녀들에게는 ‘콩이랑 뭐랑 같이 심으면 좋냐’고 물어보고 조언을 구해요. 편하게 말 걸 수 있는 친구들이에요.” 그뿐인가. 여름 태풍 피해가 심할 때는 서로 안부를 묻고 농작물 피해가 없는지 걱정해준다.

소농인 그들에게는 마녀의 계절을 통해 소비자와 만나는 경험도 소중하고 값지다. 그들은 소비자에게 농작물과 함께 계절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편지를 보낸다. “글 쓰는 농부”라고 자신을 소개한 김씨는 그동안 한글날에 배추밭에서 콘서트를 열었던 이야기, 이웃 농부님들과 함께 농사지은 생강으로 생강차를 만든 일, 열 가지 넘는 토종 콩을 섞이지 않게 터느라 애썼던 일,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시간을 느끼며 무를 뽑았던 일을 편지에 담았다.

소비자는 구매 후기로 그들에게 답장을 보냈다. 정성스럽게 키운 농작물을 고마운 마음으로 받는 마음을 전했다. 할머니와 함께 농사짓는 배씨는 “한평생 농사지은 할매도 소비자들의 후기를 처음 듣고 신기해하세요. 배추를 보낼 때 할매가 만든 겉절이 양념까지 넣어 보냈더니 ‘감사하다’는 후기가 많았어요. 할매도 그 이야기를 듣고 좋아하세요. 그랬더니 요즘에는 후기 이야기가 없으면 할매가 먼저 ‘오늘밤엔 뭐 없냐’고 물어요.(웃음)”

김씨는 생산자로서의 자존감이 쑥쑥 자랐단다. “제가 재배한 콩을 밥에 넣어 먹으니 한 끼를 든든하게 먹을 수 있다는 글이 기억에 남네요. 평소 콩을 안 좋아했는데 콩밥의 새로운 맛을 느꼈다는 말도요. 내 콩으로 이렇게 맛있게 드시는 분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돼요.”

그러나 가부장적인 농촌사회에서 비혼 여성농부로 산다는 것은 녹록지 않은 일이다. 배씨가 자주 듣는 질문은 ‘시집 언제 가냐’는 것이다. “마을 어르신들이 27살까지는 금값이라 하고 그 나이가 넘어가면 ‘설 지난 무수’라고 해요.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요. 혼자 농사 잘 짓고 있는데 이 일은 안 보이나봐요.” 박씨 역시 “결혼하면 다른 곳으로 떠날 사람”으로 여기는 시선이 불편하다. 젊고 결혼하지 않은 여성들이 겪는 설움은 또 있다. “청년 농업인을 위한 지원 사업이 있잖아요. 한 마을에서 지원 대상자를 몇 명만 뽑을 수 있는데 그 안에서 나이가 어리고 결혼을 안 해서 우선순위에서 밀려요.”

전업농부로서 인정받지 못할 때도 많다. 귀농 4년차인 임씨는 농기계센터에 트랙터를 빌리러 갔는데 직원이 의심의 눈초리로 자신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을 느꼈단다. 그가 동네에 트랙터를 몰고 가면 사람들이 “동물원 원숭이 보듯” 구경한단다. “제가 농사지으니 농기계를 직접 다루는 건데 남들은 저를 보고 ‘여자가 그런 걸 해’라는 반응을 보여요.”

그래도 그들을 땅에 뿌리내리게 하는 것은 자연과 사람들이다. 임씨는 어릴 때 “절대 농사 같은 건 안 짓겠다”고 엉엉 울며 어머니 손에 이끌려 고구마를 캐러 가곤 했다. 그런 그가 농촌으로 돌아와 농사를 짓는 건 내 손으로 키운 농작물로 내 밥상을 채우고 싶은 꿈을 이루고 싶어서다.

그런 마음을 품고 돌아온 고향에서 자신이 키운 농작물을 사랑하고 나누는 기쁨을 알게 됐다. “정성스럽게 키운 걸 귀하게 여기고 고마워하는 분들의 마음이 느껴질 때 큰 위로가 돼요.” 나눔으로 ‘내일의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씨가 흙에 닿는 순간부터 거두기까지 과정을 지켜보면서 흙과 풀을 만지며 햇볕을 몸으로 받아내는 일을 선택한 것에 감사해요. 그 힘으로 사계절을 살아요.” 농촌살이의 즐거움은 또 있다. “봄에서 여름으로 지나갈 무렵, 그때 산이 가장 예뻐요. 작은 밭에서 혼자 천천히 김맬 때 그 좋은 걸 만끽해요. 시골에서 자랐지만 어릴 땐 몰랐는데 농사지으며 이제야 알았어요. 나고 자란 농촌이 새롭게 보여요.”

