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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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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었다 일한다 다친다 가난하다

평균 71.8살까지 일하는 한국 노인, 근로소득 비중 50.8%이지만

병나도 산재 인정되기 어려워
등록 2019-10-29 01:34 수정 2020-05-02 19:29
거리에서 폐지를 수집하고 있는 한 노인. 정용일 기자

거리에서 폐지를 수집하고 있는 한 노인. 정용일 기자

<하류노인>.
2015년 6월부터 1년간 일본 아마존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한 책이다. 이 책을 지은 후지타 다카노리는 일본 사이타마현에서 생활빈곤자들을 지원하는 비영리단체 ‘홋토플러스’의 대표다. <하류노인>은 600만~700만 명으로 추정되는 일본의 극빈곤층 노인을 취재한 책이다. 노인들의 열악한 현실은 일본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다.
이 책은 한국으로 건너와 <2020 하류노인이 온다>로 제목이 바뀌었다. 2020년은 한국전쟁 뒤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1955~63년생)가 노인(65살 이상)으로 진입하기 시작하는 해다. 한국은 일본 뒤를 이어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고령화되고 있다. 일본은 한국의 가까운 미래다.
<한겨레21>은 최근 급증한 노인 산업재해를 중심으로 한국 노인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조명했다. 이 기사를 통해 한국판 ‘하류노인’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노인 빈곤 통계는 믿기 힘들 정도로 심각했고, 실제 눈앞에 만난 빈곤 노인은 믿기 싫을 정도로 비참했다. 취재를 하며 공포가 몰려왔고, 기사를 쓰며 등골이 오싹해졌다. 2020년은 이제 두 달 남았다.
변지민 기자 dr@hani.co.kr

그는 결혼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몇 번 팔려고 했는데 암만 급해도 못 팔겠더라고요. 젊을 때 아내가 해줬던 건데….”

팔아봤자 20만원에 불과할 금반지. 배준호(67·가명)씨에겐 몇 안 남은 소중한 자산이었다.

10월7일 부산에서 만난 배씨는 몹시 가난했다. 먹을 게 없어 자신의 콩팥이라도 팔려고 알아본 상태였다. 지하철역에서 장기이식 인쇄물을 보고 연락했더니 ‘500만원’이라는 답이 돌아왔다고 했다. 젊은 사람은 1800만원을 주는데 노인은 장기조차 헐값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마저 아직 산다는 사람이 없어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

배씨의 가난에는 이유가 있다. 다쳐서 일을 못하기 때문이다. 산업재해는 그를 벼랑 아래로 떨어뜨린 결정적 요인이었다. 배씨의 불행은 오늘날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노인의 전형이기도 하다. 2017년 한 해만 60대 이상 노동자 2만4314명이 산재를 인정받았다. 고령층의 높은 산재 은폐율을 고려하면 실제 재해자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보인다. 2018년 60대의 산재 승인 건수는 50대에 이어 전체 연령 중 2위로 올라섰다. 법정 정년은 60살인데 왜 이렇게 많은 노인이 일하다 다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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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재 후유증, 산재 불인정, 공상 처리…

이 기사에는 산재를 겪은 남성 노인 세 명의 이야기가 담겼다. 세 사람은 모두 아름다운재단·노동건강연대가 올해 4월부터 9월까지 진행한 ‘2019 산재노동자 지원사업’에 신청해 생계지원(1인당 1~3개월간 월 50만원)을 받았다. 이 사업은 산재보상 제도의 사각지대를 찾아 없애기 위해 기획됐다. 노인 두 명은 기자가 만났고, 한 명(황금만)은 전문 인터뷰어가 만났다. 본인들의 요청에 따라 이름은 가명으로 처리했다. 세 노인이 풀어놓은 이야기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었다.

배준호(67) 1952년생. 부산 출신으로 20대부터 사업을 했다. 서울에서 직원 12명을 둔 작은 기업을 운영했다. 잘나갈 때는 서울에 아파트 2채, 주택 1채가 있었다. 자식 넷을 모두 대학에 보냈다. 2011년(당시 59살) 큰 사기를 당해 회사가 망하고 신용불량자가 됐다. 먹고살기 위해 어린이집 계약직 보조교사로 들어갔다. 2019년(67살) 3월, 원장의 지시로 2m 높이의 공기청정기를 닦기 위해 책상에 올라섰다가 뒤로 넘어졌다. 등뼈가 부러지고 뼛조각이 폐를 찔렀다. 전치 4주 진단을 받고, 하루 6만7천원씩 70일간 산재보상 휴업급여를 받았다. 하지만 산재 후유증으로 결핵성 늑막염을 얻어 아직도 일을 못하고 있다.

