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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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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에 스러져도 보상 못 받는 농민

산재보험법 시행령서 5명 미만 농업·어업 사업장 노동자는 제외
등록 2019-08-21 02:10 수정 2020-05-02 19:29
8월4일 낮 1시께 경기도 군포 둔대동의 한 비닐하우스에서 자영 농업인이 퇴비를 뿌리고 있다. 조윤영 기자

8월4일 낮 1시께 경기도 군포 둔대동의 한 비닐하우스에서 자영 농업인이 퇴비를 뿌리고 있다. 조윤영 기자

지난해 8월3일 오전 10시50분께 충북 청원군의 한 담배밭에서 10~15m 떨어진 작은 나무 그늘에서 일용직 노동자 ㅅ(당시 62살·중국 국적)씨가 쓰러진 채 발견됐다. 이날 청주시 낮 최고기온은 38.2℃까지 치솟았다. ㅅ씨는 이날 새벽 5시부터 예초기로 담배 줄기를 잘라내 정리하던 중이었다. 119 구급차가 왔을 때 그의 체온은 40℃에 육박했다. 곧장 인근 병원 응급실로 옮겼으나 ㅅ씨는 끝내 숨을 거뒀다.

농업 노동자 3.8%만 산재보상법 보호

“돈 벌러 왔다”던 ㅅ씨는 한국에 온 지 일주일 만에 싸늘한 주검이 됐다. 부검 결과 사망 원인은 열사병(고체온증)으로 추정됐다. 근로복지공단 청주지사는 ㅅ씨의 사망 원인을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했다. 하지만 ㅅ씨는 결국 산재를 적용받지 못했다. 이 이용득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실에서 입수한 ㅅ씨의 재해 조사서에는 산재보험 “적용 제외”여서 “적용이 불가”하다고 적혀 있었다.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받았는데도 정작 산재보험을 적용받지 못한 ㅅ씨, 그 이유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이하 산재보험법) 시행령에 명시된 예외조항 때문이었다. 이 시행령에는 “농업, 임업(벌목업은 제외), 어업 및 수렵업 중 법인이 아닌 자의 사업으로, 상시 근로자 수가 5명 미만인 사업은 법 적용 제외 사업에 해당한다”고 돼 있다. ㅅ씨처럼 상시 노동자가 5명이 안 되는 소규모 농업 사업장에서 일하다 열사병으로 다치거나 숨져도 제대로 보상받을 수 없다는 얘기다.

실제로 이수진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직업환경의학교실 교수는 2018년 대한산업보건협회에 발표한 논문 ‘우리나라 농업인의 농작업 재해 현황과 보상체계’에서 “2015년 기준 통계청 발표 자료에 의하면 농업 분야의 경제활동인구 가운데 단 3.8%(6만8697명)만이 산재보험법에 의해 보호되고 있다”고 농업 노동자의 산재보험 가입률을 추정했다. 가족 중심으로 일하는 가족 농업인 또는 자영 농업인을 고려해 거칠게 계산해도 농업 경제활동인구 100명 가운데 95명꼴로 산재보험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셈이다.

문제는 고용노동부가 올해 발표한 2017년 기준 노동자 1천 명당 발생한 재해자 수 비율(천인율)을 보면 광업(169.39‰), 임업(13.58‰), 어업(11.16‰), 건설업(8.42‰)에 이어 농업(7.30‰)이 다섯 번째로 높다는 점이다. 농업 재해율이 제조업(6.10‰)보다 높은데도 대다수 농업 노동자가 사회보장제도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이는 대부분 상시 노동자 5명 이상 법인에서 일한 농업 노동자에게서 산출한 비율이어서 가족·자영 농업인은 물론이고 ㅅ씨처럼 상시 노동자 5명 미만 사업장에 고용된 농업 노동자의 재해 발생을 고려하면 실제 규모는 더 클 수 있다.

임의 가입할 수 있지만 사업자들 꺼려

상시 노동자가 5명 미만인 소규모 법인 사업자라도 산재보험에 임의로 가입할 수는 있다. 하지만 강제 가입이 아니어서 보험료 부담 등의 이유로 사업자들이 가입을 꺼린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과 한 통화에서 “현행 근로기준법에 사용자의 재해 보상 책임이 명시돼 있지만 고용노동부에 심사나 사건의 중재를 청구한 뒤 민사로 책임을 물어야 해 실효성이 낮다. 이 때문에 농업 노동자의 산재 적용 필요성은 공감하지만 품앗이 노동이 빈번한 농업 특성상 사용자와 노동자를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려워 적용 대상 확대에 한계가 있다”고 했다.

그나마 정부가 보험료를 50% 지원하는 정책 보험이 작동 중이지만, 산재보험 적용을 못 받는 상시 노동자 5명 미만의 영세 사업장의 사용자와 농업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도입한 90일 미만 단기의 ‘농작업근로자보험’은 2018년 기준 2만1519명 가입에 그쳤다. 자영 농업인이 재해를 당할 때 손해를 보상해주기 위해 많게는 80%까지 보험료를 지원하는 농업인 안전보험의 가입률마저 1996년 도입 이후 70%를 밑돈다. 농림축산식품부 관계자는 “여성과 저소득층 농업인의 보험료 부담을 낮추고 인식 개선과 홍보로 가입률을 계속 높이겠다”고 했다.

더욱이 농업(토지의 경작·개간, 식물의 재식·재배·채취 등을 포함)은 근로기준법에서 정한 노동시간, 휴게와 휴일을 적용받지 않는다. 현행 제도로는 주 52시간 노동을 어기면 사업자는 2년 이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 벌금을 내지만, 농업은 예외라는 얘기다. 노동시간 단축 예외 업종 지정은 대부분 영세하고 규모가 작은 농업 사업장 사용자의 특수성을 고려한 조처였지만, 농업 노동자가 긴 시간 일하면서 폭염에 노출될 가능성도 더욱 커질 수 있다.

농업 노동자는 주 52시간 노동에서도 제외

농업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을 고려한 산재보험 또는 민간 보험의 제도 개선이 절실한 이유다. 이용득 의원은 과 한 통화에서 “2017년 산재보험법 시행령 개정으로 1명 미만 사업장과 소규모 건설 사업장도 산재 보상을 받을 수 있게 해 영세 사업장에서 일하는 취약 노동자가 보험 혜택을 받게 됐다. 하지만 여전히 농업 노동자는 사용자와 노동자를 구분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제외돼 있다. 보험 행정력의 한계를 보여주는 현실이다. 농업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을 위한 산업재해 보상 제도의 개선이 시급하다”고 했다.

조윤영 기자 jy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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