콩꼬투리가 마르며 하나둘 터지는 소리

가족과 함께 귀농을 택한 김씨는 농사지으며 농부의 자세를 생각한다. “마을에서 ‘농부가 낭만 빼면 시체 아이가’라는 말을 자주 들어요. 농담처럼 말하지만 저도 농부에게 낭만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어요. 그 낭만이 이런 거예요. 작지만 아름다운 것들을 바라보고, 지켜가는 것. 그런 마음이 없다면 농부라는 자리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어릴 때 동요 대신 농민가를 불렀다는 배씨는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를 다녔고 농부가 되었다. 농민운동을 하던 아버지의 영향이 컸단다. 또래 친구들은 도시로 떠나지만 배씨는 고향에서 “농촌에 살고 싶은 사람들, 농촌에 있는 사람들을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되고” 싶단다. 도시 아이들이 모르는 생태적 감수성을 전하는 농촌체험 교육도 하고 싶다. 자라는 아이들이 내가 뭘 먹고 사는지 알고, 누가 그 먹거리를 키우는지 알도록 말이다.

배씨는 농촌살이가 더할 나위 없이 재밌다. “갈무리한 콩다발을 보면 세상 다 가진 듯 뿌듯하죠. 내가 뿌린 씨앗에서 싹이 뿅 하고 트는 것도 재밌어요. 싹 모양도 다 다르고, 콩꼬투리가 마르며 하나둘 터지는 소리도 다 달라요.” 안타까운 점은 사회에서 농업인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농촌에 남아 농업을 선택한 사람들을 뭔가 부족하거나 패배자처럼 보는 시선이 있어요. 하지만 농사지으며 자아실현을 하며 살고 있어요.”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를 나온 박씨는 고향 홍성에서 마을 기록 활동을 하다가 서울에 갔다. 도시 생활을 접고 2016년 고향으로 왔다. 홍성에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1년 전부터 허브 농사를 짓고 있다. 청년 여성농부를 위한 농촌여성캠프의 기획자로도 활동한다. “다시 고향으로 내려올 때쯤 페미니즘 책을 읽고 공부하며 생각이 넓어졌어요. 대의가 아니라 개개인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누군가를 배제하지 않고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는 마음도 생겼고요. 그렇게 저처럼 농사짓는 페미니스트들과 연결고리를 만들고 싶어요.” 그리고 언제나 마음의 중심에 ‘농적(農的) 가치’를 둔다. “농부가 아니더라도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농적 가치’를 품고 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고 농촌을 지키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우리는 하나로 연결되고 만나게 돼요. 그 마음을 잃지 않으려 해요.”

마녀 모집! 반짝 마녀도 환영!

그들은 2019년 마지막 ‘마녀의 계절’ 꾸러미를 함께 쌌다. 이번 꾸러미에는 겨울 간식으로 먹을 수 있는 가래떡, 고구마말랭이, 쌀조청, 쌀튀밥, 감말랭이를 넣었다. 누군가에게 든든한 겨울 간식이 되기를 바라며. 임씨는 “새해에는 다른 지역에 사는 마녀들과 함께하고 싶어요. 마녀를 모집할 생각이에요. 잠시 합류하는 반짝 마녀도 환영합니다.” 2020년 새로운 마녀를 기다리며, 마녀들이 주문을 외운다.

“팍스테쿰!”(‘당신에게 평화가 있기를’ 뜻의 라틴어)

여성농업인의 현실

“농촌에서 가장 필요한 계층”

농사짓기 위해 농촌으로 간 귀농인, 그중에서 청년 여성은 어느 정도일까. 통계청의 ‘2018년 귀농어·귀촌인 통계 마이크로데이터 분석 결과’를 보면 귀농인은 1만2055명이다. 이 중 청년(20~39살) 남성은 1024명이고, 여성은 340명에 불과하다.
농업인이 된 그들은 농촌에서 여러 현실의 벽에 부딪힌다. 농림축산식품부와 통계청에서 2019년 4월 발표한 ‘2018 여성농업인 실태조사’에서 귀농 여성농업인 267명은 농촌 생활에서 가장 어렵게 느끼는 점으로 ‘적은 농업소득’(21.4%)을 말했다. 농사만 지어서는 살 수 없으니 농업 외 경제활동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다음은 ‘힘든 농업노동’(20.3%), ‘어려운 농업기술’(11.4%) 등을 어려움으로 꼽았다. 그들이 농사지으며 계속 살 수 있도록 농업 분야에서 시급히 해결해야 할 첫 번째 과제로 ‘복지시설 확충 및 복지제도 확대’(26.4%)를 들었다. 그 밖에 ‘가중한 노동 부담 경감’(18.4%), ‘보육 및 교육 시설 확충’(14.6%), ‘경제적 사회적 지위 향상’(14.0%), ‘농산물 가공, 유통, 농촌관광 등으로 진출하도록 돕는 기술과 자금 지원’(12.1%), ‘정보화, 마케팅 전문 경영교육 강화’(8.9%), ‘전담부서 신설’(3.4%), ‘여성 친화 농기계 제도 확충’(2.1%) 등을 강조했다.
2016년 10월 창립한 청년여성농업인CEO연합회(청여연)의 이소희(31) 대표는 과 한 전화 인터뷰에서 “청년 여성농업인은 수적으로 적지만 인구 소멸 지역이 많아지는 농촌에서 가장 필요한 계층”이라며 “그들이 농촌에서 생산자와 경영자로 커갈 수 있도록 안정적인 소득 창출을 위한 지원책, 직업인으로서 지위와 권리를 보장받을 방안 등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홍성=글 허윤희 기자 [e-mail]
사진 박승화 기자 [e-ma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