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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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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구경’하던 미국의 변심

한-일 갈등 중재 않겠다는 입장에서 ‘분쟁 중지 협정’안 내놔

중국 견제할 인도·태평양 전략 위해 한·미·일 군사동맹 필요 느낀 듯
등록 2019-08-07 00:44 수정 2020-05-02 19:29
8월1일 타이 방콕에서 한-일 외교장관 회담을 하기 전 강경화 외교부 장관(오른쪽)과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이 악수한 뒤 자리로 가고 있다. 연합뉴스

8월1일 타이 방콕에서 한-일 외교장관 회담을 하기 전 강경화 외교부 장관(오른쪽)과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이 악수한 뒤 자리로 가고 있다. 연합뉴스

일본의 수출규제 조처로 생긴 한-일 충돌을 관망하던 미국이 ‘분쟁 중지 협정’(Standstill Agreement)이란 중재안을 냈다.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8월1일 일본 쪽에 “통상적으로 문제가 있는 국가 간에는 협의를 통해서 해결을 찾아야 하는데 그런 노력을 할 수 있는 시간과 여지가 필요하다’는 점을 분명히 이야기했다”고 말했다. 한국은 미국 중재안을 받을 테니 일본도 받으라는 뜻이다. 일본은 여전히 강경해 미국의 ‘중재’가 통할지는 좀더 지켜봐야 할 듯하다.

“보복 조처 말고 ‘동결 대 동결’ 휴전” 제안

눈길을 끄는 것은 미국의 태도 변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7월까지 “한-일 양국이 원하면 중재하겠다”고 말했다. 일본은 중재를 원하지 않았다. 결국 중재하지 않겠다는 뜻이니, 일본 편을 드는 느낌도 줬다. 지난해 말, 올해 초 한-일 초계기 갈등 때도 미국은 지켜보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왜 한동안 미국은 한-일 갈등에 개입하거나 중재하지 않으려고 했을까? 미국은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아메리카 퍼스트’(자국 이익 우선주의) 정책으로 직접 손해를 보지 않으면 불개입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미국은 한국과 일본 중 어느 한쪽을 편들거나 공식적인 중재보다는 사태 악화의 막후 조정에 주력했다. 미국 전문가들은 트럼프 행정부에 한국과 일본 사이 공개적인 중재가 아니라 관리에 주력하라고 제안했다. 최근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미국만이 한국과 일본을 벼랑 끝에서 구할 수 있다’는 보고서를 내어 ‘미국은 개입하되 편들기로 보일 수 있는 공개적인 중재, 심지어 고위 관리의 행보까지 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미국 전문가들은 한국과 일본이 더 이상 보복 조처를 하지 말고 ‘동결 대 동결’로 휴전하라고 제안했다. 사태를 악화할 추가 조처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이 제안한 중재안인 ‘분쟁 중지 협정’과 비슷한 내용이다.

제임스 줌월트 전 미 국무부 동아태 담당 부차관보는 (미국의 소리) 인터뷰에서 “한-일 갈등을 풀기 위한 출발점은 ‘동결 대 동결’로 휴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줌월트 전 부차관보는 “당면한 안보 위협인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중국, 러시아의 영공 침범에 공동 대응하는 게 중요하며 이를 위해 한국과 일본 양국, 나아가 한·미·일 삼국의 정보 공유 필요성을 확인했다”고 주장했다. 한국과 일본이 과거사나 영토분쟁 등의 문제는 뒤로 미루고 당면한 안보 현안에 공동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이 꼽는 안보 현안은 북한 미사일 발사, 러시아의 공중조기경보통제기 독도 영공 침범 등 중국과 러시아의 군사 도발이다.
통신은 7월30일(현지시각) 미국 행정부 고위 당국자가 한국과 일본에 더 이상 상황을 악화하는 조처를 하지 않는다는 분쟁 중지 협정에 서명할 것을 촉구했다고 보도했다. 분쟁 중지 조처가 양국의 추가 보복 조처를 막고 협상 시간을 얻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관망하던 미국이 조정 쪽으로 움직인 것은 한-일 분쟁이 무역갈등에서 군사동맹을 흔드는 조짐을 보이기 때문이다.

‘지소미아’는 인도·태평양 전략과도 연결

‘화이트리스트’(수출 절차 간소화 혜택 국가)에서 한국을 빼는 일본에 맞서 한국 정부가 유효기간이 8월24일까지인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을 연장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 한국 정부 당국자, 여당의 지소미아 관련 언급에는 ‘미국이 관망하지 말고 중재에 나서달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정세현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이사장(전 통일부 장관)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한국이 일본과의 지소미아를 폐지하려고 하면, 미국이 대중국 압박을 위한 한·미·일 공조 강화 차원에서 미국이 중재할 수밖에 없다. 한-미 동맹, 미-일 동맹은 한·미·일 간 지소미아가 유지돼야만 대중국 압박 삼각편대를 확실하게 구축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종대 정의당 의원도 방송 토론에서 “(미국에) 군사정보보호협정이 먼 미래 한반도 동북아판 미사일방어체계나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이 가동되는 시점을 준비하기 위한 구성품이다. 미국 전략은 인도·태평양 전략의 맥락에서 지소미아를 하나의 구성품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지소미아는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아시아 접근법인 ‘인도·태평양 전략’과도 연결된 문제다. `자유롭게 개방된 ‘인도·태평양’을 내세운 이 전략은 중국을 견제하려는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이다. 미국은 이 전략에 따라 지난해 5월 태평양사령부를 인도태평양사령부로 개편했다. 인도·태평양 전략에서 미국은 역내 ‘자유질서 수호자’를 자처하고 중국과 러시아를 ‘억압 질서’로 규정했다. 격화하는 미-중 무역분쟁도 패권을 놓고 다투는 미-중 전략 경쟁에서 비롯됐다.
미 국방부가 6월1일(현지시각) 공개한 ‘인도·태평양 전략 보고서’를 보면, 인도·태평양 전략의 핵심이 어느 한 국가가 이 지역을 통제하는 것을 저지하고 ‘자유롭고 열린(free and open) 지역을 만드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중국의 패권을 막기 위해 미국과 일본·오스트레일리아·인도 등 4개국(QUAD) 협력을 중심으로 인도·태평양 전략을 이행해야 한다는 게 보고서의 결론이다. 이전까지는 인도·태평양 전략에서 유럽~아시아를 잇는 중국의 대규모 인프라 투자 계획인 ‘일대일로’에 대한 경제적 견제가 거론됐는데, 6월1일 미 국방부는 군사적 차원으로까지 확대한 것이다.

