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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선 암 생존자 차별 법적으로 금지, 한국에선 차별금지법 적용 안 돼
등록 2019-07-20 06:13 수정 2020-05-02 19:29
경기도 고양 국립암센터 내 ‘암생존자통합지지센터’에서 암 생존자들이 물리치료사와 재활운동을 하고 있다. 국립암센터 제공

경기도 고양 국립암센터 내 ‘암생존자통합지지센터’에서 암 생존자들이 물리치료사와 재활운동을 하고 있다. 국립암센터 제공

“암 치료는 병을 치료해 생명을 구하는 것뿐 아니라, 치료 후 직장이나 학교로 돌아가 암 발병 이전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을 포함해야 합니다.”

국립암센터 김대용 국가암관리사업본부장은 인터뷰에서 의학적인 암 치료 이후 사회적 지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김 본부장은 지난해 8월 보건복지부 암정복추진기획단장으로도 임명됐다. 그는 한국의 암 정책은 최근까지도 암의 빠른 발견과 예방, 의학적 치료에 중점을 뒀고, 치료 이후의 삶에는 관심을 갖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암환자는 치료로 몸에서 암세포를 없앨 수는 있지만, 삶에 남는 암 투병의 흔적까지는 지우지 못한다. 암을 경험한 청소년은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고, 청장년은 직장으로 돌아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결혼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는다. 노년의 암 생존자도 투병 이전 상태로 돌아가지 못한다. 이처럼 암 경험자가 암 발병 이전 생활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에는 암환자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큰 몫을 차지한다.

그대 다시 암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하리?

사단법인 대한암협회가 2019년 암 생존자 20~60대 남녀 855명에게 설문조사해 발표한 ‘2019년 암 생존자의 사회 복귀 지원을 위한 실태조사’를 보면 직장에서 암 경험자에 대한 차별 유무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69.5%가 “직장 내 차별을 경험했다”고 했다. 응답자 중 73.6%는 차별과 편견에 대한 우려 때문에 암 투병 사실을 직장 동료들에게 말하지 않았거나 앞으로도 밝히지 않을 계획이라고 했다.

암 생존자 차별은 낮은 직장복귀율로도 나타난다. 한국은 암 생존자 직장 복귀율이 30.5%에 그친다. 유럽과 선진국은 60%를 훌쩍 넘고, 독일의 경우 암 치료 2년 뒤 직장 복귀율이 90%에 이르러 한국과 큰 차이를 보인다.

1988년부터 6월 첫쨋주 일요일을 ‘암 생존자의 날’로 정하고 암 생존자의 사회 복귀 중요성을 강조해온 미국에서는 암 생존자 차별을 법적으로 금지했다. 연방 장애인보호법(Americans with Disabilites Act)은 암 치료를 받았다는 이유로 직원 15명 이상인 민간기업과 공공기관 등에서 고용주가 노동자를 차별할 수 없다고 명시한다. 재활법(Rehabilitation Act)도 암 생존자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2010년 약물복용 사실이 폭로되면서 명예가 실추되긴 했으나 한때 미국의 사이클 영웅이었던 랜스 암스트롱은 암 생존자에 대한 미국 사회의 편견을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96년 고환암 판정을 받은 암스트롱은 암세포가 뇌와 폐까지 퍼졌지만 암을 치료하고 다시 트랙으로 돌아왔다. 그는 랜스암스트롱재단(현 리브스트롱재단)을 만들어 암 생존자와 그 가족에게 정보 제공과 지원을 시작했다. 재단은 2004년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가 암 생존자 관리를 위한 계획을 세우도록 지원하기도 했다.

“건강체조 외에 일자리 정보도 달라”

국내에서도 미국처럼 암 생존자 차별 금지를 제도화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일상 복귀를 준비하는 암 생존자를 위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온랩’ 소속 조원희 변호사가 말했다. “한국에선 장애인 차별을 금지하는 법이 있지만, 암 경험자는 이 법에 따라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암 경험자도 차별받지 않고, 안전하게 직장으로 돌아가 계속 일할 수 있도록 제도를 연구하고 있다.”

국민보건서비스(NHS)로 유명한 영국에서도 암 생존자를 지원한 역사가 깊다. ‘맥기암치유재단’이 1996년 암 생존자와 그 가족을 위한 치유센터를 에든버러에 설립한 이후 영국 전역에 15개의 암 생존자 센터가 세워졌다. 맥기 센터는 주로 암환자를 치료하는 병원 근처에 만들어졌는데 병원과 달리 암 치료와 사회 복귀에 대한 정보와 교육을 무료로 받을 수 있다. 이런 민간의 움직임과 별도로, 영국 보건 당국은 국립암생존계획기구(NCSI) 주도 아래 2014년부터 전국 단위로 암 생존자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암 생존자의 사회 복귀를 위한 한국 사회의 노력은 이제 걸음마를 뗀 수준이다. 2017년 2월 ‘국가 암생존자통합지지센터 운영 방안’ 보고서를 작성한 보건 당국은 2017년 중반부터 암생존자통합지지센터(이하 지지센터) 시범사업을 시작해 2년째 접어들었다. 전국 12개 암센터에 세운 지지센터는 현재 암 치료 후 생길 수 있는 다양한 신체적 증상을 상담하고 해결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예를 들어 암 생존자가 암 치료 후유증으로 수면장애를 겪거나 불안·초조 등의 증상이 있으면 지지센터를 방문해 상담받을 수 있다.

암 생존자들은 지지센터의 지원 내용에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2014년 유방암 진단을 받고 재취업을 준비 중인 정미영(35·가명)씨는 “지지센터에서는 건강체조, 스트레스 관리 위주로만 하니 일자리를 상담하거나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고 아쉬워했다. 정씨는 재취업 교육 프로그램, 취업 이후 건강관리, 일하는 암 생존자들의 멘토 강연 등을 원했다. 보건 당국은 지지센터 시범사업을 내년 말까지 시행하면서 암 생존자들의 요구까지 파악한 뒤 구체적인 지원 방안을 다시 짤 계획이다.

관련 전문가들은 암 생존자 지원 내용을 직장과 학교 복귀 등 사회적 지원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12개 암센터에서 제공하는 암 생존자 지원 서비스를 지역사회에서도 이용할 수 있도록 접근성을 높여야 한다고도 했다. “암 생존자의 사회 복귀를 돕는 것은 결국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길이기도 하다. 앞으로 보건소에서도 암 생존자가 지원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을 확대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암 생존자 지원 서비스가 현재 보건복지부에서 추진 중인 ‘커뮤니티 케어’(지역사회 통합 돌봄)에 녹아들어야 할 것이다.”(김대용 국가암관리사업본부장)

“‘커뮤니티 케어’에 녹아들도록”

이러한 변화를 위해 한국 사회에서 선행돼야 할 것은 암 생존자에 대한 인식 변화다. “암 생존율이 높아지면서 암이 비전염성 만성질환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여전히 직장 복귀 정보는 부족하다. 암 생존자가 늘어남에 따라, 암 생존자도 충분히 잘 관리하면 건강하게 일할 수 있다는 사회적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암 생존자를 연구하는 삼성융합의과학원 배가령 선임연구원의 말이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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