김석호(67) 1952년생. 전남 영암 출신으로 20대부터 서울의 건설사를 다녔다. 중동으로 파견돼 고생도 했으나 노조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해고됐다. 1988년(당시 36살) 전남 여수로 옮겨와 부둣가에서 차에 비료 싣는 일을 했다. 월급 200만~300만원을 받으며 2012년(60살) 정년퇴직할 때까지 일했다. 퇴직금 6천여만원은 아들의 오피스텔 구입비와 딸의 결혼자금으로 모두 썼다. 먹고살기 위해 2015년(63살) 월급 130만원인 조경회사 계약직으로 들어갔다. 7~8m 크기의 나무를 가지치기하려고 사다리에 올랐다가 떨어져 왼쪽 정강이뼈 두 군데가 부러졌다. 산재보상 장해급여 최하 등급인 14등급 판정을 받아 320만원을 받았다. 이때 왼발 신경이 함께 손상돼 지금도 일할 수 없지만, 신경 손상은 산재 인정을 받지 못했다.

황금만(73) 1946년생. 전남 목포 출신인 부모가 1942년 중국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태어나 자랐다. 농촌에서 일하다 2007년(당시 61살) 한국에 왔다. 처음에는 강원도 목장에서 일하다 2011년부터 경기도 성남의 건설현장에서 일했다. 2012년(66살) 맨홀 아래로 떨어져 목과 척추가 부러져 큰 수술을 받았다. 산재 신청을 하려고 했으나 사용자(대기업 하청업체)가 ‘산재 신청하면 회사가 망한다’고 반대해 신청을 못했다. 대신 ‘공상 처리’(근로복지공단에서 보상해주는 산재와 달리 회사에서 보상)로 여섯 달치 임금과 치료비를 받았다. 그러나 수술 뒤에도 고통이 계속됐다. 회사에 부탁해서 가벼운 일을 하기도 했으나 2017년(71살)부터는 몸이 버티지 못해 그마저도 그만뒀다. 최근엔 위암 판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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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빈곤율과 자살률도 OECD 1위

세 노인은 산재로 노동력을 상실해 가난하다. 그런데 이들이 산재를 당한 이유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다시 노후 빈곤이 나타난다. 가난하니까 먹고살려고 일하고, 일하니까 다치고, 다치니까 더 가난해진다. 지팡이를 휘감으며 돌고 도는 악순환이다.

세 노인에게선 평균 71.8살까지 일하는 한국 노인의 자화상이 엿보인다. 한국 노인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개국 중 가장 많이, 가장 늦게까지 일한다. OECD 평균보다 고용률은 두 배 이상 높고, 실질 은퇴 연령은 7년 이상 길다. 또 한국 노인은 가장 가난하다. 전체 국민이 평균 100만원을 번다고 가정했을 때, OECD 국가의 노인은 평균 87.6만원을 벌지만 한국 노인은 68.8만원을 번다. 그래서 노인 빈곤율과 자살률도 OECD 1위다. 한국 노인들은 주로 질 낮은 일자리에서 일한다. 일하는 노인의 35.4%는 단순노무 종사자다.

세 노인은 아프지만 다시 일하고 싶어 했다. 한국 노인의 가구소득에서 근로·사업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은 50.8%에 이른다. OECD 평균보다 두 배 이상 높다. 반대로 공적이전소득(공적연금 등) 비중은 30.2%에 불과해, OECD 평균의 절반에 못 미친다. 쉽게 말해 한국 노인은 나라에서 받는 연금이 적어, 모아놓은 재산이 없으면 일해야 먹고산다는 뜻이다. 세 노인은 자신의 소득과 지출, 재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배준호 기초연금으로 부부 합쳐 월 48만원을 받는다. 자식들로부터 아무런 지원을 못 받지만, 부양의무자가 있다는 이유로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지 못한다. 월세와 병원비를 내고 나면 밥과 김치밖에 먹지 못한다. 의사는 영양실조라며 단백질을 먹어야 몸이 회복된다고 하지만 고기나 생선을 사 먹을 돈이 없다.