러시아 독도 영공 침범, 의도적 도발 분석도

문재인 대통령은 6월30일 한-미 정상회담 뒤 기자회견에서 “한국의 신남방 정책과 미국의 인도·태평양 정책 간 조화로운 협력을 추진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한국이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처음으로 보낸 긍정적 반응이었다. 한-미 정상회담 이후 한국이 미-중 균형외교에서 벗어나 미국 손을 잡으려 한다는 분석이 나왔다.
미 국방부 인도·태평양 전략 보고서 공개(6월1일),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호응한 한-미 정상회담(6월30일) 뒤인 7월23일 중국과 러시아 항공기들이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에 무단 진입해 독도 영공을 침범했다. 중국과 러시아는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맞서 군사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이런 흐름을 근거로 7월 중국과 러시아의 군사행동이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반발한 의도적 도발이란 분석이 나왔다.
미국이 중국의 팽창, 러시아의 도전, 북한의 안보 위협을 저지하는 데 활용할 두 축으로 내세운 것은 미-일 동맹과 한-미 동맹이었다. 미 국방부 인도·태평양 전략 보고서는 미-일 동맹을 “인도·태평양 지역의 평화와 번영의 초석(cornerstone)”이라 표현했고, 한-미 동맹은 그보다 범위가 좁은 “한반도와 북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린치핀(핵심 축)”이라고 묘사했다. 한국은 인도·태평양 범주와는 한 번도 함께 언급되지 않았다.
한국과 달리 일본은 인도·태평양 전략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4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미-일 외교 국방장관 회의(2+2회의)에서 양국은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을 공동 비전(shared vision)으로 공식화했다. 한국은 6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처음으로 호응했지만, 중국과 관계를 의식해 인도·태평양 전략에 공식적으로 동참하지 않고 있다. 일본이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하려는 배경으로 미국의 뒷배를 꼽는 분석도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5월27일 일본 도쿄 아카사카궁에서 열린 공동기자회견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5월27일 일본 도쿄 아카사카궁에서 열린 공동기자회견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반도 유사시 일본 자위대 개입할 수도

5월28일 일본을 방문한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 해상자위대 호위함에 승선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호위함 승선으로 동맹국 일본의 역할 분담과 일본 자위대의 역할 확대를 강조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동참한 일본은 서태평양에서 인도양에 이르는 너른 지역에서 군사적 역할을 확대해나갈 것이다.
일본 자위대의 역할이 커지면 한반도 진출을 둘러싼 논란이 나오게 된다. 7월11일 주한미군 사령부가 장병들에게 한반도 정세와 한-미 동맹, 미군 임무 등을 소개하는 문서에서 “유엔사는 위기시 필요한 일본과의 지원 및 전력 협력을 지속할 것”이라는 문구가 논란이 됐다. 한반도 유사시 일본 자위대의 참전 논란이 일자 국방부는 “논의한 바 없고 검토한 바도 없다”고 부인했다.
국방부의 부인에도 일본 자위대의 한반도 진출 논란은 계속 불거질 것이다. 이 논란이 끊이지 않는 것은 주일미군(USFJ)과 주한미군(USFK)이 한 묶음이기 때문이다. 주한미군과 주일미군은 미 인도태평양사령부의 작전통제를 받고 작전상 연계돼 있다. 주한미군에는 미 제2사단 등 강력한 지상군이 있고 주일미군은 해군과 공군, 해병대 위주로 편성돼 있다.
한반도에서 분쟁이 벌어지면 미국은 지원병력을 파견한다. 지원병력은 미 본토뿐만 아니라 주일미군으로 꾸려진다. 주일미군은 유사시 한반도에 증원 병력으로 파견될 뿐 아니라 정비와 휴식, 탄약 재보급, 정보 수집, 의료 지원 등 미군 발진기지 구실을 맡는다. 일본은 주일미군(유엔사) 활동을 지원하기 때문에 일본 자위대는 한반도 유사시에 자동 관여하게 된다. 한반도 유사시 주일미군을 일본 자위대가 후방 지원하면 곧 한국에 대한 후방 지원이 된다. 이렇게 되면 한국은 자위대의 활동 범위가 한반도 주변 영해나 영공으로 넓어지는 것을 용인해야 한다.
일본의 경제보복, 러시아의 영공 침범, 북한의 미사일 발사 등 한반도를 둘러싼 역학 구도와 해법이 복잡해졌다. 미국이 하자는 대로 따르면 되는 일도 아니다. 한-일 갈등을 관망하던 미국이 중재에 나선 것은 한·미·일 군사협력이 중국 견제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대한 우리의 입장과 논리를 더욱 정교하게 다듬고, 우리 국력이 반영된 새로운 한-미 관계과 한-일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권혁철 한겨레평화연구소장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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