김석호 국민연금 65만원과 기초연금 16만원을 합쳐 월 81만원을 받는다. 올해 61살인 배우자는 요양보호사 일을 하며 월 100만원을 번다. 부부 합쳐 월소득 181만원이다. 배우자는 중증 간경화 환자로 언제까지 일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병원비와 약값이 월 30만원씩 든다. 자산은 시가 1억원 아파트에 예금 2천만원, 빚 1천만원이 있다.

황금만 기초연금으로 부부 합쳐 월 50만원을 받는다. 월세는 기초생활보장제 주거급여로 지원받고 있지만, 생계급여는 받지 못한다. 배우자가 폐지를 주워 하루 2천~5천원의 소득이 더 생긴다.

전남 여수에서 만난 김석호씨. 그는 산업재해로 왼발의 신경을 다쳐 일을 하지 못한다. 류우종 기자

전남 여수에서 만난 김석호씨. 그는 산업재해로 왼발의 신경을 다쳐 일을 하지 못한다. 류우종 기자

무연금 세대+장수 세대의 비극

노동력을 잃은 노인의 주요 소득은 연금이다. 특수직역연금(공무원연금, 사학연금, 군인연금)이나 개인연금을 받는 사람은 가장 형편이 좋은 축에 속한다. 김석호씨처럼 국민연금만 받을 수 있어도 그나마 낫다. 상당수 노인은 기초연금밖에 못 받는다. 기초연금은 소득 하위 70% 노인에게 지급되며 소득에 따라 최대 30만원까지 받을 수 있다. 다른 연금을 못 받는 노인들의 주요 생계 유지 수단이기도 하다. 연금을 받는 노인들의 월평균 연금 수령액은 61만원이다.

기초생활보장제도는 최저생계비보다 소득이 낮은 극빈층을 지원하는 제도다. 그런데 황금만씨처럼 부양의무자에게서 부양비를 받는 것으로 간주돼 생계급여를 삭감당하는 이들이 6만2천 가구에 이른다. 그중 절반 이상이 65살 이상 노인 빈곤층이다. 추가로 보건복지부에서 제공하는 공공형 노인 일자리 61만 개가 있다. 하루 두세 시간씩 일하면 20만~30만원씩 비용을 지급한다. 2019년 한국의 노인인구는 768만5천 명이며, 노인 일자리는 종류에 따라 경쟁률이 수십 대 일에 달하는 곳도 있다.

세 노인에겐 중요한 공통점이 있었다. 자녀의 부양을 받지 못했다.

배준호(딸 셋, 아들 하나) “사업이 망하면서 자식들한테도 빚이 생겼어요. 그거 갚아준 뒤에야 보자고 하네요.”

김석호(아들 하나, 딸 하나) “아들은 여수에서 제일 좋은 동네에 살아요. 딸이랑 사위도 정규직이고. 근데 내가 도움받을 생각을 안 해. 궁한 티를 안 내요. 걔들이 도와줄 생각도 안 하고. 명절 때 딸이 10만원, 아들이 20만원씩 보내줘요.”

황금만(딸 둘) “걔네들은 제 살림도 바빠 죽겠는데 애비를 보겠어요? 다 쓸데없어요.”

가족도, 국가도 이들을 부양하지 않는다. 이철승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올해 8월 출판한 책 <불평등의 세대>에서 현재 80대 노인을 일컬어 “자식 세대의 부양을 받는 가족주의적 ‘사적 복지’의 전통이 약화되면서, 자체적으로 노후 복지 체계를 마련해야 했으나 아직 공적연금이 확충되지 않은 세대”라고 표현했다. 60~70대도 80대와 마찬가지로 사적 복지에서 공적 복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다. 배준호씨와 김석호씨는 부모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직접 부양했다. 정작 자신은 자식에게서 부양받지 못하고 있다.

이철승 교수는 책에서 현재 한국 노인의 빈곤을 일컬어 “‘무연금 세대’와 최초의 ‘장수 세대’가 한 세대 안에서 겹쳐지며 발생한 희극이자 비극”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현재 70~80대에 대해 “급속한 산업화의 중추 세대로서 수십 년에 걸친 부동산 투자 붐을 맞아 집단적으로 자산을 형성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공적 복지에 대한 무관심과 저항으로 인해 복지 체제가 발전되지 못하게끔 시민사회적 기초를 제공하기도 했다”고 평가했다. 결국 이 세대의 다수는 자산을 소비하면서 빈곤층으로 편입되고 있다.

궁극적인 해법은 노인 빈곤 해결

노후 빈곤은 노인 산재를 부르며, 다시 노후 빈곤으로 이어진다. 노인 산재는 한 해가 다르게 급증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노인 산재를 줄이기 위해 다음과 같은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노인의 신체 특성을 배려한 노동환경을 만들어야 한다(36쪽) △노인에 맞는 산재 인정·보상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42쪽) △노인에 대한 법적 차별을 없애 노동권을 보호해야 한다(40쪽). 그리고 모든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대책이 있다. “공적연금을 확충해 노인들이 무리하게 일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궁극적인 해법은, 노인 빈곤 자체를 해결하는 것이다.

한국의 공적연금은 더디게 전진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10월22일 국회를 찾아 2020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을 하며 확장 예산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내년부터 저소득층 어르신 157만 명에 대해 추가로 기초연금을 30만원으로 인상하겠다”고 했고 “공익형 등 어르신 일자리도 13만 개 더해 74만 개로 늘리고 기간도 연장하겠다”고도 했다. 문 대통령의 확장 예산안은 올해 12월 국회를 통과할 수 있을까. 수많은 가난한 노인들이 지켜보고 있다.





최근 5년새 급증한 60대 산업재해


[%%IMAGE8%%][%%IMAGE9%%][%%IMAGE10%%]노인 산업재해가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특히 60대가 눈에 띄게 높아졌다. 이용득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근로복지공단에서 받은 ‘2014~2018년 연령별 산업재해 현황’을 보면, 60대의 산재 승인 건수가 2014년 1만2856건에서 2만1471건으로 1.67배 늘었다. 같은 기간 전체 연령의 산재 승인 건수는 8만7652건에서 10만4901건으로 1.2배 증가했다. 2014년 60대의 산재 건수는 50대-40대-30대에 이어 4위였다. 2018년엔 50대에 이어 2위로 성큼 올라섰다.
60대 산재의 가파른 증가는 해당 연령 인구 증가가 주요 원인으로 보인다. 2014년부터 2018년까지 한국의 총인구가 50만 명 느는 동안 60대는 124만 명 증가했다. 70~80대 인구도 각각 35만 명, 39만 명 늘면서 산재발생 건수는 70대 1.69배, 80대 1.86배 늘었다. 향후 노인인구가 늘면서 노인 산재도 덩달아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노인 재해는 상대적으로 산재 인정을 받기 힘들다. 100명이 산재를 신청했을 때, 10대는 96.9명이 승인된다면 60대는 87.8명, 70대는 78.6명, 80대는 57.2명이 산재로 인정받는다. 특히 산재 중에서도 업무상 질병의 경우 산재 승인율이 더욱 낮다. 70대는 30대보다 뇌심혈관계 질환에서 1.8배, 근골격계 질환에서 1.6배나 산재 승인율이 낮다.
이용득 의원은 “고연령층의 산재 승인율이 낮은 것은 노령층의 산재를 판단할 때 업무와의 인과관계보다 개인적 질병 또는 노화를 더 많이 고려한 탓도 있어 보인다”며 “지금의 노령층이 현재보다 더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장시간 일해온 것을 충분히 고려해 산재 여부를 판단하는 게 산재보험 취지상 타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연금, 기초연금, 기초생활보장제도




① 국민연금
준정부기관인 국민연금공단이 운영하는 사회보험. 가입 기간이 10년 이상이면 만 62살(2019년 기준)부터 매월 받을 수 있다. 가입자가 낸 보험료 등을 바탕으로 급여 수준 결정.

② 기초연금
정부가 65살 이상 노인 중 일정 소득 이하인 사람에게 지급하는 연금. 소득 하위 70% 노인에게 월 최대 25만3750원, 소득 하위 20% 노인에게 월 최대 30만원을 지급.

③ 기초생활보장제도
정부가 소득이 최저생계비 이하인 국민에게 생계급여, 의료급여, 주거급여, 교육급여 등을 지급하는 사회보장제도. 최저생계비에서 수급자의 소득을 뺀 금액만큼 지급하므로 수급자에 따라 받는 금액이 다르다. 기초생활수급자가 기초연금을 받으면 생계급여에서 차감.
부산·여수=변지민 기자 d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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